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
4과장이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은 낯설지 않다. 감찰부 시절에도 검은 제복이었고, 특무성으로 간 지금도 묵광대는 흑색 계열 제복을 사용하니까. 그러니 4과장이라면 어떤 옷을 입더라도 검은색이면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어울리긴 하네.’
사실 메이드복도 검은색이긴 하지. 흰색이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검은색이 섞여있기는 하니까. 그렇다고 4과장이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고, 바라지도 않았다.
‘왜 잘 어울리지?’
그래서 묘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 때문에 열 받는다. 딱히 화날 일은 아니지만, 내가 애지중지 기른 자식이 이상한 길로 빠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
괜히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이지만 다행히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먼저 저택으로 들여보내길 잘했네. 부담 없이 대화할 수 있겠어.
“언제 온 거야?”
“주인님께서 외출하신 직후에 왔습니다.”
“그…”
주인님이라는 말은 좀 자제해주면 안될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얘가 이유 없이 이상한 일을 할 애는 아니다. 지금은 조금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4과장은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상인이니까.
그리고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4과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손님들로 소란스러운 상황에 사용인까지 늘어나면 주인님께서 번거로우실 것 같아 저만 주인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그래, 배려 고맙다.”
“과찬이십니다.”
다시 허리를 숙이는 4과장. 설명을 들으니 대충 납득이 되는 상황이기는 하다.
아무리 묵광대가 나를 지원하기 위한 전력이라지만, 타국 주요 인사가 머무는 저택에 제국 특수 전력이 당당히 머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력 시위다. 빌라르가 알았다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며 배신감에 치를 떨 일이지.
그래서 다른 묵광대는 저택 근처 어딘가에 잠복 중이고, 대표인 4과장만 하녀…라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와 접촉했다는 거다. 자연, 스럽나? 자연스러운 거 맞지?
문득 4과장의 모습을 빠르게 훑어봤다. 차가운 표정, 날카로운 눈매, 여자치고는 큰 키. 흐으으으음.
“당분간 잘 지내자고.”
“예, 주인님.”
난 이미 하녀가 아닌 4과장이라는 걸 알고 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4과장도 생각이 있으니 이렇게 온 거겠지. 그래, 키 좀 큰 하녀가 있을 수도 있지. 평민이라고 체격이 작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차별적인 마인드야.
“집사는 만났어?”
“예. 다른 사용인과도 전부 만났습니다.”
4과장도 사용인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거다. 오랜만에 만났으면 안에서 같이 차라도 마시지.
“그러면 계속 안에 있지,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주인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됐어. 들어가자.”
4과장의 몸을 저택 쪽으로 밀었다.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내가 앞서 나가니 그제서야 따라오더라.
가만히 방치하면 이 악물고 늘어지는 것들이 있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찾아서 하는 애들이 있다. 4과장은 후자라 이렇게 챙겨줘야 쉬는 타입이다.
***
특무성 장관의 호출은 갑작스러웠다. 정보부와 함께 북방에 다녀오자마자 부르니 기분이 좋지는 못했지만.
“감찰부장의 저택으로 가라. 합류 후에는 감찰부장의 지시에 따르도록.”
부장님을 볼 수 있는 일이라면 북방이 아닌 대륙 끝에 다녀왔어도 기쁘게 호출에 응할 수 있다. 얼마 전에도 아카데미에서 부장님을 뵐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도에서 함께 할 수 있다.
짐을 풀고 있던 대원들도 소식을 듣자 도로 짐을 싸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부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뭉그적거릴 것들은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저희 다 저택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훈훈하던 분위기는 부대장의 말에 급격히 가라앉았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부장님의 저택에는 부장님뿐만 아니라 3황자를 포함한 주요 인사도 함께 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우르르 방문하면 오히려 부장님께 폐가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부장님께 도움이 되지 못할 망정 피해를 주게 된다면 당장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대장은 대원들을 지휘하셔야 하니, 제가 부장님께 붙─”
“내가 간다.”
“…혹시 삼국 중에 대장님을 알아 보는 사람도─”
“내가 간다.”
부대장의 개수작은 빠르게 잘라냈다. 당연히 대장인 내가 부장님과 함께 있어야지, 어딜 어줍잖은 짓을. 이건 위아래도 구분하지 못한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다.
그렇게 부대장에게 대원들을 맡기고 나 홀로 부장님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페넬리아 언니?”
“어, 정말? 언니야?”
정원에 진입하자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두 하녀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유리스, 소피아.”
둘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자 물뿌리개를 내려놓더니 곧장 나에게 달려왔다. 아무리 반가워도 일을 미루다니, 이건 혼낼 필요가 있겠는데.
“언니!”
“와, 오늘 주인님도 오셨는데!”
하지만 활짝 웃으며 안기는 두 아이를 보니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아직 어린 애들이니 그럴 수 있지. 한 번 정도는 넘어가도 괜찮을 거다.
“부장님은?”
“방금 나가셨어.”
헤헤 웃으며 답하는 소피아의 말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빨리 왔으면 바로 부장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는데.
