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33)
로판 속 공무원 933화(934/945)
장인어른은 한참이나 숨을 고른 끝에야 겨우 진정하실 수 있었다.
비록 장인어른이 무예를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소 긴 시간이 소모됐다. 대체 얼마나 열정적으로 뛰어오셨길래.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인가.’
그러나 장인어른 입장에서는 뛰어오는 게 아니라 네 발로 기어서라도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려 딸이 외손주를 낳고 있는 중요한 순간이지 않나.
게다가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알리나가 태어났을 당시,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자리를 지키지 못했었다. 다행히 그 누구도─ 심지어 린 본인마저도 출산이 3시간 만에 끝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해프닝 정도로 끝난 일이나, 장인어른 가슴속에는 큰 한으로 남았을 터.
덕분에 장인어른은 이를 악물며 달려오신 듯하다. 생각해 보니 린이 두 번째 임신을 했을 때부터 1년 일정을 철저하게 관리하셨지.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정작 그 철저한 관리도 황금공의 부름에 무너졌지만 말이야. 만약 이번에도 출산 자리를 지키지 못하셨다면 황금공 파벌에서 백작 하나가 이탈했을지도 몰라.
“주인님, 각하. 차를 타왔습니다.”
“아, 고마워.”
“잘 마시겠네.”
그리고 어느 외조부 겸 아비 겸 장인의 처절한 질주가 안타까웠는지, 집사가 조심스레 차를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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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배려였다. 역시 유능한 집사가 있으면 이런 게 좋아.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잖아.
“후우우…”
아무튼 집사가 건넨 차를 마신 장인어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아닌 안도감으로 가득한 한숨이었다. 배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긴장도 녹아내리신 모양이지.
다행이면서도 애잔한 광경이다. 백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자 대영지 하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다니. 가족 앞에서는 작위도 영지도 의미가 없다는 게 다시 한번 증명되는 순간이다.
“사위. 아직 우리 외손주, 린의 품속에 있는 게 맞지?”
“예. 애초에 진통이 시작되고 2시간도 되지 않았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가. 그거 참 다행이로군.”
그제야 장인어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혹시 알리나가 태어났을 때처럼 늦으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네. 못난 외조부가 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못나다니요. 알리나가 장인어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아픈 거지. 태어나는 순간도 지키지 못한 외할아비를 그렇게 좋아하니 말일세.”
너무 과도한 자책이 아닌가 싶지만, 일개 아비는 알 수 없는 외할아버지의 마음이 있을 테니 고개만 끄덕였다.
원래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평가하는 게 아니다. 나한테는 과하게 느껴질지라도 당사자인 장인어른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겠나.
‘와.’
실제로 아주 잠시 장인어른의 심정을 상상하자 끔찍한 공포가 몰려왔다.
딸이 고통받는 순간, 사랑스러운 외손주가 태어난 순간을 함께하지 못해? 나였으면 절망감에 좌절해서 죽었을 거다. 이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버텨낸 장인어른이 존경스러울 정도야.
“그보다 황금공 각하의 소집을 받으셨다고 해서 조금 늦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아무튼 이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면 나도 장인어른도 피폭을 당할 것 같아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동시에 정말로 의문이기는 하다. 황금공이 파벌원들을 소집할 정도면 결코 가벼운 안건은 아니라는 건데, 소집 도중에 뛰쳐나올 정도면 논의가 끝나가던 중이었나?
“아, 그거 말인가? 우리 복덩이 덕분에 금방 끝났지.”
“복덩이 덕분… 말입니까?”
복덩이. 정황상 세상에 나오려고 노력 중인 린 주니어를 지칭하는 말일 터.
린 주니어의 태명은 복덩이가 아니지만 오늘부터 복덩이라고 치자. 어차피 몇 시간만 사용할 태명이니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사실 이번 소집은 레온 남부 시장에 대한 우선권 때문에 모인 거였다네. 레온에 제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논의한 내용이니, 제법 오래 끈 안건이구먼.”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에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조금이라도 힘을 썼을 텐데.”
“사위 덕은 이미 북방 교역으로 톡톡히 보고 있다네. 그런데 어찌 더 도움을 바라겠나. 게다가 이 장인도 나름 능력 있는 놈이라 사위 도움이 없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 장인어른은 출산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셨다.
“정작 사위가 아닌 얼굴도 못 본 외손주 덕을 봤지만 말이야. 황금공 각하께서 우리 복덩이가 나올 거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 손을 들어주셨다네.”
‘복덩이 맞네.’
그 말에 복덩이라는 기습 태명을 바로 납득했다.
레온 왕국이 지금은 개같이 몰락한 상황이지만 한때는 대륙 중부의 패자이자 아르메인도 위협했던 강국이다. 아무리 국토 상당수가 뜯겨나간 데다 그나마 남은 영토를 제국과 아르메인이 양분했더라도, 그 양분한 조각 중 하나를 차지하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지.
그리고 장인어른은 복덩이 덕분에 조각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셨다. 우리 복덩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효도를 했어.
“축하드립니다, 장인어른. 요룬 백작가의 영광이 더욱 드높아지겠습니다.”
그렇기에 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특정 시장에 대한 우선권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경제에 무지한 나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다른 지역이 아닌 레온 남부에 대한 우선권인 것도 긍정적인 결과다. 마침 플란벨 백작령에서 레온 왕국 남부로 향하는 길목에는 내가 확보한 영지가 있으니, 장인어른의 상단이 이동할 때마다 편의를 봐줄 수 있지. 이 정도는 사위의 도움보다는 같은 제국 귀족끼리의 배려로 취급할 수 있다.
“조만간 경로를 정하시면 제가─”
“백작 각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출산실 문이 우렁차게 열렸다.
