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6)
로판 속 공무원 926화(927/945)
황제─ 아니, 아우스엔에 거주하는 청년 길버트 씨에게 기도 의뢰를 받았다.
10살이라는 나이에 어미를 잃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죽음의 위기를 이겨내야 했던 사람.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었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만 사람. 그런 사람의 부탁이니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의뢰를 접수하였다.
만일 황제가 황가의 일원인 상황비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면 나도 잠깐, 아주 잠깐 머리를 굴렸을 거다. 살아있는 성인이 현 황가를 위해 움직인다? 이게 어떤 광경으로 보일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바로 알 수 있으니.
그러나 황제는 상황비를 위한 기도가 아닌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물론 표면적인 명분은 황비에 걸맞지 않은 의전이니 뭐니 하며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속내가 어머니를 위한 마음이라는 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터.
‘그럼 들어줘야지.’
황제가 청년 길버트 씨로 나선다면 나도 청년 칼로 대응하면 된다.
세간의 시선? 황가와 성인의 과도한 밀착? 그런 건 상관없다. 고작 그런 걸 고려하느라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
애초에 내가 남의 눈치를 보느라 행동에 제약을 둘 짬이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권력을 누리겠어. 툭하면 황제에게 치이는 삶이니, 이런 이벤트가 생길 때마다 내 자존감을 드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멘탈이 못 버텨.
다만 상황비를 위한, 길버트의 모친인 셀레덴 님을 위한 기도를 결정한 것까지는 좋은데.
‘뭘 해야 하나.’
정작 기도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이다.
일단 내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게 기도를 올려도 황제는 기뻐할 거다. 그 어떠한 형식보다 살아있는 성인의 기도가 효과적이고 경이로우니까. 상황비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면 모두가 행복하겠지.
그래도 그렇게 끝내는 것이 옳은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경건공 때도 기도만 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어.’
경건공의 묘에서 기도를 드릴 때. 사실 나는 몸만 덜렁 가서 기도만 드린 게 맞다. 하지만 경건공은 생전에 신실함을 인정받아 경건이라는 이름을 받은 공작이었다. 심지어 현 체네스 공작인 현명공의 부친이고.
이는 경건공의 무덤 관리가 생각 이상으로 완벽하며 성스러웠다는 뜻이다. 저거 최소 복자의 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혹은 어제 만든 묘비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뛰어났어. 그런 상황에서 현명공이 기도를 위한 절차까지 직접 준비했었다.
무덤으로 갔더니 체네스 대교구장을 포함한 체네스 각지에 있는 고위 사제 전원이 모이고, 온갖 성물과 성수까지 동원된 것이 아주 경이롭더라. 솔직히 내가 아니라 현명공이 기도를 드렸어도 에넨이 귀를 기울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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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황제한테 말하기는 좀.’
하지만 이건 현명공의 자발적 준비였다. 내가 ‘성인이 기도를 드리는 거니 판은 화려하게 준비하십쇼.’ 같은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그런데 황제한테 현명공의 자발적 준비를 언급하는 건 ‘너도 어머니를 위해 이 정도는 해야지.’ 라고 압박하는 거랑 뭐가 달라. 지금의 황제라면 그 말을 듣자마자 제국 국고를 털어가며 교황까지 초청하려고 이를 갈 텐데.
그러니 황제의 손을 빌리기보다는 오직 내 노력으로 기도를 준비해야 한다. 딱히 신실하지도, 교리에 대해 해박하지도 않은 나 혼자서.
‘차라리 이때 십자가나 빛내주지.’
문득 에넨이 원망스러웠다. 평범한 예배 자리에서 십자가를 빛내는 것보다는 상황비를 위한 자리에서 빛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더 대의를 위한 길인데.
그렇다고 에넨의 세 번째 십자가 발광을 기대하며 아무 준비 없이 기도를 드리는 건 미친 짓이다. 적어도 보험은 마련한 다음에 기적을 바라야지, 보험도 없이 들이받고 보는 건 광인의 행동인 법.
‘영원한 푸른 하늘이나 콘스탄티나한테 부탁할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지금이야 공의회 덕분에 영원한 푸른 하늘과 콘스탄티나도 숭배받는 신으로 인정됐으나, 상황비 생전에는 두 신은 그냥 이교에 불과했다. 그나마 여명 교단의 존중을 받는 콘스탄티나조차 공식적으로는 이교였다.
생전에는 오직 에넨밖에 모르던 상황비인데, 그런 상황비를 위한 기도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과 콘스탄티나의 기적이 나타난다라. 누가 봐도 고인을 위한 기도보다는 능욕 같잖아.
‘골치 아프네 이거.’
과연 어떤 방법이 좋을까. 평범하게 기도만 올려도 황제는 만족할 테니 최악을 대비할 필요는 없으나, 그래도 이왕 하는 기도라면 나름 화려하게 진행하고 싶은데.
아우스엔 대교구장을 불러서 합동 기도를 할까? 아니야. 안 그래도 은퇴에 실패해서 속에 한이 가득한 사람이잖아. 괜히 한을 품은 사람한테 사적인 부탁을 해서 빚을 지는 건 곤란하다.
그럼 장생이를 동원해? 그것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장생이가 이름 그대로 장생의 힘을 얻었다는 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 게다가 고인에게 장생의 축복을 기원하는 건 티배깅이나 다름없다.
– 은인 인간. 은인 인간.
‘음?’
그렇게 홀로 고민하던 중. 손바닥만 한 노란색 송아지가 쪼르륵 날아왔다.
