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7)
로판 속 공무원 927화(928/945)
내 부탁을 받은 정령은 스르륵 사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거북이와 함께 등장했다.
익숙한 색깔과 익숙한 형태. 물의 정령왕이다.
– 오랜만이다. 그간 잘 지냈나?
“예. 여러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는 물의 정령왕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물의 정령왕 입장에서는 세계수에서 편히 쉬다가 난데없이 끌려 나온 거다. 아무리 내가 콘스탄티나의 은인이자 정령들을 다시 세상에 부른 장본인이라도, 왕을 오라 가라 하는 건 불쾌할 수도 있는 일.
그래도 태평하게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딱히 언짢지는 않은 모양이다.
–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참, 최근에 성인이 되었다지?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순간 어깨를 떨고 말았다.
뭐지. 시성 생전이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 소식이기는 하지만, 정령왕까지 알고 있어?
– 어쩌다라는 말로 넘어갈 정도는 아니던데.
“예?”
– 라파엘라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종교 전쟁 시절에도 그런 경우는 드물었는데 말이야. 대단해.
허나 정령왕에게 소문이 닿은 이유를 알게 되니 절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트릭시의 외조모님께서 이 외손녀사위의 경사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시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정령들에게 잔뜩 자랑하신 모양이다.그런 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아니, 납득을 넘어서 기쁘기 짝이 없다. 부족한 외손녀사위가 외조모님의 자랑거리가 된 것이니까.
– 그건 그렇고.
잠깐 대화하는 사이에 온갖 정령들을 등껍질 위에 태우게 된 물의 정령왕은 슬며시 말을 흘리더니,내 뒤에 조용히 서있던 국립묘지 관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이쪽은 이 국립묘지의 관리인입니다.”
내 지인으로 오해하는 것 같아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예전에 봤는데 기억에 없는 사람,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사람, 소개하기 위해 데려온 사람이 아닌 그냥 제3자인 외부인이라고.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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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물의 정령왕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관리인도 물의 정령왕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더욱 뒤로 물러났다.
중요한 대화가 있다면 둘이서 하라는 배려. 역시 국립묘지를 담당하는 사람답게 훌륭한 눈치다.
– 자주 보는 편인가?
“그건 아닙니다. 국립묘지에 올 때마다 가끔 보는 정도?”
– 흠, 하긴. 묘지 관리인을 자주 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물의 정령왕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등껍질에 탑승한 정령들은 진동에 환호하며 꺄르르 웃음을 흘렸다. 마치 움직이는 요새를 보는 기분이야.
–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건가? 나야 우리의 은인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는 하다만, 세계수가 아닌 이곳에서 나를 찾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게, 사실 정령왕들께 긴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 부탁이라.
내 말에 물의 정령왕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 기꺼운 말이로군. 은인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줘야지. 그동안 말로만 은인이라 부르고 해준 건 없어서 민망했어.
“해준 게 없다니요.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 그건 우리가 좋아서 한 것이니 예외다. 내가 생각해도 순수한 호의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니까.
생각 이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왕들이 나에게 우호적인 것은 맞으나, 그래도 개인적인 부탁을 하면 약간의 설득과 거래가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헌데 물의 정령왕은 내용을 듣기도 전에 내 부탁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감동적이다. 사람이 덕을 쌓으니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라. 만약 세계수의 가지가 필요하다는 거면, 내가 콘스탄티나와 어떻게든 타협을 해서─
“그런 건 아니니 염려 마십쇼.”
홀로 진도를 나가는 미친 거북이를 황급히 만류했다.
가만히 두면 애꿎은 세계수만 수난을 당할 기세다. 난 평범하게 인력─ 아니, 정령력을 빌리고 싶은 거라고.
“이 묘비의 주인이 현 황제 폐하의 친모 되시는 분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 음? 이 묘비가? 황제의 친모를 위한 묘비치고는 너무 투박한데.
그 말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인간의 장례에 무지할 정령의 입에서도 ‘이거 황제 친모 무덤 맞음?’ 같은 말이 나오다니.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허나 그 사정이 남아있는 자들의 설움과 슬픔을 달랠 수는 없는 법이지요.”
– 맞는 말이다. 어떤 명분도 가족을 떠나보낸 자의 고통을 억누를 수 없는 법.
“하여 지금이라도 그 설움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성인으로서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 호오.
“위대하신 정령왕들과 함께요.”
– 호오…?
기습 드리프트에 물의 정령왕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당황스럽겠지. 이해한다. 나도 황제에게서 상황비에 대해 들었을 때는 당황했으니까.
하지만 너도 10살의 나이에 어미를 잃은 길버트 씨 이야기를 듣는다면 납득할 거다.
나도 그랬으니까.
***
어머니를 위한 백작의 기도. 작고하신 상황비를 위한 성인의 기도.
이를 홍보하고 귀족들을 끌어모은다면 황가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상황비를 향한 성인의 축복이 이루어진다면 상황비의 아들인 나의 권위, 황비 소생이라 부족했던 내 정통성도 덩달아 올라간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의 장례를 조촐하게 치르며 큰 죄를 지은 상황이다. 그런 주제에 어머니의 마지막을 다시 장식하려는 이 순간을, 고통을 행복으로 덮으려는 이 순간을 정치적으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황제 에이만카 17세가 아닌 길버트로 선 것이기에. 어머니에게 냉철한 황제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에.
비록 어머니가 떠나시고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어머니 앞에서는 어리고 어린 아들로 있고 싶기에.
“아! 하라부지!”
