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37)
로판 속 공무원 937화(938/945)
내가 보유한 영지들은 전부 자동 사냥을 돌리는 것처럼 각 영지의 집사장들에게 관리를 맡긴 상태다.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이지.
대표적으로 타일글레헨 백작령은 아버지 때부터 집사장이었던 현 집사장을 그대로 유임하였고, 위리디아 백작령은 수석 지방관을 집사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레온 왕국 쪽 영지들은 쿼로노스 출신인 알폰소에게 맡겼다. 다들 유능한 인재라서 얼마나 편한지 몰라.
이 중에서 타일글레헨은 그나마 제도와도 가깝고 내 고향이기도 해서 자주 방문하는 편이지만, 위리디아와 레온 왕국 방면 영지들은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갈 일이 없다. 솔직히 최근에 방문한 것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바로 답할 수도 없어.
그 정도로 발걸음이 뜸하여 고요하고 평화로운 위리디아였으나,
“백작 각하와 전승공 각하를 뵙습니다!”
그랬던 위리디아에 대형 폭탄이 두 발이나 투하되었다.
아니지. 대형 폭탄 두 개가 아니라 수류탄 하나와 핵폭탄 하나로 비유하는 게 옳겠어. 나는 그나마 영지의 주인인 데다 잊을만하면 오는 놈이잖아. 반면 전승공은 드높고도 존귀한 공작이고.
‘미안하다.’
아무튼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허리를 숙인 키셀레 자작─ 집사장의 모습에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집사장은 위리디아의 2인자이자 실질적 관리인이고, 작위를 받기 전에도 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작위와는 거리가 멀지언정 평민이 아닌 귀족에 가까운 존재였지. 어디 가서 홀대 당할 위치는 아니었어.
허나 긴 시간을 제국 내에서도 변방인 위리디아의 지방관으로 지냈으며, 자작이 된 이후로는 위리디아 발전에 목숨을 건 수준으로 노력한 집사장이다. 거의 위리디아 지박령 수준의 삶을 보냈기에 공작 같은 거물과 만날 일이 극히 없었다.
그런 집사장 앞에 난데없이 공작이 강림했다? 솔직히 집사장의 나이를 고려하면 심장마비가 오지 않은 걸로도 감사할 따름이야.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 급히 확인해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아닙니다, 각하! 이 위리디아는 각하께옵서 황실의 은혜를 받아 관리하시는 땅이지 않습니까! 그 누가 감히 각하의 방문을 꺼리며 부당하다 여기겠습니까! 언제든 와 주십시오!”
“그런가?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슬며시 집사장의 어깨를 토닥이자 집사장은 더욱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딱 예상한 반응이라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집사장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나도 그냥 예의상 한 말이다.
“그래. 지도는 가지고 왔나?”
“예, 각하! 마침 2주 전에 최신화한 지도입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혼란에 빠진 공무원을 다독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적인 얘기가 아닌 공적인 얘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차라리 공적인 대화만 나누면 공무원 입장에서 편하니까. 딱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 준비한 내용만 줄줄줄 브리핑하면 된다. 분명 집사장도 내가 이런저런 근황을 묻는 것보다 본론으로 넘어가는 걸 원할 거야.
‘별거 없네.’
그렇게 생각하며 집사장이 건넨 지도를 확인하니,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지도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기껏해야 목초지가 더 넓어졌다는 점? 기존에 없던 마을도 몇 개 생겼고, 마을에서 도시로 진화한 곳도 있지만─ 그조차 목초지가 늘어난 속도와 비교하면 썩 인상적인 속도는 아니다.
‘이대로만 가자.’
만족스러운 결과라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부터 위리디아는 제국 본토와 북방을 잇는 교역 거점 겸 말들의 천국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영지들처럼 온갖 인파가 모이는 장소가 아닌, 다소 자연 친화적이면서도 평화로운 영지가 지향점이다.
