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30)
로판 속 공무원 930화(931/945)
갑작스레 나타난 흰색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목소리도 낯설기 그지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내가 에넨이라고. 저 존재가 대륙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고.
‘사내가 맞기는 한 건가?’
사실 에넨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체격이 호리호리한 편이라 남성체인지 여성체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목소리도 듣기에 따라 중성적이라 느껴진다. 심지어 노인인지 청년인지, 혹은 아이인지도 짐작할 수가 없다. 덩치를 보면 아이는 아니겠지만, 발육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포함될 것 같기도 하고.
분명 눈앞에 있음에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존재.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만 자세히 바라볼 수는 없는 존재.
‘태양신 맞네.’
나도 모르게 납득하고 말았다.
이 신묘하고도 기괴한 현상.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으나 눈이 버티지 못하여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다. 태양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위압감이야.
– 다 보았느냐?
“아, 그, 실례했습니다. 설마 천상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에넨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신의 모습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은 경험은 많다. 영원한 푸른 하늘과 콘스탄티나라는 맛보기 덕에 확실히 체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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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원한 푸른 하늘은 자기 멋대로 내 상처에 들러붙은 존재였으며, 콘스탄티나에게는 은인 대우를 받고 있다. 반면 에넨은 나에게 아쉬울 것도 없고, 힘이 부족한 상태도 아니다. 진정으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니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 태양을 향한 열망은 생명체가 마땅히 품는 본능과도 같으니. 어찌 태양을 바라보는 게 실례가 될까.
내 사과에 에넨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허나 너 작은 생명아. 태양이 따스한 건 멀기에 그런 것이며, 가까워지고자 하면 겁화에 휩싸일 것이니. 너는 태양의 불꽃이 아닌 따스함을 받아들이면 그만일지라.
“명심하겠습니다.”
괜한 거에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조언에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원래 신의 모습 같은 건 함부로 보는 게 아니다. 옛날에 지내던 세상의 신화에서도 신의 모습을 보려다 웰던이 되어버린 인간 일화가 많지 않나. 태양신이라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 앉거라. 내가 초대한 손님이 서있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감사합니다, 천상의 주여.”
이윽고 에넨의 권유와 함께 내 바로 옆에서 의자가 솟아올랐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긴 나무 의자였다. 공의회 이전까지는 대륙 유일신으로 군림한 에넨이니, 이런 꿈속 공간이라면 의자가 아니라 신전 하나를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물론 신전이 솟구쳤다면 그건 그거대로 부담스러울 터. 기꺼운 마음으로 에넨이 마련한 의자에 앉았다.
– 처음이었다.
“예?”
그리고 의자에 앉기 무섭게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처음이라니, 뭐가. 다짜고짜 그런 말을 꺼내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거냐.
– 네가 나의 복자가 된 이후로 수년이 흘렀다. 너의 첫 번째 결혼식에 임하여 너의 정착을 축하한 것도 수년 전의 일이지.
내 당혹스러운 침묵에도 에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답을 원하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처럼.
– 나에게 수년은 찰나지만 너에게는 긴 시간이었을 터. 헌데 너는 내 이름을 어깨에 짊어졌음에도 너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더구나.
‘아.’
그래도 혼자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생각은 아니었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랬나?’
에넨의 말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신앙심이 깊은 편은 아니라 복자가 되기 전에도, 후에도 기도를 자주 한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시복된 이후로는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바라며 기도하기는 했지.
…그런데 그것도 나를 위한 기도 아닌가? 내가 웃기 위해서 부인들의 순산을, 아이들의 건강한 탄생을 기도한 거니까.
– 내가 세상에 나타나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나를 섬기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한 의문을 읽은 듯. 에넨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깃들었다.
– 나를 처음으로 섬긴 아이도, 내 첫 번째 아이도 스스로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자신의 앞날에 축복을. 자신의 행동에 정의를 부여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지.
“그렇, 습니까?”
– 물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기에 나아가고 발전하는 법. 욕망 없는 인간은 그저 한자리에만 머물 뿐이다.
어느새 에넨은 내 앞까지 다가왔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몇 미터는 떨어져 있었잖아.
– 허나 너는 아니었다. 너의 기도라면 어떠한 기도보다 나에게 가까울진대. 너는 너를 위한 기도를 올리지 않았다. 오직 남들을 위한 기도였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으로서 아내와 자식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도 나를 향한 기도가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신이 그렇다고 하니 뭐 어쩌겠나. 기도를 접수하는 당사자가 ‘이건 자기를 위한 기도 아님’으로 분류했다면 그런 걸로 알아야지.
– 덕분에 이제야 너를 보게 되었다. 네가 비로소 너를 위한 기도를 올렸기에. 마침내 나 또한 너의 영혼과 닿을 수 있었다.
“감히 주님을 기다리게 한 것 같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 말하지 않았더냐. 나에게 수년은 찰나에 불과하다. 설령 수년이 아닌 수십 년이었어도 기꺼이 기다렸을 터.
그렇게 말한 에넨은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다시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갔다.
