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31)
로판 속 공무원 931화(932/945)
내 정체가 빙의자가 아닌 장기 출장 복귀자라는 걸 깨닫고 사흘 정도가 지났다.
그 사흘 동안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거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나 혼자만 에넨에게 전해 들은 것이니 뭐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나마 변한 것이 있다면 약 10년 동안 품었던 죄책감이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점이겠지. 진짜를 몰아내고 육체를 차지한 것 같아 미안했는데, 애초에 진짜고 가짜고 나눌 필요 없는 동일 개체였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거 태그 사기야.’
내 인생이 소설이나 만화였다면 연재 10년 동안 태그를 속인 꼴이다. 지금까지 빙의자인 줄 알고 살아온 내 인생은 통째로 장르 전환이 되어버렸다.
이 야박한 태양신. 알고 있었으면 좀 빨리 알려주지 그랬냐. 내 존재가 가짜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들과 데면데면하게 지냈었고, 부인들과도 다소 늦게 결혼했잖아. 이 시간 낭비는 어떻게 보상할 거야.
‘신 기준에서는 빨리 알려준 건가.’
허나 신에게는 수년이라는 시간도 찰나라고 했다. 그렇다면 10년 만에 알려준 것도 에넨 입장에서는 빠르게 알려준 것일 터.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천상의 불멸자는 필멸자의 기분을 몰라. 신과 신도가 진정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게 먼저 아닐까 싶다.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지만.’
그리고 빙의─ 아니, 복귀 이후 10년이나 진실을 몰랐던 건 아쉬우나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내 나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세월이 흘러 죄책감이 무뎌지기 전에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했던 칼을 향한 죄책감이 무뎌진 상태였다면. 육체를 점거한 것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상태였다면 에넨의 말에 안도하거나 쓴웃음을 지을 일이 있었을까?없다. 분명 없었을 거다. 단순히 ‘그런가 보다.’ 라는 감상만 남긴 채 넘어갔겠지. 지금 느끼는 안도감도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
내가 품고 있던 죄책감이 빛을 만나서 해소된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부패하여 사라진 결말. 그런 결말보다는 이게 훨씬 나아.
‘수명도 돌려 막기가 있나?’
그건 그렇고 오리지널 칼과 귀환 전의 나, 지금의 내 팔자를 나란히 떠올리면 기묘하기 짝이 없다.
오리지널은 16살에 죽었고, 귀환 전의 나는 26살 정도에 죽었다. 둘이 합하면 평균 수명이 21세인 기적의 삶이 탄생한 것이다.
‘어떻게 평균 수명이 21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오리지널 칼은 고위 귀족가의 자제고, 귀환 전의 나는 21세기 선진국 사람이지 않았나? 어떻게 빈민국 뺨치는 속도로 죽어버린 거지? 혹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영혼의 발버둥이었나?
아무튼 두 번의 인생을 빠르게 종료해서 그런지, 세 번째 인생은 두 명분의 수명을 몰아 받게 생겼다. 내가 트릭시의 원대한 계획대로 수명이 연장되면 4, 500년은 살 테니까.
사실 사람 셋의 수명을 합해도 4, 500년은 안 나오겠지만 아무튼 몰아 받은 거다. 대충 이자까지 받았다고 치면 틀린 말은 아니야.
‘다음 생이 있다면 제발 정상적으로 살다가 죽기를.’
솔직히 세 번이나 살았으면 슬슬 천국에서 꿀을 빨고 싶지만, 그럼에도 네 번째 삶을 시작하게 된다면 평범하게 80살까지만 살고 싶다.그게 무리라면 아슬아슬하게 90살까지는 용납할 생각이 있다. 그 이상은 절대 안 돼.
다른 세계로 출장을 갔다가 26년 만에 귀환한 영혼이라면 네 번째 삶도 지옥일 게 분명하니까. 그런 삶을 100세까지 찍고 싶지는 않아.
‘천국이라.’
이윽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신이 존재하는 세계기에 사후 세계도 당연히 존재할 거다. 에넨에게 물어본 건 아니지만, 오히려 없으면 그게 더 서운할 정도지.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성인. 에넨에게 슬쩍 부탁한다면 천국에는 기꺼이 넣어줄 가능성이 높다. 내가 환생을 자청하지 않는 이상 내 미래는 네 번째 삶 대신 천국에서 보내는 느긋한 노후일 거다.
‘천국…’
만약 내가 천국에 가게 된다면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내 수명이 수백 년 단위로 늘어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먼저 천국으로 가 나를 기다릴까.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서른도 되지 않은 지금조차 적지 않은 인연을 만들었으니. 내 피를 이은 혈육만으로도 중대나 대대 하나를 만들 기세니.
그럼에도 딱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중에 누가 먼저 천국에 터를 잡았을지. 그것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자랑이나 하러 갈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겼다.
옛날에는 나 스스로가 외부에서 온 이주민인 줄 알고 조금 움츠러들었으나, 사실 그 녀석들보다 오랜 기간 숙성된 원주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신분도 혈통도 전부 우월한 존재였어.
어디 오리지널 16년, 복귀 전 26년, 현재 10년. 도합 52년 묵은 원주민의 꼬장이나 당해보라지.
국립묘지 내 전사자 구역. 그중에서도 대토벌 전쟁 당시에 전사했던, 감찰부 출신이었던 인물들이 모인 구역.
그곳에 나란히 위치한 여섯 묘비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휘황찬란한 자태를 자랑했다.
