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2)
로판 속 공무원 922화(923/945)
제국에는 아우스엔 대교구 외에도 10개의 대교구가 존재한다.
각 공작령에 설치된 세르베트, 울켄, 하블렘, 체네스, 보야르 대교구. 각 왕령에 설치된 티라프, 그로텐, 라티아, 프루니안, 갈란 대교구. 이렇게 10개.
사실 프루니안 대교구와 갈란 대교구는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다른 대교구 예하인 것이 적당하나, 제국과 우호적인 여명 교단에서 서비스 느낌으로 설치한 감이 없잖아 있다. 자국 내에 존재하는 대교구 개수는 그 국가의 인구, 신앙심, 교단과의 우호도 등등을 나타내는 징표니까.
그리하여 아우스엔 대교구를 제외할 경우 제국 내에 존재하는 대교구는 10개이며, 자연스레 대교구장도 10명.
“성스러운 분을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예하.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는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열릴 ‘살아있는 성인 탄생 축하 예배’에 최소 10명의 추기경이 참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 현 아우스엔 대교구장은 교단의 실질적 2인자(였던 사람)이자 전대 교황의 은퇴로 인해 짬킹이 되어버린 페드로 추기경이지 않나. 막말로 제국 각지에서 모인 대교구장 중 젊은 편에 속하는 추기경들은 감히 페드로 추기경과 나란히 서지 못할 정도로 짬 차이가 심하다.
젊은 대교구장들이 사제 서품식을 받았을 때, 페드로 추기경은 이미 추기경이었다. 군대식으로 비유하면 자기가 소위 임관을 했을 당시 장성이었던 사람이 여전히 장성으로 버티는 것과 유사한 상황. 그런 대선배에게 ‘우리 같은 직책이니까 편하게 대해도 되지?’ 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친놈도 아니고.
“제가 비록 주를 섬기기 위해 세속의 미련을 벗어던진 종이나, 제국에 머무르며 제국의 신도분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애착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헌데 이 제국에서 살아있는 성인이 나오다니.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예하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증거나 마찬가지인 프루니안 대교구장이 성호를 긋기에 마주 성호를 그었다.
프루니안 대교구장이 방금 떠올렸던 ‘짬 차이 심한 추기경’ 중 하나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정상적인 가치관과 인품을 갖춘 자인지라, 대선배가 예배를 주도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개같이 달려온 인물이기도 하고.
물론 다른 대교구장들이 느긋하게 왔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제국 곳곳에 드래곤볼처럼 흩어졌던 대교구장들은 자발적으로 집결한 지 오래야.
“저야말로 제국의 신앙을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을 한자리에서 뵙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심지어 페드로 추기경 예하께서 아우스엔 대교구장으로서 예배를 진행하신다고 하니, 저보다 큰 영광을 짊어진 자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하, 그도 그렇지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말에 프루니안 대교구장은 웃음을 흘리더니,
“마음 같아서는 성스러운 분을 뵌 김에 같이 기도라도 드리고 싶으나, 아직 페드로 추기경 예하를 뵙지 못해서 말이지요. 실례가 아니라면 인사를 드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슬쩍 눈치를 보며 자연스레 물러났다.
이해한다. 프루니안 대교구장 뒤에서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공적으로는 동일한 대교구장들이며, 사적으로는 선배인 사람들이 빨리 비키라고 압박을 넣고 있는데 어떤 용자가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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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니 안타깝다. 막내의 업으로 인해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고, 누구보다 먼저 비켜야 하다니. 이 얼마나 서러운 인생인가.
‘하여간 경력이 깡패지.’
아무리 능력 위주로 승진한다고 해도 결국 능력자들만 모이면 나이와 경력을 따지게 된다. 나도 20대에 장관이 되었으나, 정작 장관이 되니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잔뜩 있잖아. 그나마 젊은 황제조차 나보다 연상이야.
프루니안 대교구장을 사제의 길을 택한 나라고 생각하니 묘한 동질감이 솟구쳤다. 앞으로 프루니안 쪽으로 갈 일이 생기면 꼬박꼬박 인사라도 해야겠어.
친히 성 파로나스 대성당까지 찾아와 자리를 빛내준 라인업은 교계만이 아니라 세속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제국 각지의 대교구장들이 와서 그런지, 제국도 질 수 없다는 듯 전국의 공작들과 후작들이 몰려왔으니까. 특히 북방 같은 경우에는 대영주 전원이 상경했다.
실소가 절로 나오는 라인업이지만 애써 이해할 수 있었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 살아있는 성인이 되어 교계의 축복을 받는데, 정작 같은 제국 귀족들이 무덤덤하다? 괜히 제국과 타일글레헨 백작의 불화설이 나돌기 딱이지.
“오늘만큼은 백작이 아니라 성 칼이라 불러야겠어.”
다만 황제까지 온 것은 머리가 이해해도 가슴이 이해하지 못했다.
이왕이면 넌 대리인만 보내지 그랬냐. 교황이 불참했으니까 황제가 불참했어도 이상한 건 없잖아. 이미 제국 공작 전원이 참석한 것만으로도 명분 쌓기는 충분히 했다고.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폐하. 제 혼은 천상의 주께서 사용하실지라도 지상의 육체는 폐하를 섬기고 있습니다. 편히 백작이라 불러주십시오.”