신이 친히 다독인 어깨. 어떻게 보면 성흔보다도 강렬한 접촉이지만, 이상하게도 입은 영광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주여. 저는 이번에도 저를 위한 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분명 에넨 저 양반. 처음에는 나름 정상적으로 말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알아듣기 힘든 말만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영원한 푸른 하늘도 에넨한테 ‘지 혼자 아는 말만 하는 애’ 라고 했었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화 중인데 뭐 얻는 게 없어.
– 아니. 너는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조차 계기는 타인을 위한 마음이었으니. 참으로 놀랍고 기특한 일이다.
내 불만과 별개로 에넨의 입가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눈과 코는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입만큼은 로브 밖으로 튀어나왔기에 확실히 보였다.
저놈 저거 웃고 있어. 지 혼자 아는 말만 쏟아내면서 지 혼자 웃고 있어.
‘신이라는 것들은 대체.’
통탄스러운 일이다. 무단 세입 하늘의 신, 하늘신에게 티배깅을 날리던 초목의 신에 이어 소통 능력이 바닥인 태양의 신이라. 그나마 승리자에 가까운 신들조차 이 모양이라면 종교 전쟁 시절에는 어떤 개판이 펼쳐졌을까.
상상하기도 무섭다. 일단 그 시대에 빙의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 정착을 축하한다. 너는 너의 걱정과 달리 진짜다.
그렇게 조금씩 하락하던 신앙심은 뒤이은 말에 잠시 동결되었다.
– 기억하느냐? 네가 첫 번째 결혼을 치르던 날.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비유가 아니다. 단순한 위로는 더욱 아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 너를 불렀다.
“주, 주여. 그게 무슨─”
– 처음 일어났다면 우연이나 두 번 일어났다면 필연. 그렇기에 네가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은 우연일지언정 돌아온 것은 필연일지니.
그 말을 끝으로 눈이 떠졌다.
‘미친 태양이.’
마지막까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끝났다.
내 기억으로 에넨과 콘스탄티나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고 했는데. 대체 어떤 보살핌을 받았길래 저런 신이 된 것인가.
에넨의 성인으로서 착잡한 일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정령을 대동하지 않은 채, 나 홀로 탄생목 앞에 서서 비석을 바라봤다.
– 처음 일어났다면 우연이나 두 번 일어났다면 필연. 그렇기에 네가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은 우연일지언정 돌아온 것은 필연일지니.
그리고 꿈에서 깨기 직전. 에넨이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사실 이 세상에 온 직후에는 다른 빙의자가 있지는 않을까,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도 빙의자인데 다른 빙의자가 없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 나 혼자만 빙의자라고 여기는 건 근거 없는 판단이었지.
허나 빙의하고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빙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정말로 빙의자가 없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 빙의자가 나처럼 이 세상에 완벽히 동화됐다는 뜻일 터.
‘조용히 지낸다면 굳이 찾을 필요도 없어.’
애초에 빙의자가 ‘신분제 철폐! 민주주의 도입!’ 같은 아찔한 소리를 내뱉으며 난리를 부리지만 않는다면, 나 또한 굳이 빙의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 나처럼 난데없이 끌려온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헌데 에넨이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필연. 누가 들어도 영혼 이동이 두 번 있었다는 말이지 않나.
그렇다면 빙의자가 나 외에도 하나 더 있다는 말이지만,
‘돌아왔다라.’
에넨은 나에게 돌아왔다는 표현을 썼다.내가 다른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했다.
나 혼자 두 번이나 세상을 오고 간 것처럼. 내 영혼이 이전 세계에 갔다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것처럼.
‘나 재활용된 영혼이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넨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대체 몇 번의 인생을 보낸 걸까. 남들에게는 한 번뿐인 인생을 나는 너무 알차게 보낸 것 같아.
‘정말로. 오고 간 영혼이었나?’
조심스레 비석을 매만졌다. 칼 크라시우스라고 적힌 부분을 몇 번이나 매만졌다.
본래 이 세상에 살던 내가 어쩌다 이전 세상으로 가게 됐나─ 같은 의문은 의미가 없다. 그 부분에 태클을 걸 거라면 내가 이전 세계에서 이 세계로 온 것도 말이 안 되니까.
‘내가 정말로 너였던 거냐?’
고작 16살의 나이에 죽은 진짜 칼. 제국법으로도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에 죽었던 칼.
그 사람이 나였고, 그 영혼이 내가 기억하는 현대로 흘러갔다면. 현대로 흘러간 영혼이 연어처럼 도로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라면.
‘개판이네.’
솔직히 개판이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16살에 다른 지역, 다른 국가도 아닌 다른 세계로 출장당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심지어 출장지에서 20년이 넘도록 지내다가 겨우 복귀했다고? 이 처절한 노동 현장은 누구에게 항의해야 하나.
‘개처럼 구르는 건 영혼에 새겨진 팔자였구나.’
진짜 나에서 전생의 나가 되어버린… 아니, 전전생의 나가 되어버린 칼 크라시우스-프로토타입의 이름을 매만졌다.
어째서인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웃을 이유가 많아서 그런지.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나를 위한 기도도 하지 않았던 놈이 내 죽음만 애도하고 있었구나.’
에넨이 보기에도 얼마나 신기했을까.
어쩌면 에넨의 기이할 정도의 관심과 총애는 신기한 애완동물을 보는 주인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