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29)
로판 속 공무원 929화(930/945)
선공 우호 NPC가 비선공 우호 NPC로 변하는 것을 체감했다.
선공과 우호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인가 싶지만, 우리의 황제는 그 기괴한 공존을 해내는 기적의 존재 아니던가. 나에게 우호적이지만 언제든 선빵을 날릴 각오가 되어있는 미치광이였다.
하지만 살아있는 성인이 자신의 친모를 위해 기도를 올리자, 정령의 정점들을 초빙하여 함께 기도를 올리자 선공 성향에서 비선공 성향으로 전환됐다.
확실하다. 이건 내 서랍 속 사직서를 걸고 장담할 수 있다. 기도를 마친 직후에 보았던 황제의 눈빛과 표정은 내가 아는 황제의 표정 중 가장 온화했으니까.
‘이건 최소 10년이다.’
최소 10년을 갈 황제의 비선공 우호적 태도. 심지어 그 10년조차 황태녀라는 강력한 조커를 포함했을 때의 결과다. 황태녀와 페디 사이에 빅-이벤트만 터지지 않으면 그 이상도, 어쩌면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도 이어질 훈훈한 분위기야.
사실 놀라운 결과는 아니다. 황제가 개새끼에 흉악한 블랙-상사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인간 언저리에 위치한 존재지. 자신의 친모를 위해 성의를 보인 사람을 학대할 정도의 또라이는 아니다.
“황실이 백작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이 일은 짐의 가슴에 새겨 평생토록 간직할 터이니, 백작도 황실에 베푼 은혜를 잊지 말게나. 백작은 언제나 황실 앞에 당당할 자격이 있어.”
그리고 저택으로 복귀하기 직전,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성 칼이나 칼이 아닌 백작으로 복귀한 호칭. 황실이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며, 황실 앞에 당당하라는 첨언.
이건 결코 가벼운 발언이 아니다. 단순한 치하를 넘어 황실과 황제의 은인으로 지정한 것이다. 일개 신하가 황실의 은인이 되었다면…
되었, 다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전혀 예상치 못한 첨언이라 아직도 머리가 복잡해.황실이 이 은혜를 잊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막대한 포상? 그건 지금처럼 은인으로 지정되지 않았어도 간간이 받았다. 저택 창고에 가득 쌓인 보물이 그 증거다.
휴가 존중? 이미 비공식적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애초에 휴가 중인 공무원의 휴가를 존중하는 건 은인이 아니라 원수여도 해야 할 일이잖아.
그도 아니라면 황제 앞에서도 무기를 패용할 수 있거나, 당당하게 걸을 수 있거나, 말을 탈 수 있는 권리 같은 거? 그건 딱히 매력적인 선물이 아닌데.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홀로 고민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알기 싫어도 자연스레 알게 될 터.
게다가 이번 일만큼은 황제가 무슨 엿을 먹일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새끼한테 인간의 양심이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포상이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엿을 선사할 수 없다.
만일 그런 참사가 벌어지면 내가 항의할 것도 없이 황후 선에서 차단당할 테고 말이야. 황제를 믿지 못하겠다면 황후의 성품을 믿자.
‘든든하네.’
마음이 급속도로 편안해졌다. 황제가 아니라 황후가 보험이라고 생각하니 이리도 편안할 수가.
“아빠 왔어.”
“우아! 아빠!”
“아빠 왓따!”
물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을 보는 것보다 즐겁고 편안한 일은 없지만.
“압빠! 하얘! 멋쪄!”
“그래?”
“웅! 까만 아빠도 죠치만! 하얀 아빠도 조아!”
까만 아빠, 하얀 아빠라는 말에 어색히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겠지만 듣는 아빠의 기분이 오묘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마치 내 몸이 둘로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이야.
– 은인 인간! 은인 인간!
– 하얀 은인 인간! 왕의 기운 느껴져!
– 왕 보고 왔어? 왕 보고 온 거야?
이윽고 저택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정령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도를 드리는 동안 정령왕들의 기운이 짙게 깃든 모양이다. 그러니 부르지도 않은 정령들이 저렇게 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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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답답한데 떨어지면 안 될까?”
– 싫어! 조금만 더 있을래!
– 왕의 기운! 포근해서 좋아!
눈 깜짝할 사이에 정령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너무 격한 스킨십이라 몸을 움직이기도 버겁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두르는 꼬마전구도 이렇게 빽빽하기 두르지는 않을 텐데.
‘우리 딸. 매일 이런 경험을 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깜빡이며 아빠를 올려다보고 있는 카틀레아에게 시선이 갔다.
이미 나처럼 정령들을 온몸에 달고 있는 카틀레아. 정령왕들의 축복을 받은 이후로는 매일 저렇게 다니는 카틀레아.
미안하다, 우리 딸. 이 못난 아빠는 정령들을 달고 다니는 딸이 귀엽게만 보였는데. 늘 이런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어.
“카틀레아. 아빠한테 올래?”
“우웅.”
기특하고도 미안한 마음에 카틀레아를 향해 양 팔을 벌리자, 카틀레아는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숨 막히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정령 숙주의 합체로 인해 부녀를 둘러싼 정령들도 무럭무럭 늘어났다.
이쯤 되면 경이로울 지경이다. 너네 원래 이렇게 많았었냐. 어째 정원이랑 후원에 심은 꽃보다 너희가 더 많은 것 같아.