일단 씁쓸함을 억누르며 의례적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성 칼인 건 맞지만 황제가 공식 석상에서 성 칼이라 부르는 건 별개의 문제다.
아니 물론 이론상으로는 황제가 아니라 상황이어도 성 칼이라 부르는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황제가 부를 이름은 아니야… 그냥 백작이라고 불러…
“혼은 천상에 있으되 육체는 지상에 있다라. 멋진 말이로군. 명심하도록 하겠네.”
황제도 호칭 문제로 아웅다웅할 생각은 없었는지, 내 부탁 아닌 부탁에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새끼. 그냥 놀리고 싶어서 한번 찔러본 거구나.
“때부! 안녕!”
“어서 오시지요 전하. 이 대부를 위하여 이 먼 곳까지 와주시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착잡했던 마음은 황후의 품에 안겨 있던 황태녀 덕분에 스르륵 녹아내렸다.
같은 제도 안에서 멀다는 말을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나, 성 파로나스 대성당은 우리 저택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아무튼 먼 곳은 먼 곳이야.
“아냐! 하나두 안멀엇서! 그리구 오늘 때부한태 조은날이라고 해서 온거야!”
“하하, 이거 더 감격스럽군요.”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다. 어느 누렁이와 달리 우리 황태녀는 은발처럼 새하얗고 순수─
“근대 때부. 성 칼이 뭐야?”
‘아.’
너무 새하얘서 옆에 있던 누렁이에게 변질되고 말았다.
통탄스럽다. 하늘은 어찌 황태녀를 황제의 자식으로 하사한 것일까. 황제의 인성이 바닥이라 황태녀로 중화하려는 계획인 건가?
“그게, 전하. 성 칼은 말입니다…”
아무튼 황태녀의 기습 질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성인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얼마나 간편하고 짧게 말해야 6살 아이가 이해할 수 있지?
“성 칼은 황태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으에? 나?”
그렇게 강제로 침묵에 빠져 고심하는 사이,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황태녀. 이름이 뭐지?”
“샤를로때!”
“그래. 샤를로테기도 하고, 황태녀기도 하지? 대부도 이름과 별개로 불리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는 거야. 그게 성 칼인 거지.”
“그러쿠나!”
황제의 말에 황태녀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황제가 드물게도 친부의 역할을 확실하게 했다. 설명하기 곤란한 의문을 적절하게 처리했어.
“그러니 우리 황태녀. 앞으로 대부를 대부가 아니라 성 칼이라 불러도 괜찮단다. 알겠느냐?”
‘이 새끼가.’
허나 감동은 짧았다.
이 새끼. 웬일로 아비 노릇을 하나 했는데 황제 노릇의 연장선이었구나.
***
이제는 신앙교리성 성장이 아닌 아우스엔 대교구장으로 불리는 페드로 오트바야 추기경.
일국의 군주인 나로서는 교황보다도 보기 힘든 존재가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걸 보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교단도 변하고 있구나.’
제국이 상황 폐하의 양위로 인해 변화한 것처럼 교단도 변하고 있다. 공의회를 이끌며 다섯 번의 종소리를 울린 거목이 물러나고, 교단의 2인자가 중앙을 벗어나 지방으로 왔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꺼려 해야 할지.’
대교구장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전대 아우스엔 대교구장이었던 리시우코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발트사크 38세가 된 건 고무적인 일이다. 리시우코 추기경은 능력, 인품, 융통성, 제국과의 친밀성 등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인물이니까.
심지어 나이도 다른 추기경들에 비하면 젊은 편이니, 친제국 교황으로서 오래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제국에 득이면 득이지 해가 될 일은 아니다.
‘페드로 추기경은 좀 벅찬데.’
다만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는 법. 페드로 추기경을 그림자 취급하는 건 조금 미안한 일이나, 페드로 추기경의 아우스엔 대교구장 임명은 적지 않은 부담이 내포된 사건이다.
상황 폐하시라면 전대 교황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수싸움이 가능하실 거다. 이는 상황 폐하 정도의 능력이 아닌 이상, 전대 교황을 상대로 무언가 얻어낼 사람이 없다는 뜻. 그렇기에 전대 교황의 생전 은퇴에 아쉬워하면서도 은근 기뻐했으나,
‘페드로 추기경은 그 전대 교황과 동급.’
그리고 페드로 추기경이 아우스엔에 있다면 나와 거래를 해야 할 교국 측 인사는 페드로 추기경.
실로 골치 아픈 일이다. 그나마 페드로 추기경의 입지와 연공서열이 압도적이기에 제대로 거래만 튼다면 이래저래 많은 걸 얻을 수 있겠다만, 그 거래의 난이도가 확 오를 거란 말이지.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솔직히 리시우코 추기경은 내 수준에서도 그럭저럭 상대가 가능했었는데 말이야. 리시우코 추기경도 제국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고 교황과 직통으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아우스엔 대교구장을 무시하고 교황과 소통하는 것. 이는 노년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페드로 추기경이 제국 전체를 불태워도 할 말이 없는 무례다.
‘어쩔 수 없나.’
속으로 한숨을 쉬며 내 근처에 앉아있는 백작을 바라봤다.
내가 페드로 추기경에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백작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겠다.
아니면 부디 페드로 추기경의 은퇴가 빨리 찾아와달라고 기도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