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36)
로판 속 공무원 936화(937/945)
요즘 들어 창고 확장이나 신규 건설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누군가의 경사 때는 선물을 보내며 축하하는 것이 사교의 기본. 그렇기에 페디가 태어난 이래로 온갖 탄생 기념 선물을 받고 있었으나, 그건 제국 실세를 향한 의례적인 성의에 불과했다. 내 인간관계는 썩 넓지 않은지라 진심이 담긴 선물을 보낼 정도로 가까운 지인은 드물었지. 덕분에 기존 창고로도 그럭저럭 선물을 감당할 수 있었다.
허나 내가 살아있는 성인이 되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제국 실세를 넘어서 교계의 전설까지 됐지.’
자화자찬을 하는 기분이라 민망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제국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대륙 각지의 사제, 혹은 신실한 신도들도 추앙하는 대상이 돼버렸어.
그런 상황에서 내 시성 직후에 태어난 플로렌스 탄생 기념 선물은 저택 앞 성지 순례객들에게 가로막혀 나에게 닿지 못했다. 그리고 닿지 못한 선물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국 물류 창고 어딘가에서 숙성 중이었지.
즉 성지 순례객들의 열기가 가라앉고, 리온까지 연이어 태어난 지금.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물량의 선물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게 됐다. 저택 사용인들은 쉴 새 없이 미네랄이나 옮기는 SCV로 전락해버렸고 말이야.
‘조만간 휴가라도 줘야겠다.’
아무리 저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사용인들의 업무라지만, 이 정신 나간 선물 웨이브는 내가 봐도 통탄스러울 정도다.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사용인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게 먼저일까, 선물이 끊기는 게 먼저일까. 지금 기세를 보면 전자 같아.
‘탄생 기념 선물이니 나눠줄 수도 없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평범한 보물이나 재산은 주인 마음대로 나눠줄 수 있다. 친한 친구, 이웃, 동료 공무원 등. 그냥 적절한 명분을 만들어서 슬쩍 주머니에 넣어 줄 수 있다.
허나 그건 말 그대로 ‘평범한’ 물건일 때만 가능한 방법이다. 내 힘으로 확보한 재산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을 마구잡이로 뿌린다? 그건 선물을 준 상대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수준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서로 어색해질 수밖에 없는 만행이지.
막말로 황제한테 받은 어사주를 다른 귀족에게 양도하거나 시장에 파는 놈은 없잖아. 대충 그런 거다.
‘결국 창고를 새로 짓기는 해야겠는데.’
아무튼 머리가 복잡하다. 내 저택은 물론 타일글레헨 백작성의 창고도 수년 동안 이어진 선물 웨이브 덕분에 포화 상태잖아. 기적적으로 이 웨이브를 넘긴다고 쳐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니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선물을 불 태우─ 아니, 창고를 대대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생각해 보니 확장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해.
그리고 애석하게도, 귀족의 창고라는 것은 단순하게 ‘새로 만들자!’라고 결정하자마자 슉슉 지을 수 있는 건물이 아니다.
‘위치나 동선, 보안을 신경 써야 하니까.’
창고가 거주지와 너무 멀면 관리하는 데 불편하다. 허나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창고를 지을만한 부지가 있다면 애초에 창고를 새로 세워야 할 상황이 오지 않는다. 실로 기괴한 딜레마다.
또한 남들에게 받은 귀한 물건을 보관하는 건물이니, 보안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어떤 정신 나간 도적이 감히 침투할 수 없도록.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창고가 도적에게 털리면 그만한 굴욕도 없으니까. 아마 최소 10년은 ‘경 ☆ 축 타일글레헨 백작, 도적왕에게 털림’이라는 플래카드가 저택 대문에 걸릴 것이 분명하다.
“주인님.”
그렇게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적절한 창고 부지를 생각하던 중. 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다소 초췌해진 집사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면서도 불안했다.
열심히 미네랄을 옮기던 SCV가 대장에게 찾아오다니. 설마 파업을 선언하기 위해 온 건가?
“전승공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주인님과 긴히 논의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우선 접견실로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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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파업보다도 강렬한 말인지라 움찔하고 말았다.
전승공이 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승공이 워낙 바쁜 사람이라 그렇지, 아주 간혹 시간이 나면 우리 저택으로 와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큰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노리는 것 같더라.
허나 긴히 논할 것이 있다는 말. 그 말이 무엇보다도 불안했다. 제국군을 총괄하는 전승공이 친히 행차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니.
“바로 갈 테니 다과라도 준비해 줘. 차는 약간 미지근하게.”
“예, 주인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것과 별개로 전승공의 방문을 꺼릴 수는 없다. 전승공이 내 도움, 내 협력을 필요로 하는 거라면 기꺼이 손을 보태야 하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덜 힘든 일이기를.
에넨이 내 바람을 들어주기는 한 모양이다.
“칼 군. 혹시 땅 좀 빌려줄 수 있겠나?”
전승공의 용건은 놀랍게도 버겁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용건이었지.
