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1)
로판 속 공무원 921화(922/945)
성 파로나스 대성당. 제국 제일가는 규모와 권위를 지닌 성당이자,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아우스엔 대교구의 중심지.그리고 상황의 양위와 현 황제의 즉위, 나와 마르의 결혼식이 이루어졌던 뜻깊은 공간.
그렇기에 내 성인 등극을 기념하여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국인의 경사라면,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자의 경사라면 마땅히 그곳에서 기념 예배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신임 아우스엔 대교구장의 주도로 내 시성 기념 예배가 진행될 예정이라고는 들었는데,
“예?”
신임 대교구장의 입국 소식을 듣자마자 절로 반문이 나왔다.
“신앙교리성 성장이,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네. 짐도 상당히 놀랐어.
황제가 알려준 신임 대교구장의 정체가 상당히 의외라 도저히 반문을 참을 수 없었다.
신앙교리성 성장인 페드로 오트바야 추기경. 권위면에서는 성자가 교황과 대등한 수준의 2인자이고, 직책으로만 보면 수석 추기경이 교황의 뒤를 잇는 2인자이나─ 교단의 실질적 2인자가 페드로 추기경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보수 파벌의 거두이자 교황의 정적인 사람이 3인자, 4인자, 5인자면 이상하잖아.
해서 전 교황의 은퇴 이후, 빠른 시일 내에 페드로 추기경도 은퇴 수순을 밟을 것이라 예상했다. 발트사크 38세로 진화한 리시우코 추기경의 입지를 고려하면 페드로 추기경이 물러나는 게 맞으니까.
물론 잘 돌아가던 아우스엔 대교구의 수장을 빼온 건 페드로 추기경의 업보이니 책임은 지고 은퇴할 거라 생각했으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후임 대교구장 선발로 골치를 앓는 수준이라 생각했다. 설마 페드로 추기경이 직접 대교구장이 될 줄은 몰랐어.
‘이게 말이 되나.’
황제조차 상당히 놀랐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례적인 사태다. 아마 교단 내에서도 이 인선이 맞는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거다.
그만큼 교단의 실질적 2인자, 보수 파벌 수장의 아우스엔 대교구장 임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솔직히 페드로 추기경의 압도적인 입지를 제외해도 성장이 대교구장으로 온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거의 좌천이잖아.’
아무리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아우스엔 대교구라도 신성교국 입장에서는 지방직이다. 리브노만 황실이 여명 교단과 우호적이라 지방직 중에서 제일로 꼽히더라도 결국은 지방직이다.
권력은 자고로 중앙에 모이는 법. 지방 제일의 도시니, 교통의 요지니, 자원의 보고니 같은 휘황찬란한 말로 꾸며도 지방을 지배하는 세력가와 중앙의 실세는 격이 다른 법이다. 아우스엔 대교구장과 신성교국 성장들의 차이도 그러하다.
당장 콘클라베로 끌려가기 전의 리시우코 추기경만 해도 성장들 앞에서는 다소 접어줘야 했다. 교국의 의전상 대교구장보다 성장이 우위기에.
– 백작. 혹시 교국에서 언질을 받은 게 있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성장… 아니, 대교구장의 안색이 다소 어둡기는 했습니다만, 당연히 콘클라베의 여파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군. 하긴, 백작이 알고 있었다면 진즉에 말했겠지.
내 대답에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머리가 복잡할 거다. 단순히 거물이 신임 대교구장으로 온 거면 ‘교국이 제국을 중히 여기는 증거’ 정도로 생각하며 넘어갈 수 있다. 신임 대교구장의 정치력이 상당해도 ‘능력이 출중하니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는 상대’라며 애써 좋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전대 교황에 이어 다시 진보파 교황이 등극한 상황에서, 전대 교황의 정적으로 유명한 페드로 추기경이 좌천성 인사 발령을 받았다? 이건 누가 봐도 파벌 대립이잖아. 제국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교단의 파벌 대립에 휘말리는 꼴이고.
– 우선 집무실로 와주게. 곧 대교구장이 찾아올 예정이라서 말이야. 백작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예, 폐하. 바로 가겠습니다.”
황제의 일방적 통보였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정말로 파벌 대립의 일환이라면 조기에 대처하는 것이 이롭다. 교단 내 대립이 격화될수록 각 파벌은 자연스레 성인인 나에게도 손을 뻗으려고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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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귀찮아질 바에는 황제와 함께 조기 진압에 나서는 것이 맞다.
조기 진압의 꿈은 빠르게 좌절되었다.
“두 분께서 우려하시는 이유로 이 늙은이가 제국에 온 것은 아닙니다.”
페드로 추기경의 말에 머쓱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초에 진압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조기 진압은 뭔 놈의 조기 진압이야. 우리가 지레 겁을 먹고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투지를 불태웠던 거였어.
“확실히 남들이 보기에는 독특한 인선이기는 하지요. 이 늙은이가 신앙교리성 성장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직 세 가지 길만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이어지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앙교리성 성장까지 오른 페드로 추기경에게는 단 세 가지의 길만 남아있었다. 자기 자신이 교황이 되거나, 아니면 교황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비서성 성장 겸 수석 추기경이 되거나, 그도 아니라면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사실 비서성 루트도 페드로 추기경의 권위를 생각하면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으나, 아우스엔 대교구장에 비하면 압도적 선녀다. 아무도 이 네 번째 길은 상상조차 못 했어.