“평민 주제에 사자 문장을 달고 있다니. 영광인 줄 알아라.”
이 녀석들이 리브노만 백작에 임명되자마자 묘비에 새겨진 사자 문장. 사자는 제국과 황실을 상징하는 고귀한 문장인지라, 행정부 내에서도 부장급 이상만이 달 수 있는 일종의 훈장이나 마찬가지다.
헌데 그 문장을 평민 출신 팀장들이 달고 있다. 역시 리브노만 백작위가 좋기는 좋아.
“이번에는 빈손으로 왔다. 그냥 말해줄 게 있어서 온 거거든.”
정성스레 새겨진 사자 문장을 하나하나 매만진 후, 조심스레 묘비 앞에 앉았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헤카테의 묘비 앞에 앉았다. 내 일곱 번째 부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뭐 하러 냄새나는 남자 놈들 근처에 앉겠나. 잘못하면 저것들 냄새가 옮을 수 있다.
“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근본 넘치는 놈이었더라.”
어쨌거나 묘비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이미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건 확인했다. 여기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남들 귀에 들어갈 염려는 없다.
“다른 곳에서 길게 방황하기는 했지만, 집을 두고 외출하는 건 특이한 일이 아니잖아. 긴 시간 바깥에 있었어도 내 집이 여기라면 나도 여기 원주민이야.”
애초에 듣는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아마 이 녀석들도 천국이 아닌 지상에 있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을 거다. 내가 빙의자(아님)라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니. 하지만 내 꿈에 나타날 정도로 에넨의 배려를 받고 있다면 내 팔자도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자. 이것저것 변수를 따지다 보면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게 되니까.
“그동안은 이주한 놈 주제에 원주민들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 그런데 이게 이주민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원주민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사고였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을 텐데.”
내가 말하고도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주민이든 원주민이든 너희를 지키지 못한 건 지울 수 없는 과거다. 어떠한 핑계나 반전으로도 커버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도 ‘너희를 지키기 위해 남의 육체까지 빼앗았으면서 실패한 놈’과 ‘그냥 실패한 놈’은 다르잖아. 둘 다 비참하지만 전자보다는 후자가 낫지.
“그리고 조금 걱정되기도 하더라.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은 어디로 갈지. 너희 곁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날아갈지.”
이건 살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혼자만의 고민이었다.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잠깐 했었다.
그런데 애초에 전에 있던 세상이 잘못된 세상이었다. 내가 죽으면 그곳으로 가기는커녕 이 세계의 천국으로 가서 평화로운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입장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일까. 죽어서 너희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내가 죽으면 붙잡을 신이 셋이나 있지만.”
물론 내가 이주민이었어도 내 영혼이 이전 세계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거다.
에넨, 영원한 푸른 하늘, 콘스탄티나. 무려 셋이나 되는 신들이 내 영혼을 방치할 리가 없으니까. 자신의 성인이, 명예 제사장이, 은인이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건 신으로서 치욕일 터이니.
“참. 나 이제 초상화 그리면 뒤에 후광도 그린다? 멋지지 않냐?”
성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김에 생전 시성에 대해서도 자랑했다.
너희가 사자 문장을 받은 것처럼 나는 후광을 받았다. 이제 가족 초상화를 그려도 내 머리 뒤에는 후광을 그릴 수 있어.
‘끔찍하네.’
순간 후광이 그려진 가족 초상화를 상상하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후광이 그려진 가족 초상화.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종교계와 미술계에서 두고두고 교과서에 올릴 미래가 뻔히 보인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름 성인이니까 온 김에 기도나 하고 갈게. 이거 보야르 와인보다 더 귀한 거야.”
더 끔찍한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몰랐던 내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온 것은 맞으나, 이 기도가 진짜 방문 목적이나 마찬가지다. 경건공과 상황비, 죽은 줄 알았던 나를 위한 기도까지 했으니, 이제는 정말로 죽은 너희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게 옳다.
“좋은 땅 잡고 기다리고 있어라. 난 좀 늦게 갈 것 같으니까 느긋하게.”
기도를 하기 전. 아주 약간의 사심을 담아 부탁했다. 이왕이면 천국 내에서도 좋은 부동산만 골라두라고.
난 400년이나 500년 뒤에 갈 테니, 그쯤이면 충분히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지? 성인이 기도까지 해주는데 그 정도는 가능할 거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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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불가능하면 뭐. 에넨한테 대가리 박고 부탁하면 되겠지.
‘힘내라.’
그래도 내가 대가리 박을 일까지는 없게 해줘.
***
크라시우스 가문의 아이가 물러난 후. 아이가 매만지던 묘비로 다가갔다.
내가 비록 국립묘지의 관리인이지만 고인을 위한 추모를 방해할 권리는 없다. 그렇기에 크라시우스의 아이가 용건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성인이 진심을 다해 기도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으니까. 크라시우스의 아이가 상황비를 위해 기도를 올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친우를 향한 기도보다는 못할 테니까.
“호오.”
이 작은 호기심은 다행히 만족스러운 결과로 돌아왔다.
크라시우스의 아이가 쓰다듬은 묘비들은 은은한 빛을 흘리다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저 묘비 자체가 신성력을 품은 성물이 된 것이다.
‘과연. 이렇게 되는구나.’
한때 드래곤 로드였던 나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다.
만족스럽다. 정성을 다해 관리하고 관찰해야 할 묘비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