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4)
로판 속 공무원 924화(925/945)
오늘도 해가 뜨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거늘. 최대한 수면 시간을 줄이고 줄였던 시절의 버릇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이제는 내 몸 자체가 해가 떠있을 때 기상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침대에 눕는 시간은 황제였던 시절보다 빨라지고 있으니, 이 몸에 휴식을 주는 시간 자체는 그럭저럭 늘어난 편이다.
‘늙으면 일찍 눈을 뜨는 게 정상이라고 했던가.’
아직 어두침침하지만 동시에 희미한 여명이 터오르는 바깥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둘 다 직책은 물론 작위마저 내던지고 나니 완전히 과거로 돌아간 듯, 어느 순간부터 형 행세를 하기 시작한 이웃집 노인. 나보다 늙은 그 노인의 말에 따르면 나이를 먹을수록 일찍 눈을 뜨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다. 확실히 과거와 달리 눈을 뜰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도, 어깨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 같지도 않으니까.
억지로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 그렇다면 몸이 비명을 지를 일도 없지.
‘조금 손해 보는 기분이로군.’
더 이상 짊어져야 할 것이 없으니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잠들어도 문제가 없다. 이 제국의 그 누구도 내 수면 시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헌데 다른 것도 아닌 내 육체가 늦잠을 거부하다니. 상상도 못 한 복병이다.
‘…평민으로 태어난다면 느긋하게 잠을 잘 여유도 없겠지.’
그러나 이 또한 셀레덴과 다시 만날 미래를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양위한 상황이 아닌 평범하게 늙은 평민이라면 늦잠을 잘 여유 따윈 없지 않겠나.
그러니 기꺼이 하루를 시작하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하루를 보내자.
– 꼬끼오오오오오오!
‘음.’
이윽고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져 걸음을 옮겼다.
주인이 일찍 하루를 시작해서 그런지, 저 녀석도 다른 닭들에 비하면 다소 빠르게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다. 닭치고는 실로 현명한 녀석이야.
저렇게 현명한 녀석인 줄 알았다면 너겟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붙여줬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 꼬끼오오오!
– 꼬고고고고곡!
뒤이어 프라이드와 오븐의 울음소리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슬슬 다른 짐승들도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이제는 농사일도, 가축을 돌보는 일도 그럭저럭 익숙해진 상태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미숙함과 버거움은 벗어던진 지 오래.
물론 수십 년 동안 이 일에 종사한 전문가들에 비하면 미천하기 그지없는 실력이나,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치고는 괜찮은 수준 아닐까 싶다. 심지어 나는 황제 즉위 이전에도 귀족으로 지낸 놈이지 않던가. 농사나 목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조급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영혼이 이 행동을 기억한다면 다시 태어날 때 유리할 터. 다시 만날 셀레덴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터.
“잘 먹는구나.”
– 음무어어어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여물통에 여물을 채워주자 그대로 얼굴을 박아 식사를 하던 누렁이 3호. 그런 누렁이 3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누렁이는 맑고 태평한 울음소리를 냈다.
이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는 걸 볼 때마다 흐뭇하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작고 작은 송아지였던 녀석이 내 보살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내 목축 실력을 증명하는 상징이나 마찬가지니, 어찌 기껍지 않으랴.
“너희도 많이 먹거라.”
당연히 누렁이 3호 외에도 여러 녀석들이 내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너겟을 머리 위에 올린 검둥이도, 마당을 뛰놀다가 뒤늦게 먹이를 발견하여 다가오는 하양이 1, 2호도.
“상황 폐하를 뵙습니다.”
“왔는가.”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는 녀석들을 보던 중. 때마침 출근을 한 로만 경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축들이 달라진 것처럼 로만 경도 상당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호위 책임자로서 매일 내 곁을 지키려고 했던 로만 경이었으나, 이제는 휘하 기사들에게도 호위를 맡기며 격일 출근이라는 걸 하게 됐다.
이 또한 기꺼운 일이다. 로만 경은 황실 기사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인재. 그런 인재가 이 늙은 놈을 지키다가 기력이 쇠한다면 그만한 손실도 없다. 아무리 기사가 초인적인 체력을 자랑한다지만, 체력은 챙길 수 있을 때 챙기는 것이 옳으니.
“오늘도 직접 주시는 겁니까? 소신에게 시키셔도─”
“타인의 힘을 빌린다면 의미가 없다. 결국 남을 부려서 이끌어 갈 터전이라면 어찌하여 이곳을 만들었겠는가.”
“마을 외곽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도 가족과 이웃의 힘을 빌리는 법입니다. 상황 폐하를 위해 기사가 힘을 쓰는 것을 누가 탓하겠나이까.”
오늘도 어김없이 로만 경은 허리를 숙였다.
늘 있는 일이라 마땅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어깨만 토닥여주었다. 내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이래로, 로만 경은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처럼 저 말을 하고 있다.
