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0)
로판 속 공무원 920화(921/945)
황태녀가 다시 저택으로 놀러 오기 시작했다.
대문 앞에 몰린 인파와 황제의 분노로 인해 황태녀의 저택 방문이 중단된 상태였으나, 발광 십자가 사태 이후로 황태녀의 발걸음을 막은 난관이 전부 사라졌다.
솔직히 인파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리 빨라도 올해 안에는 황태녀가 놀러 오지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황태녀의 인내도 바닥날 터이니, 차라리 대문 밖이 어수선해도 저택에서 노는 것이 옳다.
그리고 내 명예가 상승함에 따라 황제도 이런저런 이득을 챙겼기에, 눈이 돌아간 황제도 황태녀의 외출을 허락했다. 이렇게 보면 에넨이 황태녀를 위해 큰 선물을 줬어.
‘어른보다는 애가 먼저다 이거지.’
속세에 찌든 시커먼 어른들보다는 파릇파릇하고 순수한 어린아이를 먼저 배려하는 세심함. 저런 세심함 정도는 갖춰야 대륙 주류 종교도 해먹는구나.
게다가 황태녀는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차기 황제인 어린아이지 않나. 미리 호감도를 높여 놓으면 신앙에도 도움이 되겠지. 불멸자인 신치고는 실로 계산적인 판단이다.
물론 황태녀는 이게 에넨의 선물이라는 걸 모르지만. 나도 딱히 말해줄 생각은 없고.
“때부! 나왓써!”
“어서 오십시오, 전하. 저택에서 뵙는 건 오랜만이로군요.”
“웅! 그래서 나! 선물도 잔뜩 가져왓서!”
“선물이요?”
“웅!”
황태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황태녀를 보필하던 시녀들이 작은 상자들을 홀에 내려놓았다.
상자 하나하나의 크기는 작지만 고급스레 포장되어 있고, 상자의 개수는 시녀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덕분에 시녀장, 혹은 시녀 두세 명 정도만 데리고 다니던 황태녀가 10명이 넘는 시녀 군단과 동행한 거겠지.
“이거! 때부랑, 때모들이랑, 동생들이랑, 아저씨 아줌마들꺼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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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뿐만이 아니라 사용인들을 위해서도 챙겼다는 말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기특하기 짝이 없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으니 아랫사람들을 병풍이나 부품 정도로 여겨도 이상하지 않은데, 사용인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구나.
인정하겠다, 누렁이. 비록 딸 하나 막지 못하는 무능한 아비지만 인성 교육만큼은 제대로 하고 있어.
‘황후가 한 건가?’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렁이 대신 황후에게 생각이 닿았다.
솔직히 그놈보다는 황후의 작품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기는 해. 황제가 누군가에게 인성 교육을 할 입장은 아닌 데다, 업무에 치이느라 시간도 없잖아.
“다 가치 먹을 과자랑, 케이크랑, 초꼴릿이랑, 사탕이랑… 또오…”
“부인분들을 위한 장신구, 자제분들을 위한 장난감, 사용인들을 위한 의복입니다.”
“그렇군요.”
철저히 어린아이 입장에서 선물을 기억한 황태녀와 적절한 첨언을 해 준 시녀장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장신구, 장난감, 의복. 전부 적절하고 무난한 선물이다. 특히 사용인들에게 의복을 줬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내가 사용인들에게 봉급을 섭섭하게 주는 것이 아님에도, 사용인들은 의복에 큰 투자를 하지 않더라. 사용인이 일할 때 입는 옷만 튼튼하면 그만인데 의복에 투자할 일이 어디 있느냐고 반박할 정도.
하필 주인인 나도 의복에 무신경한 편이라 더 강권할 수 없었지. 당장 나부터가 감찰 제복을 애용하는데, 무슨 자격으로 ‘제대로 차려입고 다녀.’ 같은 말을 하겠어.
‘황실의 선물이면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황태녀가 가져온 선물이라면 사용인들도 입고 다녀야 한다.
귀한 선물이니까 소중히 보관만 한다? 그런 건 의복이나 장신구에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기껏 받은 선물을 옷장에만 받아두는 건 큰 무례지, 아무렴.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다들 기뻐할 겁니다.”
“히히, 그치?”
“물론이지요. 전하를 오랜만에 뵙는 것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이런 선물까지 있다면 다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황태녀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아.’
그 모습을 보니 아주 작은 장난기가 솟구쳤다.
“하온데 전하.”
“웅? 왜?”
“디저트 말고 이 대부한테 줄 선물은 없습니까?”
“으에?”
그러자 황태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시녀장이 언급한 선물은 부인들, 아이들, 사용인들을 위한 선물. 그중에 나를 위한 선물은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선물을 받지 못한 존재들은 애완동물들과 리시안느 정도다. 즉, 황태녀는 이 대부를 동물이나 인형과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것.
‘나를 검은 머리 짐승으로 여기고 있구나!’
아, 황태녀 전하께서는 이 대부를 거두어서는 안 될 짐승으로 여기고 있구나! 더 살아서 무엇하리!
“때, 때부, 그게…”
내 회심의 농담에 황태녀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황태녀의 6살 인생 최대 난관이나 마찬가지겠지. 이 난관을 극복한다면 황태녀는 보다 강인해질 수 있을 터.
“아,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그러나 6살 아이가 넘기에는 너무 높고도 잔인한 난관이기에 이쯤에서 장난을 멈췄다. 귀여운 모습은 충분히 봤으니 됐어.
“전하께서 오신 것이 제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다른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황태녀를 안아올리자, 황태녀는 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마쟈! 내가 선물이야!”