“땅을…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다른 귀족이 한 말이라면 이해하겠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의 입에서 땅을 빌려달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 제국에서 황실 다음가는 부동산 부자들이 다섯 공작가 아니던가.
그런데 공작 중 하나인 전승공이 땅을 원한다라. 거대 금광의 주인이 어린애의 자그마한 금니를 노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미안하네. 설명 하나 없이 부탁하면 당혹스러울 법하지.”
그래도 전승공도 이것이 기괴한 상황임을 아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사관학교 부지 말인데. 위리디아 백작령 일부를 확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네.”
“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사관학교는 아카데미 인근에 만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분명 그랬습니다만.”
“칼 군이 들은 게 맞다네. 몇 주 전에는 측량까지 했었으니까. 헌데 말이야.”
이번에는 쓴웃음을 지은 전승공이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정령들이 복병으로 작용했다네.”
“그건 또 무슨…”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온갖 기구들로 땅을 엎고 무언가를 세우려고 하니 관심이 갔던 모양일세. 수백, 수천에 이르는 정령들이 달라붙으니 정신이 없더군. 이런 상황에서 공사를 강행하면 분명 일이 터지겠지.”
상상도 못한 변수라 정신이 멍해졌다.
확실히 아카데미 인근에 콘스탄티나의 꽃밭이 만들어졌고, 그 꽃밭이 세계수처럼 정령들의 터전이 되기는 했다. 덕분에 꽃밭은 아카데미 학생들은 물론 제국 귀족, 혹은 돈 좀 있는 평민들의 주요 관광지로 격상했을 정도.
그런데 관광지로서 맹활약 중인 꽃밭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정령들의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공사 현장까지 날아오다니.
‘인간하고는 낯가리는 편이지 않나…?’
내가 알기로 정령들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다. 이건 단순히 들은 게 아니라 직접 겪은 일이라 확신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저택에 서식 중인 정령들은 인간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친 전적이 있으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슬금슬금 숨어 다니는 녀석들이 있을 정도지.
‘야생 정령과 관광지 정령의 차이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산속을 돌아다니는 사슴들은 사람을 피하지만, 사슴 공원의 사슴들은 피하기는커녕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
“그래서 급히 다른 후보지를 찾아봤는데, 위리디아가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라서 칼 군을 찾아온 거야.”
“그렇군요.”
아무튼 전승공의 친절한 설명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확정되었던 후보지가 정령의 습격으로 무너지고, 급히 찾은 후보지가 지인의 영지라 찾아왔다는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충용무쌍한 제국군을 위한 길인데 어찌 작은 땅에 집착하여 대의를 망치겠습니까. 땅 정도야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래, 결과는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런데 위리디아로 괜찮은 겁니까? 북방을 제외하면 제국 내에서 최북단이고, 개발도 상대적으로 더딘 곳이지 않습니까. 제국군의 미래를 담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을는지.”
과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어쩌다 많고 많은 후보지들을 꺾고 위리디아가 선정된 걸까.
위리디아의 주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위리디아가 북방과의 교역에는 유리해도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영지는 아니다. 위리디아보다 좋은 입지를 갖춘 땅은 수두룩한…
아.
‘그래서 고른 거겠구나.’
내가 잠시 멍청했다. 입지가 좋은 땅들은 이미 개발이 완료되거나, 땅값이 어마어마한 상태겠지. 그런 영지에서 사관학교를 지을 정도로 드넓은 부지를 확보하는 건 돈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반면 위리디아에는 사관학교를 3개 정도 지어도 부족하지 않은 땅이 존재한다. 부족하면 목초지로 쓰고 있는 땅 일부를 건설용 부지로 돌리면 그만이야.
“아무래도 위리디아의 광활함은 다른 영지가 선보일 수 없는 매력이지 않겠나. 게다가 북방과의 연계도 수월하니, 기병과 관련된 교육도 능히 해낼 수 있다네.”
전승공의 대답도 내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넓이만이 아니라 북방과의 연계라는 추가적인 요소가 있었을 뿐.
“아, 물론 무료로 대여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매년 타당한 임대료를 지불하거나, 아예 그 부지만 황실 직할령으로 매입할 예정이니 말일세. 이는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니 칼 군이 원하는 대로 하게나.”
‘오.’
깔끔하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말이라 만족스럽다.
어차피 쓰지도 않는 땅이면 임대해서 임대료를 받아먹거나 아예 판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설마 황제랑 전승공이 가격을 후려치지도 않을 테고.
“각하. 결정하기 전에, 우선 위리디아로 가서 적절한 부지가 있는지 확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하, 주인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면 나야 좋지.”
내 제안에 전승공은 웃음을 흘렸다.
총사령부 지박령인 전승공이 흔쾌히 외출을 승낙하는 경이로운 광경. 그만큼 전승공이 사관학교 건설에 진심이라는 거겠지.
‘싸게 넘기자.’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전승공이 이리도 간절히 원하는데 그깟 돈 좀 덜 받으면 어때. 돈은 찰나지만, 인연은 영원한 것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