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5)
로판 속 공무원 925화(926/945)
19살에 감찰부장이 되고 지금까지 어언 수년. 그동안 권력의 중심이자 감찰 권한을 지닌 개깡패 귀족으로 지낸 덕분인지, 여러 귀족들에게서 온갖 친구비를 받고는 했다.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제국 귀족, 공무원들이 친구비를 받는 건 일상적인 일이니까. 그 엄격하고 냉철한 상황도 공무원들의 적절한 비리는 묵인했을 정도다. 능력에 비해 과도할 만큼 처먹는 것들만 처리했지.
그렇기에 나한테도 잊을만하면 친구비가 입금되고는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친구비 중 특정 물품만 제외되기 시작했다.
크게 특별하거나 희귀한 물건은 아니다. 그냥 술.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알코올이 들어간 술이라면 절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너무 안 마시고 다니기는 했지.’
요즘은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음주를 최소한으로 했었다.
대토벌 전쟁과 2황자파 숙청을 거치며 취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 그 뒤에는 업무가 바쁘기도 했고, 또 그 뒤에는 개노답 과장 트리오의 주정을 감당해야 했으니까. 나까지 취하면 감찰부가 망한다는 집념으로 금주 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귀족들도 나한테는 술을 보내지 않았고, 온갖 옷감과 장신구, 무구, 서책 등이 내 창고를 치장했지만─
“주인님. 진열장을 더 준비해야겠습니다.”
“응. 그래야겠네.”
본의 아니게 금주의 공간이 되었던 창고가 술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명공 덕분에. 현명공이 애지중지한다는 알코올-컬렉션이 힘껏 개방된 덕분에.
‘어떻게 술만 모은 건물이 따로 있는 거지?’
아직도 경이롭다. 체네스 공작령에 갈 때마다 공작성 한구석에 작은 별채가 있어서 뭔가 싶었는데, 설마 건물 하나가 통째로 술 저장고였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영지 주요 산업이 주조인 곳도 성의 별채를 술 창고로 쓰지는 않겠다.
동시에 현명공이라면 저럴 수 있지, 라는 마음도 동시에 들더라. 이래서 사람의 평소 행실이 중요한 거야.
“꼬마어 죠까! 아부지도 엄쳥기뻐하실꺼야! 이거랑이거랑 이거랑 이거… 아니다! 그냥 다가져가!”
“예?”
“슐은 다시 모울쑤 잇찌마아안~ 살아잇는성이는 지그미 아니면못빠! 내가 못채운 빈쟈리는 언잰간릴리가 채어줄꺼야!”
그리고 경이로운 행실을 보이던 현명공이 자신의 술을 남에게 양보했을 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놀랐던가. 나와 현명공을 보필하던 시종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지.
차라리 한두 병 수준이라면 그럭저럭 납득했을 텐데, 건물 한 층에 있던 술을 전부 줬잖아.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진쨔 고마어!”
그래도 연신 감사를 표하는 현명공을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진심이 담긴 선물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며, 감사를 표하는 이유도 ‘작고한 부친을 위해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지 않나. 이걸 거절하는 건 경건공에 대한 무례기도 했다.
거절하는 건 부녀를 향한 모욕이요, 받는 건 창고를 포화 상태로 만드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누구라도 후자를 고를 것이다. 2황자 같은 인성 파탄자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그럴 거야.
‘3대가 마셔도 남을 것 같은데.’
다만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택한 대가로… 사용인들이 몇 시간째 쉬지도 못하고 움직이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의는 받되 물량은 좀 깎아달라고 할 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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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전문가인 현명공에게 보관을 맡기겠다며 건물에 두고 가거나. 대여료만 적당히 냈으면 충분히 들어줬을 거다.
‘나도 술 창고를 따로 만들어야 하나.’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지난 일. 술을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 적절히 보관할 방법을 모색─
‘뭐야.’
품속에 있던 통신구가 빛을 뿜기 시작했다.
익숙한 보랏빛. 황제가 보낸 연락이다.
‘또 뭐야 이 새끼.’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연락을 걸 사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뭐지. 뭐 짚이는 게 있어야 대비라도 할 텐데, 아주 사소한 것조차 짚이는 것이 없다. 얘 설마 다른 사람한테 연락하려다가 잘못 건 건가?
물론 내가 모르는 특별한 사유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런 경우에는 본능이 경고하는 경우가 잦다. 내 머리는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능이 짐작하는 경우가 있지.
그런데 이번에는 그 경고조차 없다. 황제 이 새끼가 ‘시성 기념 예배도 끝났으니 황태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나눠볼까?’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설마.’
불안감이 솟구쳤다. 설마 이 졸렬한 새끼가 시간차 공격을?
“황제 폐하 만세.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존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 조심스레 연락을 받았다.
정말로 시간차 공격이면 치가 떨리는 졸렬함이나, 애석하게도 마땅히 방어할 방법이 없다. 졸렬함마저 감수한 아비의 분노를 무슨 수로 막아내겠어.
– 아, 백작.
다만 황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약한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분노에 눈이 먼 것치고는 상당히 정상적이고 온화한 목소리였으니까.
– 혹시 바쁜가?