“허면 페드로 추기경. 어찌 이 제국으로 오게 된 것이오? 물론 페드로 추기경이 제국의 신앙을 위하여 헌신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으나, 상당히 의외인 일이라 당혹스럽구려.”
“그것이, 말입니다.”
황제의 직설적인 질문에 페드로 추기경은 난처한 듯 웃음을 흘렸다.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 이토록 직설적인 화법을 주고받는 건 드문 일이다. 허나 페드로 추기경이 먼저 ‘너네가 생각하는 파벌 대립 같은 거 아님.’ 이라며 대놓고 말하지 않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까지 편히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선 제가 대교구장이 된 것은 현 교황 성하의 첫 인선이 아닙니다. 전대 성하의 마지막 인선이지요.”
“전대 성하께서? 아니, 시성이 끝나자마자 은퇴를 선언하셨는데 인선까지 진행하셨다고?”
황제의 목소리에는 짙은 당혹감과 경이로움이 깃들어있었다.
‘사람인가.’
당연하지만 황제가 경악할 사안이면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다. 생전 시성과 기습적인 은퇴로도 바빴을 양반이 아무도 모르게 인선까지 진행했다니. 그게 과연 사람의 능력인가.
심지어 어디 말단직이나 명예직을 하사하는 결단도 아니었다. 무려 교단의 2인자를 지방으로 날려버린 강력한 인선이었어.
“저도 놀랐습니다. 사실 현 교황 성하께서 자리를 잡으시면 은퇴할 생각이었는데, 전대 성하께서는 그런 저를 꾸짖기라도 하듯 이곳으로 보내셨지요.”
그렇게 말한 페드로 추기경의 눈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교황 발트사크 37세는 교단의 대의와 올바른 신앙을 위하여 물러나야 할 때이지만, 교단의 기둥인 페드로 오트바야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면서 말입니다. 발트사크 37세의 존재는 교단에게 득이 될 수 없으나, 페드로라는 추기경은 만인에게 이롭다고 하던가요? 사실 이 늙은이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말입니다.”
어느덧 씁쓸함 대신 희미한 공허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해한다. 은퇴를 코앞에 두고 이런 공격을 당한다면 누구라도 우울하겠지. 그것도 공격한 사람이 ‘나는 은퇴하지만 넌 안 돼.’ 같은 말을 한다면 더더욱.
‘와.’
순간 황제가 황태녀에게 양위하는 주제에 ‘백작은 계속 일하게.’ 같은 말을 하는 걸 상상했다.
그딴 참사가 벌어지면 내가 죽거나 황제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전대 성하께서 이 우둔한 늙은이를 신뢰하시어 중임을 맡기고 떠나셨는데, 부담스럽다고 도망칠 수는 없지요. 한 명이 고생하여 만인이 평온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예하의 뜻이 참으로 숭고합니다. 전대 성하께서 예하 같은 분을 제국에 보내신 건 제국의 홍복이니, 제국인으로서 어찌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페드로 추기경을 최대한 치켜세웠다.
페드로 추기경이 온 것은 제국의 경사, 제국의 복, 제국의 기쁨이라고. 당신의 행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훌륭하구려.”
황제가 느릿하게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한 명이 고생하여 만인이 평온할 수 있다면 감수할 수 있다라. 실로 아름다운 말이오. 대의를 위해 아펠스와의 투쟁을 택하셨던 대제께서도, 영혼을 불태우며 나아가셨던 에이만카 2세께서도 그런 마음이셨겠지. 추기경의 말은 제국의 기치와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터.”
“과찬이십니다, 폐하. 이 늙은이는 그저 리브노만의 훌륭하신 선제들께서 남기신 아름다운 전례를 흉내 낼 뿐입니다.”
“아는 것과 본받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 추기경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는 것 같소.”
이상하다. 분명 추기경을 향한 극찬인데, 추기경을 향한 말인데 내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작.”
“…예, 폐하.”
“백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참으로 아름답고도 숭고한, 제국의 뭇 귀족들과 관료들이 본받아야 할 길이 아닌가.”
“그렇, 사옵니다, 폐하.”
“음. 백작이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네.”
이제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명의 희생으로 만인의 행복. 설령 그 한 명이 은퇴를 앞둔 노인일지라도…”
‘이 새끼가.’
너 이 망할 새끼. 대체 왜 그 말을 나를 보면서 하는 거냐.
왜 추기경이 아니라 나를 보는 거냐고.
“허허. 제국의 미래도 참으로 밝군요.”
그 와중에 페드로 추기경은 다 알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이 집무실 안에 내 아군이 아무도 없다.
페드로 추기경의 대교구장 취임은 제국을 넘어 대륙 전역을 뒤흔들었으나, 다행히 빠르게 소란이 가라앉았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생전 시성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연장선입니다. 살아있는 성인께서 아우스엔 대교구에 계시니, 보다 명확한 전례를 세워야 후대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과분하게도 전대 성하께서는 이 늙은이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자신이 제국에 온 건 현 교황이 아닌 전대 교황의 결정이고, 그 이유는 살아있는 성인인 내 영향이 크다는 말.
놀랍게도 이 명분은 상당히 합리적이었는지, 여명 교단의 신도 셋만 모여도 술렁거리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역시 2인자.’
거대 교단 2인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저런 사람이니 전대 교황이… 마지막까지 부려먹는 거고…
‘안타깝다.’
저게 내 미래 같기도 해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