물론 백작령의 발전도가 너무 떨어지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기는 하다. 아무래도 인구가 곧 힘인 시대고, 세수의 근간은 인구잖아. 백작령이라는 대영지급 영토가 시골 깡촌의 발전도를 자랑하면 곤란해.
그러니 딱 이 정도가 좋다. 인구도 늘어나지만 그보다는 목초지와 교역로, 시장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개발. 집사장이 아주 좋은 길을 가고 있어.
“각하. 어떻습니까? 아직 목초지로도 활용되지 않은 땅이 많습니다.”
“그렇군. 다른 지역은 어떻게든 부지를 확보하려고 고생했는데, 위리디아에서는 그럴 고민이 없겠어.”
흡족한 마음으로 전승공에게도 지도를 보여주자, 전승공의 입가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당연히 전승공의 미소는 내 미소와 다른 이유일 거다. 내가 위리디아의 행보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전승공은 드넓은 부지에 만족하는 것이겠지.
사실 내가 전승공 입장이었어도 그럴 거다. 다른 영지라면 일단 남는 영토부터 확인하고 어떻게든 부지를 확보해야 한다. 반면 위리디아는 지도에 다트를 던진 후, 다트가 꽂힌 곳을 중심으로 수 km를 부지로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 이 얼마나 기쁜 상황인가.
“일단 기병 전술에 대한 교육도 있을 테니 북방과 가까우면서도, 학생들의 생활을 위해서 도시와도 어느 정도 근접해야 하고…”
“허면 이곳은 어떻습니까? 그 아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역시 칼 군이 주인이라 그런지 안목이 남다르군. 사관학교를 세우기 딱인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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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디를 고르든 다 비슷할 겁니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그 정도로 위리디아 내의 빈땅은 경이로울 정도로 많고 드넓으며 광활했다.
‘이거 대부분 평지잖아.’
심지어 지형도 울퉁불퉁한 산지보다는 깔끔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공사 난이도도 상당히 수월할 거다.
훗날 사관학교를 다닐 학생들의 동선도 편할 거고. 캠퍼스에 언덕이 있으면 학생들만 피곤해지지, 아무렴.
전승공은 마치 재건축 가능성 아파트를 둘러보고 다니는 현금 부자처럼 위리디아를 누비다가 돌아갔다.
허나 부자들과 전승공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부자들은 재건축 시기를 하늘에 맡겨야 하지만, 전승공은 자신이 고른 아파트를 즉시 재건축에 돌입시킬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막말로 공작께서 원하시면 재건축이 아니라 맹지 개발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기에 전승공이 부지를 선정하고 얼마 후. 전쟁성과 교육성, 국토성에서 공동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 그, 각하. 실로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공동 조사단의 대표를 맡은 국토성 건축부장이 조심스레 연락을 걸어왔다.
그것도 무려 송구스러운 말씀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무슨 일이지? 혹시 근처에 던전이라도 생겼나?”
그 모습에 절로 불안해졌다. 이미 황제가 지지하였고, 전승공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영지 주인도 순순히 협조하는 상태다. 게다가 무려 국토성의 부장급 인사가 현장에 나섰다. 어지간한 문제로는 이 거대한 행보를 막을 수 없다.
– 그것이 말입니다만…
내 의문에 건축부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 부지에서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입에 담았다.
“…유적?”
– 예, 각하. 그것도 상당한 넓이의 유적입니다. 확실한 건 아니나 전승공 각하께서 선정한 부지는 물론, 그 너머까지 펼쳐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설명이 이어졌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건축부장의 친절한 설명보다 단 하나의 문장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좆됐다.’
바로 좆됐다라는 문장 하나가.
뒤이어 이 소식이 제도의 누군가에게 들어갈 경우, 눈이 뒤집힌 불사 군단이 위리디아로 달려갈 미래가 뻔히 보인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적의 군단이 말이야.