“폐하의 은혜로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거늘, 어찌 바쁜 일이 있겠습니까.”
– 그런가. 다행이로군.
내 말에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 허면 백작. 미안하지만 잠시 집무실로 와줄 수 있겠나? 긴히 백작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말일세.
평소에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모습이라 이쪽이 더 당황스러웠다.
미안이라는 단어와 부탁이라는 단어. 저놈이 나한테는 그 두 단어를 남발하는 편이기는 하나, 본래 군주라는 존재는 신하에게 미안, 부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황제의 명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마땅한 것이기에.
“금방 가겠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부탁에 더더욱 불안해졌다.
아무리 봐도 단순히 농담을 하기 위해서거나 시답지 않은 지시를 하기 위한 빌드업은 아니었으니.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냐.’
가련한 신하는 황제의 헛기침에도 무섭다.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움찔하고 말았다.
“백작 왔는가.”
“어서 오세요, 대부.”
황제뿐만 아니라 황후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당혹스럽다.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있는 건 흔한 일이나, 황후가 집무실까지 오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한 일이다. 황제의 공적 공간을 존중하기에 아주 중한 일이 아니면 얼굴조차 비치지 않지.
그래, 아주 중한 일이 아니라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착잡하기 그지없지만 일단 허리부터 숙였다.
그나마 위안을 삼자면 황제의 제어기인 황후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 황제가 갑자기 폭주하여 기행을 저지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백작. 우선 자리에 앉게. 손님이 서있으면 되겠나.”
“황송하옵나이다.”
황제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았지만,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황제는 침묵을 지키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평소에는 앉자마자 입을 열었던 놈인데. 대체 얼마나 큰 폭탄을 터뜨리려고.
“폐하.”
“아, 음.”
그리고 짧지만 영겁 같았던 침묵은 황후로 인해 깨졌다.
“백작. 최근에 체네스 공작령에 다녀왔다고?”
“예, 폐하. 경건공을 위해 기도를 올리느라 잠시 다녀왔습니다. 현명공은 제 외숙모이니, 경건공도 저에게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생전에 신실함으로는 제국 제일이었던 분. 마땅히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겠지요.
“과연. 백작의 배려심은 실로 아름다울 정도로군.”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허면 성 칼.”
하지만 이번에는 황후가 아닌 황제 스스로 침묵을 깼다.
“내가 부탁 하나를 해도 괜찮겠는가?”
“하명하십시오. 폐하의 신하로서 어떠한 명이든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짐이 아닌 나라는 1인칭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나는 제국의 황제로서 타일글레헨 백작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 칼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폐, 폐하.”
“내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릴 적에 세상을 뜨셨다네. 가혹한 황궁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고통이 없는 낙원으로 가셨지.”
아니, 그.
갑자기 그런 말을 해버리면 난 대체 어쩌라고.
“제국의 황비를 위한 장례식은 딱 최소한의 의전만 갖춘 채 진행되었어. 당시에는 아직 황후와 애실론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거든.”
그렇게 말한 황제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무릎 위에 올라간 손은 거칠게 요동쳤다.
내가 알기로 황비는 마흔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당시 황제의 나이는 고작 10살에 불과했고.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고, 그 어미의 마지막마저 제대로 보내지 못했으니 얼마나 한이 쌓였겠나.
게다가 황비의 죽음 이후로 황제는 처절하게 살아왔다. 지금의 황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군 하나 없이 비참하게.
“성 칼.”
“예.”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어머니를 위해 의식을 치르고 싶다네. 과거 초라했던 장례식을 잊을 만큼 화려한. 무엇보다도 숭고한 의식을.”
여기까지 듣고도 황제의 부탁을 모른다면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다. 이 뒤에 이어질 부탁을 황제 입으로 말하게 하는 건 감정이 없는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폐하. 소신이 작고하신 상황비 전하를 위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디 미천한 소신에게 그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황제는 다시 침묵하였다.
이번에는 불안감 대신 평온함을 가지며 기다렸다. 황후도 굳이 황제를 재촉하지 않았다.
“…고맙네, 칼.”
어차피 침묵은 길지 않았으니까.
황제는 나와 황후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집무실을 떠났다.
상황비에 관한 일이니 상황 폐하께도 말씀드려야 한다면서 직접 움직이더라. 통신구도, 시종들도 두고 직접 움직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이번 일로 동요한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대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멍하니 문을 보다가 황후의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딱히 겸양은 아니다. 그저 기도를 드리는 일이니, 그냥 통신구로 문자만 보냈어도 들어줬을 일이다. 이렇게 부탁이니 뭐니 할 정도로 분위기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후후, 대부에게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폐하께는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기도가… 말입니까?”
혼란스럽다. 혹시 황실 예법 중에 기도와 관련된 금기 사항이 있나? 장례식을 진행하고 몇 년 동안은 해당 고인을 위한 의식을 진행하면 안 된다, 같은 기이한 조항이라도 있나?
“폐하께서는 어린 나이에 시어머님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 뒤로는 살기 위해서 시어머님에 대한 언급을 철저히 자제해야 했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시어머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시어머님을 위한 부탁을 하시는 것도 익숙지 않아 하십니다.”
“아.”
결국 탄식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 사연을 들으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