카틀레아를 세계수 삼아 활동하는 땅의 중급 정령이었다.
– 여자 인간. 은인 인간 찾아. 식당으로 오래.
“벌써 그렇게 됐나.”
밥 먹으러 오라는 소환령인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말했으니. 먼저 갈게.
“그래, 고맙다.”
다시 쪼르륵 날아가는 땅의 정령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인간과 낯을 가리는 정령들도 있지만, 일부 정령들은 인간들에게 익숙해졌는지 전령 노릇까지 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줄 녀석들이 늘어나 기쁠 따름이지.
…
‘정령?’
그러고 보니 상황비의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그리고 국립묘지는 정령들이 활동하는 놀이터 중 하나가 된 상황.
정령, 상황비, 기도.
‘좋아.’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
손은 의무적으로 모이를 뿌렸으나, 눈은 허공만을 바라봤다.
길버트가 다녀간 이후로 며칠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을 가다듬지 못했다.
‘기도라.’
로만 경의 보고를 듣고 셀레덴을 위한 기도를 바라기는 했다. 고생만 하다가 떠난 셀레덴을 위하여 변변찮은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그 격에 맞는─ 아니, 누구보다 경건하며 웅장한 배웅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자가 이제 와서 셀레덴을 위해 행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동시에 양위를 한 상황이 제국의 기둥에게 부탁을 하는 건 지휘 체계에 혼동을 주는 일이다.
하여 모든 것은 길버트의 결정에 맡기기로 하고 침묵하였으나,
“성 칼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기도를… 말입니까?”
“예, 상황 폐하. 마침 최근에 경건공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고 하더군요. 전례가 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그렇, 군요.”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가 찾아왔었다.
셀레덴을 위한 기도가 결정되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성인에게 직접 부탁을 하였다는 말과 함께.
‘역시 나보다 좋은 황제가 될 수 있겠구나.’
죽은 어머니를 위해 살아있는 신하에게 부탁을 하는 황제. 모든 걸 버리고 나아간 나와 달리 모든 걸 품에 안고 나아갈 황제.
황제의 권위와 체면보다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황제.이것이 길버트, 네가 추구하는 황제겠지. 그런 황제가 이끌어 가는 제국은 무엇보다 아름답겠지.
– 꼬고곡!
‘아.’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중, 실수로 모이를 쪼고 있던 프라이드에게 모이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덕분에 프라이드는 모이 한 움큼을 온몸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작은 닭의 육체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폭력.
– 꼬곡, 꼭! 꼬고곡!
“미안하다.”
난데없는 봉변에 프라이드는 모이를 먹던 것을 멈추고 날개를 퍼덕였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는 것처럼.
이건 내 실수가 맞기에 바로 사과를 했다. 모이로 폭행 당한 것은 단순히 고통뿐만 아니라 모멸감도 느낄 일이기에. 사람으로 치면 몸통 크기의 스테이크나 빵으로 얻어맞은 기분 아니겠나.
– 꼬고곡.
다행히 프라이드는 내 사과에 날개를 접으며 다시 모이를 쪼아 먹었다.
그 와중에 자기 몸에 맞고 떨어진 모이를 먹는 것을 보니, 대범한 건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
‘성인의 기도.’
아무튼 작은 소란이 끝나자마자 다시 셀레덴을 위한 기도로 의식이 흘러갔다.
셀레덴. 당신이 죽었을 때는 내가 제대로 된 남편도, 강력한 황제도 아니었기에 제국의 황비인 당신을 쓸쓸하게 떠나보내야 했지. 비록 최소한의 의전은 맞추었으나, 말 그대로 최소한에 불과했었소. 어찌 살아있는 황제의 부인이, 죄를 짓고 죽은 것도 아닌 황비가 그런 체면치레 수준의 의전만 받아야 했단 말인가.
하지만 무능하고 부족한 남편이자 황제였던 나와 달리, 길버트는 유능하고 훌륭한 아들이자 황제요. 그렇기에 당신을 위하여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것일 터.
‘고맙소, 셀레덴.’
나에게 이런 과분한 아들을 주고 가서.
“고맙다.”
뒤이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이 무능한 아비 밑에서 훌륭히 자라주어 고맙다. 길버트.
***
기도를 드리기 전에 사전답사 느낌으로 국립묘지에 방문했다.
“이곳이 상황비 전하의 묘입니다.”
생각보다 다소 외진 곳에 위치한 상황비의 묘. 황실 구역에 발을 들이자마자 스르륵 나타난 관리인이 아니었다면, 찾느라 제법 긴 시간이 걸렸을 거다.
다행이다. 미리 사전답사를 오기를 잘 했어. 하마터면 이상한 곳에서 헤맬 뻔했잖아.
“흐음.”
그리고 상황비의 묘를 보자마자 절로 탄식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 아, 은인 인간! 은인 인간!
– 은인 인간! 안녕!
– 반가워! 반가워!
상황비의 묘를 중심으로 상당한 숫자의 정령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반딧불이 수준에 불과한 하급 정령만 있는 것이 아닌, 의사소통이 가능한 중급 이상의 정령도 제법 보였다.
‘이 정도였나.’
국립묘지가 정령들의 놀이터가 됐다는 걸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 은인 인간? 왜 그래?
내가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자 정령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서 너희 왕 좀 불러줄래? 아무나 상관없어.”
그런 정령을 향해 조심스레 부탁했다.
가서 부모님 좀 모셔와.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