그렇게 멍하니 어머니의 묘비를 바라보고 있자, 정령들과 놀던 황태녀가 해맑게 외쳤다.
“상황 폐하.”
“폐하. 먼저 와 계셨군요.”
“예. 마침 일이 빨리 끝나서 말입니다.”
사실 하던 일도 중간에 멈추고 급히 온 것이지만 굳이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황제의 업무, 일과는 훤히 꿰고 계신 분이다. 정말로 일이 빨리 끝나서인지, 급히 온 것인지는 짐작하셨을 터.
“하라부지! 나도 때부 집애 있다가 왓서! 할머니 보러!”
“음, 기특하구나.”
상황께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황태녀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양위를 하신 이후로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상황 폐하셨지만, 어머니의 앞이라 그런지 더욱 온화한 모습을 보이셨다.
아주 잠깐, 진즉에 저런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셨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털어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상황께서도 어머니에게 감정을 보이셨겠지. 설령 아니라면 누구보다 후회하고 계시겠지. 그렇다면 내가 감히 개입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이후로 상황께서 어떤 심정으로 나아가셨는지 알아가고 있다. 이 제국과 황실, 백성들을 위해 무슨 결단을 내리셨는지도.
“전승공도 왔는가.”
“예, 상황 폐하. 황제 폐하께옵서 가족들을 위한 자리라고 하시기에, 황송하옵게도 초대를 받았사옵니다.”
이윽고 상황께서는 황후, 장인어른과도 인사를 나누셨다.
장인어른은 어머니의 사돈. 비록 생전에 보지 못한 사돈이나, 그건 황후도 마찬가지지 않나. 그렇기에 조심스레 장인어른도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하블렘 공작령에 있는 에발트 형님도 부르고 싶었다. 차마 공작령 업무와 뉘렌 공작가의 업무를 맡는 사람을 제도까지 부를 수는 없어서 포기했지만.
“때부도 왓따!”
황태녀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백작은 이번 모임의 주인공 중 하나다. 백작이 없다면 어머니를 위한 기도조차 드릴 수 없을 테니,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라고─
‘뭐지.’
백작을 보자마자 움찔하고 말았다.
백작은 늘 검은색 옷을 입고 다녔다. 심지어 시성식 때도 검은색 옷을 입었다던 백작이다. 그런 백작이 지금은 순백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마치 고결하고 숭고한 사제처럼.
‘핫.’
스스로도 몸에 걸친 옷이 낯설기 그지없는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을 보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동시에 고마웠다. 백작 나름대로 이번 기도에 진심이니까 저런 옷을 입었지 않았겠나. 성인이 되는 자리에서도 검은색 옷을 입었던 주제에.
“성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 제국의 존귀하신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상황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성큼성큼 걸어온 백작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크라시우스 가문 가주나 타일글레헨 백작이 아닌 성 칼이라 소개하면서.
백작이 묘비 앞에 서자 침묵만이 맴돌았다. 활기찬 황태녀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두 눈을 반짝이되 입은 꾹 닫았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시작된 기도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백작은 진중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고, 어머니의 생전 업적과 성품을 언급하며 이 고인이 얼마나 선량하고 훌륭한 자인지를 에넨에게 고하였다.
뻔한 절차였지만 절차를 행하는 사람은 뻔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성인이 에넨에게 직접 어머니의 선함을 알려주고 있다.
‘어머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뻔했다. 흉악한 구 애실론 가문 때문에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어머니에게, 이제야 비로소 마땅한 대접을 하게 되었다.
비록 가족만 모인 배웅이지만 괜찮다. 성인 한 명이 주도하는 기도지만 괜찮다.
고작 후작가 때문에 최소한의 의전만 차린 장례식 따위보다는 이 기도가 훨씬 훌륭하니까.
‘음?’
기도를 하는 백작의 주변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허공에서 네 마리의 짐승이 튀어나왔다. 붉은 매와 푸른 거북이, 초록색 호랑이와 노란색 뱀이.
‘정령왕?’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당황했으나, 백작은 그러거나 말거나 기도를 이어갔다.
“에넨이시여! 자비롭고도 위대하신 천상의 주여! 당신의 성인이, 이 세상의 왕들이 당신께 청합니다! 부디 당신의 앞에 선 가련한 영혼을! 당신의 종 셀레덴을 가여이 여겨 보듬어주소서!”
– 타오르는 불꽃의 왕이 에넨에게 청하니, 부디 가련한 영혼을 따뜻하게 보듬기를.
– 흐르는 물의 왕이 에넨에게 청하니, 길 잃은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 흩날리는 바람의 왕이 에넨에게 청하니, 겁에 질렸을 영혼을 부드럽게 매만지기를.
– 감싸안는 대지의 왕이 에넨에게 청하니, 새로운 곳에 도착한 영혼을 굳건히 다잡아주기를.
정확히는 정령왕들과 함께 기도를 이어갔다.
가련한 영혼, 길 잃은 영혼, 겁에 질렸을 영혼, 새로운 곳에 도착한 영혼.
“흐으.”
이상하다.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일 텐데도 저 말이 너무도 크게 와닿았다. 내 가슴을 찢어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가련한 영혼은 따뜻하게 보듬어지고, 길 잃은 영혼은 낙원으로 갈 것이고, 겁에 질린 영혼은 부드럽게 다독여지며, 새롭게 도착한 곳에 훌륭히 정착할 터이니.
그래, 분명 그럴 터이니.
“크흐… 흐으…”
잠시 눈을 가렸다.
가족들만 있는 자리라는 게 너무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