그래도 괜찮다. 당분간은 부장님의 저택에서 지내야 하는 입장이니까. 아쉬움을 이겨낼 수 있는 행복이 기다리는데 작은 일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아, 집사님한테 알려드려야지.”
“언니가 온 걸 알면 다들 기뻐할 거야!”
조잘조잘 말을 잇던 아이들이 내 손을 하나씩 잡더니 저택으로 끌고 갔다.
“하던 일이 있지 않니?”
“주인님이 쉬엄쉬엄해도 괜찮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유리스와 소피아에게 이끌려 집사님에게 가는 동안 저택에 있는 사용인과 전부 만난 것 같았다. 다들 반갑게 맞이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동안 편지 말고는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오, 페넬리아 경 아닙니까.”
“페넬리아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농담을 못 받는 걸 보니 페넬리아 맞구나.”
집사님도 직접 차를 건네주며 반겨주셨다. 그러고는 유리스와 소피아에게 돌아가라고 손을 휘저으셨지만, 둘은 내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사님에게는 저택에 온 이유를 설명해야 하니 계속 있으면 곤란한데.
“당분간은 저택에 있을 거야. 같이 놀 수 있으니 돌아가 있어.”
“정말?”
“정말.”
그제서야 집사님과 단 둘이 남을 수 있었다.
“그래, 다들 잘 지냈느냐?”
“예,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묵광대의 안부를 물은 집사님은 내 대답에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험한 일을 하는 특무성 전력이 아직도 잘 지낸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 전부 우리를 확실히 훈련시킨 부장님의 은혜다.
“걱정이 많았단다. 우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거 기꺼운 말이구나.”
웃음을 터뜨리는 집사님을 따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부장님을 따라 감찰부 4과로 활동하던 묵광대, 부장님의 저택을 지키는 사용인. 우리는 전부 가족이나 다름없다.
끔찍한 전쟁 속에서 모든 걸 잃은 밑바닥 인생을 겪었던 동지니까. 그 밑바닥 인생에서 단 한 사람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주인을 섬기는 가족이다.
“마침 주인님도 저택에 오셨는데, 우연은 아닌 것 같고.”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알겠다. 편히 있으려무나.”
“…더 묻지는 않으십니까?”
가볍게 넘어가는 집사님의 모습은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내 반응에 집사님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셨다.
“가족이 집에 돌아온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역시 부장님이 전적으로 믿고 저택을 맡기신 분.
그래도 삼국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나만 저택에 진입했고, 나머지는 주변에 대기 중이라는 말 정도는 전달했다. 그러자 몇 번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셨다.
“그, 저기, 이건?”
그리고 메이드복 하나를 들고 오셨다.
“저택에 하녀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지. 의심 받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 아니겠느냐.”
설득력 있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차마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부장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후 오직 검만 휘두른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런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다고?
게다가 부장님께 저런 꼴을 보여드리면 실망하시지 않을까?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이제 페넬리아도 주인님을 주인님이라 부를 수 있겠구나.”
그 말에 홀린 듯 손을 뻗고 말았다.
집사님이 주신 옷으로 갈아입고 부장님, 아니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정원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거슬리는 부분이 보여서 가지치기를 한 건 예정 외의 업무였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주인님께서 정원에 오셨다.
“언제 온 거야?”
“주인님께서 외출하신 직후에 왔습니다.”
놀라신 듯 하지만 그래도 꺼리지는 않는 것 같은 반응에 마음이 놓였다. 혹시 주인님이 우리가 아닌 다른 부대를 원하시면 어쩌나 걱정했었으니.
하지만 나를 위아래로 훑는 모습에는 마음이 아팠다. 역시 주인님이 보기에도 이상하구나. 그래도 대놓고 말씀하지 않는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계속 안에 있지, 왜 밖에서 이러고 있어.”
“주인님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됐어. 들어가자.”
저택으로 몸을 돌리는 주인님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방으로 돌아가면 바로 갈아입자. 사람은 분수에 맞는 일을 해야지, 괜히 벗어나는 일을 하면 미움만 받는 법이니까.
“평소 입던 옷하고 달라서 불편해 보이는데.”
그리고 기어코 나와버린 말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갈아입으려 했지만 주인님께서 참다 참다 못해 결국 지적하셨으니.
“그래도 잘 어울려서 갈아입으라고는 못 하겠다.”
“예?”
이어지는 예상 외의 말에 감히 주인님께 반문하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주인님은 괜찮다는 듯 뒤를 돌아보셨다.
“잘 어울린다고.”
주인님의 한 마디에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 같이 진정됐다.
***
4과장이 쭈뼛거리는 게 뒤에서도 느껴졌다. 스스로도 어색해 할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 의문이기는 한데.
주눅이 든 것 같아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주니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해서 다행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하자. 나도 업무 때문에 집사복을 입고 지인, 그것도 상사 집에서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하면 미쳐버리겠지.
“이야, 이 새끼 꼬라지 봐라!”
순간 장관이 비웃는 목소리가 자동 재생됐다. 정말 끔찍하다.
‘대단하네.’
4과장은 정말 엄청난 용기로 내 앞에 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