이윽고 눈을 반짝이며 내가 열어둔 활로로 달려들었다.
기특하다.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할 센스는 갖추지 못했으나, 대놓고 열어준 활로를 눈치챌만한 눈치는 갖추었다. 6살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도 발군의 재능이라 할 수 있다.
차기 황제가 이토록 현명하니 제국과 황실의 미래가 밝구나. 이 대부는 만족했다.
“그럼 제 선물이니, 전하께서는 계속 제 집에 있어야겠지요?”
순간 황태녀의 눈에 깊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저 눈빛. 내 말대로 정말 저택에 남을까 검토하는 것 같았다. 저택에 남으면 온갖 장난감과 동물 친구들, 동생들과 페디가 있으니까.
“아, 아냐! 나두 우리 집으로 가야대! 엄마랑 아빠 기다려! 할아부지도 잇서!”
“이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저희 집에 있는 동안만 선물로 지내는 겁니다?”
“웅!”
짧은 고민 끝에 황태녀는 황궁을 택했다.
다행이다. 황태녀가 정말로 저택 상주를 택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했을 테니까.
온갖 디저트를 들고 강림한 맏누나이자 맏언니. 빈손으로 왔어도 반가웠을 존재가 선물까지 들고 나타나자 우리 아이들은 격하게 황태녀를 반겨주었다.
황태녀도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예뻐해 주었다. 혹시 ‘페디 말고 필요 없으니 다 비켜!’ 같은 태도를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페디를 좋아하는 마음은 크되, 다른 동생들을 향한 마음도 진심인 모양이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황제는 분노와 이성 사이에서 이성을 택했고, 황태녀와 아이들의 우애도 변함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제 황태녀가 방문하는 걸 꺼리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물론 황태녀와 페디가 더 자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으나, 그건 미래의 일이니까. 당장 고민할 일은 아니지.
“저어, 주인님…”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던 중.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아, 갈아입고 왔네?”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입는 하녀복이 아니라 귀족 영애처럼 차려입은 소피아. 아주 적절한 옷을 선물로 받은 것 같아 내가 다 만족스럽다.
‘시녀장 작품인가?’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어울리는 옷이라 절로 시녀장에게 생각이 닿았다.
시녀장은 황태녀와 함께 툭하면 우리 저택으로 오는지라, 저택의 사용인들하고도 제법 안면을 튼 상황이다. 소피아의 외모와 체격, 분위기 정도는 얼마든지 알고 있지.
덕분에 사용인 한 명 한 명에게 적절한 옷을 마련한 건가? 그런 거라면 시녀장에게 따로 감사 선물을 줘야 할 정도야. 조만간 괜찮은 걸로 하나 준비해야겠어.
“제, 제가 이런 걸 입어도 괜찮은 걸까요…?”
“입으라고 준 선물이니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황실이 준 선물을 옷장에만 두는 게 더 실례야. 마음에 안 들어서 방치하는 것 같잖아.”
“그럴 리가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최고예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내젓는 소피아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과자가 담긴 접시는 꽉 잡고 있다니. 뛰어난 직업 정신이야.
“쏘피아 언니!”
“언니! 언니 예뻐!”
이윽고 선물 받은 장난감으로 놀고 있던 마리아, 세실리아의 시선이 소피아에게 향했다.
역시 아이들의 시선도 어른의 시선과 다를 게 없다. 늘 하녀복만 입던 소피아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강림해서 그런지, 아주 열렬한 반응이야.
“자, 가봐. 선물 받은 기념으로 같이 놀아줘.”
“저, 저, 저 혼자서요?”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울 정도다.
기이한 반응이다. 애들과 놀아주는 게 처음도 아니고, 황태녀와 만나는 것도 처음이 아니잖아. 새삼 이렇게 긴장할 일이 있나?
“마, 만약에 옷이 더러워지면 어쩌죠? 황태녀 전하께 받은 선물이라 입고 온 건데, 전하 앞에서 더러워지면…”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여차하면 트릭시한테 고쳐 달라고 할 테니까.”
소피아의 등을 가볍게 아이들 쪽으로 밀었다. 마침 복도 너머에서 유리스가 달려오는 게 보이니, 소피아 혼자 아이들을 감당할 필요도 없다.
‘흠.’
소피아처럼 드레스로 갈아입은 유리스를 보니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 집 하녀들인지 곱기도 하지. 당장 결혼해도 부족함이 없는 외모에 성품에 나이인데, 애석하게도 둘 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 원한다면 평생 우리 저택의 사용인으로 지내게 할 수도, 넉넉한 퇴직금을 쥐여줘서 독립시킬 수도 있는데.
말로는 적당한 상대가 안 보여서라고는 하지만, 상대를 찾고 있는지는 한가 의문이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
사실 나도 귀족치고는 늦게 결혼한 편이니 남의 결혼으로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다. 내가 결혼 적령기를 주장해 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에 더 되겠나.
어째 주인이 늦게 해서 하녀들도 늦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벗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예하를 뵙습니다!”
“””예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자 사제들이 고개를 숙이며 반겨주었다.
익숙한 얼굴보다는 낯선 얼굴들이 더 많은 인파. 내가 진정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시지요. 늙은이 한 명을 위하여 형제자매님들이 모인 것으로도 송구스러운데, 이렇게 격하게 반겨주시면 민망할 따름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대표로 외치는 사제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 대교구장 대리로 지내던 사제가… 신앙교리성 출신일 줄은 몰랐다…
‘주여.’
어찌 은퇴를 앞두어야 할 이 늙은이에게 이런 시련을.
성하께서는 은퇴하셨는데, 저는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