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8)
로판 속 공무원 928화(929/945)
조용히 셀레덴의 묘비를 바라봤다.
흰 예복을 입고 있는 성인을. 불꽃을 흩뿌리는 매를. 초목을 딛고 있는 거북이를. 허공에서 굽어살피는 호랑이를. 묘비를 감싸 안는 뱀을 바라봤다.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작 다섯이서 만들고 있는 광경이나, 어떠한 장례보다도 웅장하고 성대하지 않은가.
‘황실이 준비했어도 저 장례식의 절반조차 흉내 내지 못했겠지.’
셀레덴을 떠나보내야 했던 시절의 내가 아닌, 북방을 정벌하고 황태손을 책봉했던 시절의 나였어도 지금 펼쳐지고 있는 장례식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을 거다.
물론 단순히 규모만 따지면 어떠한 장례식보다 크게 진행할 수 있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찬송가와 기도도 어떠한 의식 때보다 우렁차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저 크기만 한 장례는 의미가 없다. 진정으로 셀레덴의 마지막을 위해서라면, 셀레덴과의 마지막 추억을 위해서라면 크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것이 중요하다.
마치 지금처럼. 역대 황족의 장례식 중 가장 규모는 작겠으나, 가장 화려한 이 장례식처럼.
‘정령왕.’
묘비 근처를 빙글빙글 도는 네 짐승들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콘스탄티나가 이 대륙에 세계수를 심은 순간부터 정령이라는 존재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처럼 여겨졌다. 대륙에 존재하되 쉽게 볼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
심지어 아펠스가 세계수를 불태움으로써 정령들도 자취를 감추었으니, 안 그래도 미지의 존재였던 정령이 더더욱 베일에 싸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운이 좋으면 볼 수 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죽어서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셀레덴은 어릴 때부터 정령이라는 존재에 호기심을 가졌다. 동화에 나오는 정령을 보면서 자신도 정령사가 되고 싶다며 외쳤었지.
“불의 정령이 있으면 벽난로에 불을 붙이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잖아. 사용인들도 좋아할 거야!”
“그건 마법을 써도 마찬가지 아니야?”
“마법사들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지! 저수지를 만들거나, 짐승을 잡거나, 산사태를 막거나!”
이제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나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대화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자신이 정령사가 된다면 사용인들의 일을 나눠서 하겠다고, 마법사들은 영지민들을 위해 투입하겠다고 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기에 할 수 있는 순수한 말이었다.
놀라운 건 그 순수함과 따뜻함을 성인 때까지 간직했다는 거지만.
‘그런 정령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구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정령이라는 존재를 동화로만 접했던 셀레덴이다. 한때 정령사의 꿈을 꾸었던 것과 별개로, 내 곁을 떠난 그 순간까지 정령을 환상 속의 존재로 여기던 셀레덴이었다.
그런 셀레덴을 위해 정령들의 정점이 자리를 빛내고 있다. 불과 물, 바람과 땅을 다루는 왕들이 셀레덴,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늦었지만 이룬 건… 우리뿐만이 아닌가.’
순간 당신이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당신을 위해 나타난 왕들이 당신의 정령이 된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다면 저 매는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벽난로에 불을 붙여주겠지. 거북이는 노동으로 지친 사용인들과 영지민들에게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제공할 거야.
호랑이는 황태녀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당신도 허공에 띄워줄 거고. 뱀은 산사태를 막거나, 이미 쏟아진 흙들을 원래 상태로 돌릴 수도 있겠어.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제국의 상황비는 상황의 사랑뿐만 아니라 자연의 사랑을 받는 여인으로도 이름이 높아질 테니.
‘으음?’
그런 생각을 하며 기도를 지켜보던 중. 이변이 일어났다.
셀레덴의 묘비를 중심으로 네 방향에서 작은 기둥이 솟구쳤다. 이윽고 남쪽 기둥에는 타오르는 꽃이 피었고, 북쪽 기둥은 폭포처럼 물을 쏟아냈으며, 동쪽 기둥은 눈에 보이는 바람에 감싸였다. 서쪽 기둥은 기둥 자체가 작은 언덕이 된 것처럼 온갖 꽃과 풀들로 뒤덮였으니, 네 왕들의 상징이 셀레덴의 묘비를 지키는 것처럼 솟구친 것이다.
‘허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나, 이미 정령이라는 존재부터가 상식과는 거리가 먼 존재. 이제 와서 상식에 얽매이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지.
그러니 지금은 놀라기보다는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할 때다. 살아있는 성인이 셀레덴을 위해 기도를 한 것도 모자라, 정령왕들에게 저런 행동도 부탁─
“이거 뭡니까? 저희 이런 얘기는 없었지 않습니까. 장례식 중에 합의하지 않은 일을 강행하는 건 곤란합니다.”
‘아니었군.’
다급한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부탁한 행위가 아니라 돌발 행동이었나.
– 우, 우리도 왜 이런 게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걸 만들 생각은 없었어!
– 우리의 기도가 저 묘비와 엮여 저절로 반응을 했다. 은인의 딸 수준은 아니다만, 묘비의 주인도 상당한 친화력을 가진 모양이야.