덕분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우리 플로렌스가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출산을 돕던 의료진이 갑작스레 튀어나온다? 복덩이한테도 문제가 생긴 건가 걱정될 수밖에 없잖아.
“무슨, 일이지? 필요한 것이라도 있나?”
“그, 그것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자, 문을 열고 나온 사제는 슬쩍 출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으에에에에에엥!”
얼마 지나지 않아 쩌렁쩌렁한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
?
“뭐?”
상상도 못 한 보고라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니, 뭐, 아이나 산모가 잘못된 것보다는 우리 새로운 막내가 건강히 태어난 것이 훨씬 좋기는 하다.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정도로 긍정적인 소식이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린이 출산실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혹시 제왕절개를 한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자연 분만이 아니라 제왕절개로 드리프트를 한 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2시간도 안 돼서 출산을 마친 건 말이 안 돼. 이건 어머니가 테레사를 낳았을 때의 기록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린이 알리나를 낳았을 때의 기록을 1시간 이상 단축한 기적이야.
“리, 린은! 산모는 무사한가!?”
내가 경이로운 소식에 할 말을 잃자 장인어른이 급히 입을 여셨다.
“물론입니다! 산모도 아주 건강합니다!”
“오오!”
그리고 최상의 대답에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이셨다.
진통부터 출산까지 2시간 컷.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 이번에는 알리나 때처럼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음.
장인어른에게는 그야말로 에넨의 은총처럼 느껴질 거다.
‘이번에도 위험했잖아.’
허나 이 경사와 별개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이 조금,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복덩이의 탄생을 놓칠 뻔했다. 장인어른은 두 번이나 외손주의 탄생을 놓친 희대의 외조부가 될 뻔한 상황이다.
만약 그런 참사가 터졌으면 장인어른은 얼마나 통곡하셨을까. 린이 괜찮다고 해도 얼마나 자책하셨을까.
이번만큼은 신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신들의 가호가 있었기에 장인어른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걸 테니.
침대에 앉아있는 린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2시간의 진통으로 인하여 지친 기색은 보였으나, 무려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있었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인가.
‘기록 단축 축하해.’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기괴한 농담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참아, 이 미친놈아. 아무리 경이로워도 지금은 출산을 마친 직후다. 농담이나 감탄보다는 감사, 격려를 먼저 해야 한다.
“고생 많았어. 이번에는 멋진 아들이래. 나랑 린을 닮아서 아주 건강한 아들.”
“네. 저도 들었어요. 울음소리부터 아주 남다르던데요?”
내 말에 린도 쿡쿡 웃음을 흘렸다.
“알리나도 활발한 편인데, 우리 새 막내는 더하겠어요. 둘이 커서 싸우지는 않겠죠?”
“싸울 기운도 없이 밖에서 놀게 하면 돼. 원래 싸우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거든.”
“이럴 때는 싸울 일 없이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하셔야죠.”
린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그 모습이 흐뭇하면서도 경이로웠다. 이게 어딜 봐서 출산을 마친 산부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러다 셋째를 낳을 때는 1시간 만에 끝내는 거 아니야…?
“참, 오빠.”
“응?”
“우리 애. 아들이라면 그 이름으로 해야겠죠?”
그 말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장인어른의 품에 안겨서, 장모님의 쓰다듬을 받으며 펑펑 울고 있는 새로운 막내. 나와 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응. 리온이라고 짓자.”
리온 크라시우스. 린이 알리나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 태어나면 짓기 위하여 미리 마련해둔 이름.
딸인 알리나가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보류된 이름이지만, 공교롭게도 아들이 태어났으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이름을 다시 끌어올렸다.
‘우리 리온.’
미소를 머금으며 내 4남을 바라봤다.
우리 FC 크라시우스의 기념비적인 11번째 멤버. 페렌츠에 이어 오랜만에 태어난 아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렴.
***
백작의 열한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주제에 자식이 벌써 11명이라니. 서른을 좀 넘은 내가 이제야 셋을 가졌는데.
‘선물은 뭘 보내야 하나.’
크라시우스 가문의 놀라운 번영에 감탄을 흘린 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작이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를 올린 직후다. 내가 큰 선물을 받았으니, 백작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탄생은 무엇보다 완벽한 명분이나,
‘괜히 특정 아이를 편애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열한 번째 아이의 탄생 때만 과도한 선물을 주면 백작이 다소 언짢아할 수도 있다. 혹은 백작이 다른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지.
물론 페디부터 플로렌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으나, 아비의 마음은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싶지 않던가. 나도 세 아이의 아비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탄생 기념 선물은 평소처럼 보내고,
‘며칠 후에 따로 주면 되겠어.’
탄생 기념 선물 따로, 백작에게 슬쩍 찔러주는 선물 따로 준비하자.
후자는 명분 없는 선물이지만 뭐 어떤가. 선물이라는 게 꼭 경사가 있을 때만 주는 것도 아닌데.
‘뭘… 줘야 하지?’
다만 백작이 감동할 만한 선물은 뭐가 있을지 고민이다.
백작한테 없는 거. 백작이 받으면 기뻐할 거. 대체 뭐가 있을까.
‘흐으으음.’
고심 끝에 책상 위에 있던 백지를 한 장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글씨를 적었다.
[ 명령 거부권 ]내가 쓰고도 과연 이게 옳은 건가 싶었으니까.
그런데 백작이 좋아할 선물이면 이 정도밖에 없지 않나? 이걸 능가하는 선물은 영구 퇴직밖에 없는데, 그건 내가 주기 싫다.
‘주는 대로 받는 놈이면 얼마나 좋아.’
하여간 깐깐한 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