– 각하. 어쩌시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 아직은 조사단 내에서도 일부 인원만 알고 있습니다. 유적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각하께 연락을 드린 것이니, 각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말이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못 본 척 넘어가달라고 할까? 유적은 무시하고 평범하게 사관학교나 세우자고 할까?
‘아니야.’
진지하게 그런 욕망이 치솟았지만 이내 털어냈다.
그러지 말자. 아무리 영지 내에 유적이 발견된 것이 두려운 일이라도, 제국의 귀족이자 황태녀의 대부라는 놈이 개수작을 부리려고 해? 남들에게 모범을 보여도 모자란 마당에?
그리고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수작을 부리면 미래에는 더 큰 업보로 돌아온다.
“…원칙대로 처리하도록.”
– 원칙대로. 말입니까?
“그래. 문화성… 에, 있는 그대로 말하면 충분하다. 그 뒤는 문화성이 알아서 할 거야.”
– 예, 각하. 그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건축부장의 모습을 보다가 침통히 눈을 감았다.
문화성. 제국 내에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면 저승사자처럼 강림하는 자들. 그 어떠한 권력이나 혈연도 막을 수 없는 진짜배기 광인들.
‘내 영지도 저승사자한테 당하는구나…’
지금까지 엮일 일이 없어서 좋았는데, 설마 위리디아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 하하하하하!
황제의 웃음소리가 통신구를 거쳐 울려 퍼졌다.
망할 놈. 남의 영지에서 유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그렇게나 좋더냐.
– 이거 참. 제국 내에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오랜만에 듣는군. 영토 대부분이 개발된 상황이라, 아무래도 수십 년 동안은 별다른 소식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 허나 위리디아 같은 북단 영지는 상대적으로 개발이 더디었으니 유적이 잠들어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유적이나 유물도 일단 땅을 파야 발견되는 것이다. 허나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미 공사를 마쳤거나, 공사를 하기 난관이 있는 땅들이다. 그 영지들에 비하면 위리디아는 청정하고도 깨끗한 무개발 지역에 가깝지.
‘하필 부지에 있을 게 뭐냐.’
그래도 많고 많은 땅 중에서 부지로 선정한 곳에 유적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사관학교 공사는커녕 문화성의 집중 발굴이 먼저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망할.’
착잡하다. 문화성은 제국의 문화와 역사, 전통 등등을 아우르는 부서. 그렇기에 공사 중에 유적, 유물 등이 발견되면 즉각 개입하는 부서기도 한다.
헌데 이 ‘즉각’과 ‘개입’이 너무나 화려하고 무섭게 이루어진다. 문화성이 개입할 일이 생기면 기존에 진행하던 공사는 무조건 중지해야 하며, 문화성이 ‘이제 볼 거 다 봤습니다.’ 라는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공사를 재개할 수 없다.
그나마 공사 중단과 지연으로 인한 피해는 국고에서 보상해 주지만, 일단 공사가 멈췄다는 것 자체로도 어마어마한 피해 아닌가.
‘공작도 피하지 못한 마수지.’
역대 보야르 공작 중에는 부동산을 즐겨 구입하던 공작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구입한 땅을 파기만 하면 기가 막히게 유물이 쏟아져 나왔었다. 덕분에 그 공작이 땅을 사면 그 근방의 땅값이 폭락한다는 말까지 있었지.
그리고 공작은 자신의 공사 현장에 문화성 발굴단이 강림하면 제발 꺼지라 사정하기도 했고. 실로 전설적인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문화성 발굴단은 공작의 분노 섞인 애원에도 꿋꿋하게 일을 진행했다. 무섭고도 경이로운 일이야.
‘그래도 부지 후보는 여럿이라 다행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부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것은 아쉬운 일이나, 그래도 위리디아의 땅은 드넓다. 부지 후보지 정도야 몇 개는 더 있으니 다른 부지를 측량하면 그만이야.
두 번째 부지에서도 유적이 발견됐다.
진지하게 못 본 척 공사를 강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