– 신기하군요. 저희가 조금만 더 빠르게 세상에 나왔다면, 어쩌면 계약자와 계약 정령으로서 만났을지 모르겠습니다.
– 다들 그것만 생각하는 거야? 물은 그렇다 쳐도, 불은 안 꺼도 돼…?
허나 정령왕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유쾌한 돌발 행동이었다.
그런가. 셀레덴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뛰어났었나. 정령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자에게는 가혹한 재능이나, 그 재능 덕에 오늘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나 홀로 했던 생각이 아주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 정령왕을 부리는 셀레덴이 망상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기쁘기 그지없다.
‘다음 생에는 내가 밭을 갈고, 당신이 물을 뿌리면 될지도 모르겠소.’
정령으로 한다는 일이 작물에 물 주기라는 게 우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농사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농사를 지어야 식량이 생산되고, 식량이 있어야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니.
“다행히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 음. 그런가?”
“예, 폐하. 또한 물도 기둥과 일정 거리 떨어지면 자동으로 사라지는 모양이니, 무덤이 더러워지는 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신기한, 일이로군.”
그러다 문득. 다소 멍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길버트가 눈에 들어왔다.
놀란 듯 입가를 가리고 있는 황후도, 묘비로 달려가고 싶은 걸 꾹 참는 황태녀도, 말없이 두 손을 모아 셀레덴을 향해 기도 중인 전승공도 보였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감히 꿈에도 그리지 못했을 광경이기에 더더욱.
기도가 끝나자마자 먼저 황궁으로 복귀했다.
기도에 대한 치하와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닌 길버트의 몫이다. 셀레덴이 내 부인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길버트의 어미이며, 뒤로 물러난 상황보다는 현 황제가 나서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
나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다. 괜히 내가 존재감을 드러내면 귀족들의 충성이 둘로 나뉘기만 할 터.
물론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셀레덴과 헤어지는 건 아쉬운 일이나, 내일이나 모레에 다시 찾아가면 된다. 나에게 남은 날은 오늘뿐만이 아니니.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는데.
“셀레덴?”
야박할 정도로 꿈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던 셀레덴이 나왔다.
그것도 병에 걸리기 전, 누구보다 밝고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의지했던 모습으로.
‘장례식 덕분인가.’
이 상황이 꿈이라는 걸, 내 눈앞에 셀레덴이 나타났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설마 장례식을 치른 날에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내 죄책감이 오늘에 이르러서야 사라진 모양이다. 그러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셀레덴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이것이 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누구의 눈도, 귀도 없는 장소라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
“미안하오.”
셀레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무능하고 나약해서. 겁이 많고 한심해서 당신을 지키지 못했소. 당신의 마지막조차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소.”
길버트에게 양위한 직후, 셀레덴의 묘 앞에서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나를 제국을 재건한 영웅이라고 한다. 위기에 빠진 리브노만과 크펠로펜을 부흥시킨 위대한 황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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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대가로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했다. 리브노만을 지키기 위해 코르부스를 포기하고, 아내와 자식을 외면했다. 그런 놈을 어찌 위대한 황제라고 하겠는가. 진정 위대한 것은 대업을 이루시면서도 가족과도 우애로웠던 대제 같은 분에게 쓰는 표현이다.
“심지어 당신을 위해 다시 치른 장례식도, 내 능력으로 진행한 장례식이 아니오. 길버트가 아니었다면, 때마침 등장한 제국의 기둥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하였을 일이야.”
혹은 살아서 시성 된 타일글레헨 백작에게. 그도 아니라면 어머니를 위해 고개 숙인 길버트에게 붙을 표현이겠지. 고작 나 따위에게 붙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가볍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못난 내 앞에 나타나줘서 고맙소. 이렇게나마 당신을 다시 보게 되니, 정말 신께서 보우하시는 기분이구려.”
슬며시 고개를 들자 셀레덴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부 하라는 것처럼. 어차피 꿈이니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내라는 것처럼.
“사실.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용서받고 싶어서 농사를 하기 시작했소. 가축도 제법 기르기 시작했지. 비록 전문가라고 할 수준은 아니나 역대 황제 중에 나만한 황제는 없을 거요.”
그 미소에 용기를 얻어 다시 말을 이었다.
훗날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황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으로 태어나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든든한 남편이자 가장이 되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농사를 배우고, 목축에 손을 댔다. 제도가 해안가에 있었다면 배를 타고 바다에도 나갔을 거다.
“천상의 주가 우리에게 다음 생을 허락한다면, 당신 하나는 내가 능히 먹여 살릴 자신이 있을 정도로. 자식들은… 장성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자 셀레덴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덕분에 더욱 용기가 솟았다. 지금이라면 정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셀레덴.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내 5년. 아니, 3년 안에 더 기술을 갈고닦아 당신 곁으로 가리─”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셀레덴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셀레덴?”
“헛소리 말고 천천히 오세요.”
“그게 무─”
셀레덴의 손이 내 뺨을 쳤다.
난데없는 충격에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이게 무슨.’
설마 이런 식으로 꿈이 끝날 줄은 몰라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