조금 귀찮고 지겹기는 하지만 로만 경의 심정을 알기에 꾸짖지는 않았다. 이 세상 어느 기사가 자신의 주군이 고생하는 걸 반기겠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 왈! 왈왈!
– 멍멍!
그리고 로만 경의 등장에 조용히 식사를 하던 1, 2, 4, 5호가 로만 경에게 달려들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들이니 누군가 올 때마다 저런 반응이다. 저 녀석들이 달려들면 꿋꿋한 로만 경조차 더 이상 허리를 숙이며 버틸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지원인가.
저 녀석들은 사람과 놀아서 좋고, 로만 경은 허리를 들어 올려서 좋고, 나 또한 충신의 고된 자세를 더 보지 않아서 좋다. 모두가 행복한 일이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다.
“참, 상황 폐하. 폐하께 긴히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보고?”
한참이나 네 마리의 대형견에게 휘말려 어쩔 줄 몰라 하던 로만 경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근래 있었던 로만 경의 보고는 타일글레헨 백작의 시성과 교황 교체,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열린 시성 기념 예배 정도였다. 그 정도의 사안이 아니라면 굳이 로만 경이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소한 일들은 형 행세를 하는 어느 노인이 하나하나 알려주니까. 로만 경은 딱 중요한 사안만 보고하면 충분하다.
“말하도록.”
해서 모이를 바닥에 뿌리던 걸 멈추고 로만 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시성 기념 예배 이후로는 눈여겨볼 만한 행사가 없었다. 제국 전체적으로도, 황가에서도 무언가 큰 사건이 없었지.
그런 상황에서 로만 경이 직접 보고를 올릴 사안이라. 은퇴한 늙은이어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
“타일글레헨 백작이 경건공의 묘로 찾아가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
“살아있는 성인이 직접 고인을 위해 올린 기도인지라, 사교계 내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대체적으로 현명공과의 우호를 위한 타일글레헨 백작의 성의라는 평이 많습니다.”
“그런가.”
아주 잠시 손끝이 떨렸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국 귀족 중에 살아있는 성인이 나온 여파, 이득만을 생각했을 뿐. 신의 총애를 받는 자가 직접 기도를 올릴 수 있다는 건 잠시 잊고 말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평범한 신도도 올릴 수 있는 기도를 성인이라고 올리지 못할 건 없다. 살아있는 성인의 기도라면 누구라도 받고 싶을 것이다. 당장 얼마 전에는 제국백 가문의 안주인들과 황후가 타일글레헨 백작성으로 모여 백작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다시금 찾아온 에넨의 기적에만 집중했지, 예배 그 자체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고인을 위한 기도.’
나도 모르게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고인의 안식을 위한 기도. 살아있는 성인이 신께 직접 올리는 기도.
과연 그것을 평범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성인의 기도라면 단순히 바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직접 청원을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마치 평범한 백성의 외침과 공작의 건의는 황제에게 닿는 속도가 다른 것처럼.
‘만일. 셀레덴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욕심이 났다. 교황과 성자를 제외하면 교단 내에서도 제일의 권위를 자랑하는 성인이 셀레덴의 안식을 빌어준다면 어떨까.어떠한 추기경도, 어떠한 대교구장이나 성장도 부여할 수 없는 권위가 셀레덴을 감싸 안는다면 어떨까.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황제 에이만카 16세의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셀레덴이 아닌 제국의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상황 폐하?”
“실로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로다. 경건공의 신실함은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에 널리 퍼져있으니, 성인의 행보로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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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경의 목소리에 적절한 대답을 했다.
욕심도 자괴감도 감히 내가 품을 감정은 아니다. 셀레덴을 위한 기도가 진행된다면 그것은 길버트의 주도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나 따위가 개입할 일은 절대 아니다.
***
로만 경의 능력과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단단하다. 상황 폐하께옵서 친히 황실 기사단장으로 임명하셨으며, 양위 이후로는 호위 책임자가 된 인재 아니던가.
그런 인재를 의심한다면 제국 관료의 90% 이상은 무능과 불충하다는 뜻. 그 정도로 로만 경은 상황 폐하의 기사로서 활약하였다.
“흐음.”
헌데 그 로만 경이 나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상황 폐하를 호위해야 하기에 대면 보고가 아닌 것이 참으로 로만 경답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대면이냐 서면이냐가 아니기에 넘어갔다.
[ 상황 폐하께옵서 성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백작의 소식을 듣고 동요하셨습니다. 경건공의 묘로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는 것에 잠시 침묵하셨으니, 미천한 소신의 얄팍한 의견으로는 상황 폐하께옵서 제국을 위해 헌신한 망자들을 떠올리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망자라.’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내용이었으니까.
‘상황 폐하께서 동요하실 망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미간을 짚었다.
딱 한 분. 떠오르는 분이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