심지어 이 숫자도 아직 인간과 낯을 가리는 정령들은 제외한 수치. 최소 이 숫자보다 두 배가 되는 정령들이 우리 저택 곳곳에 있다는 뜻이다. 사람 사는 곳에 정령이 놀러 온 게 아니라, 정령 사는 곳에 사람이 얹혀사는 수준 아닐까.
“나도! 나도 안아져!”
“나두 반짝이들이랑 놀래!”
그래도 아이들이 정령을 좋아해서 다행이다. 만약 아이들이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동물들을 꺼려 하거나 무서워했으면 그만한 참사도 없다.
– 작은 인간들! 같이 놀아!
– 같이 놀면 더 재밌어!
게다가 정령들도 아이들을 좋아하니,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싶다.
…
‘카틀레아가 없는 동안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불안감이 솟구쳤다.
우리 세쌍둥이는 트릭시가 공작으로 등극하고 약 100년이 지나서야 태어난 후계자다. 카토반 가문 역사를 보면 약 120년 만에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다.
그렇기에 세쌍둥이가 5살이 되면 일정 기간 세르베트에서 지내기로 했는데, 이제 몇 달 후면 5살이 되는 해다. 이 아빠와 떨어져서 지내야 하는 가슴 아픈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허나 그 슬픔과 별개로 카틀레아라는 미니 세계수가 자리를 비우면 여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저택의 정령들도 전부 세르베트로 우르르 이주하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일부는 문제없지만 전부는 안 된다. 이제 정령은 우리 아이들의 놀이 상대 중 하나니까.
이거 여차하면 아카데미 근처 꽃밭에서 꽃이라도 몇 송이 가져와야겠어. 카틀레아한테 몇 번 만져달라고 하면, 분명 그 꽃들도 정령들이 나타나는 통로로 변신할 거다.
그러면 카틀레아가 없어도 저택으로 오는 정령들이 제법 많아지지 않겠나. 그렇게 믿는다.
아이들, 정령들을 이끌고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풀과 나무, 꽃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정원 내에서 유일하게 동떨어진 나무. 외견 자체는 다른 나무들과 비교해도 특별할 것 없었으나, 나무 앞에 박힌 비석 하나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 칼 크라시우스 탄생목 ]칼 크라시우스 탄생목. 이름 그대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내가 탄생한 날에 심었다는 묘목. 그 묘목이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덧 거대한 거목이 되었다.
아니, 솔직히 거목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민망하지만 아무튼 거대해진 건 맞다. 묘목의 크기를 생각하면 거의 수십, 수백 배 커진 거니까.
‘작은 세계수.’
탄생목을 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내 탄생을 기념하는 나무라 그런지, 트릭시는 농담 삼아 저 나무에 작은 세계수라는 별명을 붙였다. 일개 탄생목에게 붙이기에는 너무 과분한 이름이라 민망할 정도지.
하지만 이 탄생목도 세계수처럼 이런저런 수난을 겪기는 했다. 비록 불탔다가 부활한 것은 아니나, 어디에 탄생목을 두어야 할지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니까.
타일글레헨 백작성에 그대로 두어야 할지, 아내들의 고향에 두어야 할지, 평범하게 내 저택에 두어야 할지 온갖 논쟁을 거치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탄생목. 나무치고는 제법 큰 수난이지 않나.
‘탄생목, 이라…’
멍하니 탄생목, 정확히는 탄생목 앞의 비석을 바라봤다.
칼 크라시우스 탄생목. 칼의 탄생을 기념하며 심은 나무.
이 영혼이 아닌 육체의 탄생을 기념하는 나무.
‘정작 저 나무가 축하하는 사람은 없는데.’
상황비를 위한 기도를 마치고 온 참이라 그런가. 이상하게 평소에도 보던 나무를 봤음에도 싱숭생숭한 감정이 솟구쳤다.
더 이상 나를 이방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비록 외부에서 온 놈이기는 하나, 이제는 이 세상의 어엿한 주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게는 내가 만든 인연, 내가 만든 가족이 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내 육체의 주인이 따로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 부인들, 내 자식들이 빙의 이후에 만난 인연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내가 이 세상에 적응했어도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다.
‘본래 주인도 지켜보고 있겠지.’
일단 나부터가 남의 육체에 들어온 빙의자니 영혼의 유무는 논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그 녀석들이 내 꿈에 단체로 찾아오기도 했고, 최근에는 루이제의 언니가 나타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 점을 생각하면 이 육체의 주인도 영혼이 되어 천상에 있다는 뜻.
‘분명 보고 있을 텐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냐.’
순간 그런 의문이 솟구쳤다.
크라시우스 가문이 기억하는 넌 지옥에 떨어질 사악한 성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하고도 성실한, 여리고도 부끄럼 많은 성품이었지. 최후까지 씁쓸하기 그지없었으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를 차지한 타인에게 항의라도 하러 올 법도 한데.
‘항의조차 하지 않을 만큼 순한 건가.’
무심코 비석을 매만졌다. 칼 크라시우스라는 글자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며 작게 기도를 올렸다.
내가 나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나, 이 나는 내가 아니다.
동시에 타인이라고 하기에는 가깝고도 중요한 존재다. 경건공과 상황비를 위해 기도를 했으니, 나를 향해서도 마땅히 기도를 하는 것이 옳다.
“아빠?”
“아빠. 머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먼지 좀 닦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 기묘한 기도는 누구에게도 말할 것 없이 나 홀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확실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구나.
‘이건 또 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그 공간 가운데에 흰색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드디어 보는구나.
얼굴은 로브에 가려져 있었고, 목소리도 낯설기 그지없었으나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신으로 그랜드 슬램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