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4)
제국의 차기 태양이시며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황태자 전하께서 친히 어리석은 왕족들을 꾸짖으셨지만 사실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줘서 감동스러울 뿐이지 뭔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황태자가 친히 맞이하며 환영사도 했는데 그 다음날에 바로 돌아가는 것도 웃긴 일이고, 삼국 놈들이 황태자가 돌려깠다고 마음 속 삼각형이 정상 작동할 놈들이면 애초에 제도에 오지도 않았다.
저것들은 루이제와 관련된 일이면 지능도 눈치도 양심도 잠시 탈착이 가능한 신인류다. 황태자의 돌려까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제국의 아량과 여유를 과시하며 왕족들을 받아줬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추방 조치를 취할 수도 없으니까.
‘하여간 개같은 것들.’
아무리 귀찮아도 황족이나 왕족 같은 군림 계층은 알게 모르게 서로 편의를 봐주는 편이다.
만약 어느 나라 왕족이 타국 왕족을 홀대했다가 자국 귀족들이 ‘왕족도 별거 아니네?’ 같은 인상을 품게 되면 통치에 적신호가 켜진다. 당장은 타국 왕족을 우습게 보겠지만 그 범위가 자국까지 번지지 않으라는 법은 없으니.
그래서 저 삼국 놈들이 제국에서 신나는 방학 라이프를 보내고 있는 거고. 진짜 개같은 것들, 하여간 신분이 깡패야.
“주인님, 움직이시면 안돼요.”
“아, 그래.”
슬쩍 한숨을 내쉬자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숙여진 고개를 다시 뻣뻣하게 세우자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냥 가도 괜찮은데 너무 오래 만지고 있네. 어차피 과장들과 투닥이다 보면 금방 흐트러지는데.
“적당히 해도 돼.”
“안돼요. 주인님 머리가 이상하면 제가 혼난단 말이에요.”
‘내가 괜찮은데.’
하지만 이 아이 입장에서는 어쩌다 가끔 오는 주인보다 같이 사는 집사나 선배 사용인들이 더 무섭긴 하겠지.
그리고 툴툴거리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애한테 필요 없으니 당장 돌아가라 내치기도 미안하고. 어쩔 수 없지,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주인님 평소에 관리 안 하시죠?”
“머리도 관리해야 되나?”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내 대답이 이 아이의 관대한 유머 범위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애들은 사소한 말에도 웃는 경우가 많으니 원.
멍하니 눈 앞의 거울을 보다가 머리를 만지고 있는 하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하녀면 유리스와 소피아였고, 보통 둘이 같이 다니던데. 얘가 소피아였나?
“소피아.”
“아, 소피아는 집사님이 다른 일을 시키셨어요.”
네가 유리스구나. 미안해, 너무 닮아서 헷갈렸어.
다행히 자신을 소피아라고 부른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피아를 찾는다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마터면 ‘오늘부터 네 이름은 소피아여.’를 시전한 악덕 고용주가 될 뻔했다.
“그런데 주인님, 저거 뭐에요?”
“저거?”
조금 머쓱한 마음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유리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유리스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슬쩍 눈동자를 움직이자 보이는 화분 하나. 아, 저거.
“산사나무. 선물로 받았지.”
방학 동안 동아리실에 뒀다가는 말라 죽은 산사나무의 원혼이 달라붙을 것 같아서 챙겨왔다. 동아리실에 놀러 올 때마다 빤히 화분을 바라보는 이리나를 생각하면 차마 방치할 수도 없었고.
선물이라는 말을 들은 유리스는 잠시 산사나무를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예쁘네요.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나하고 같이 온 애 중에 금발 여자애.”
“아, 그 분.”
알겠다는 듯 중얼거린 유리스가 어느새 머리 손질을 끝내고 뒤로 물러났다.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모습이 자기 기준으로는 혼신의 역작을 만든 모양.
“이제 일어나셔도 돼요!”
“그래, 고맙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유리스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자 뚱하니 쳐다봤고, 조심스레 머리로 손을 옮기자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헤헤 웃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내 앞에서 굳는 편이던데 얘랑 소피아는 어려서 그런지 해맑기 그지 없다. 처음 봤을 때는 악기로 가득했는데 잘 컸지. 이렇게만 자라다오.
그렇게 한참이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야 겨우 손을 뗄 수 있었다. 손을 떼려고 하면 올망졸망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무시해.
“아, 주인님.”
“이제 진짜 가야 돼.”
“그거 말고 알려드릴게 있어서요.”
뜬금없는 말에 문을 코앞에 두고 다시 유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얘가 개인적으로 나한테 할 말은 없을 텐데. 집사도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전하지 하녀를 전령으로 쓰는 편은 아니고.
무슨 용건인지 짐작이 되지 않아 더 불안해진다. 혹시 내가 모르는 골치 아픈 일이 터졌나?
“혹시 산사나무 꽃말 아세요?”
아, 별일 아니었네.
“관용과 용서라고 해요. 선물로 받으셨다면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알려줘서 고맙다.”
“별 말씀을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배웅하는 유리스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관용과 용서라.
‘큰 선물이었네.’
가문을 억울하게 멸문시킬 뻔한 가해자에게 관용과 용서,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이리나가 계속 선물로 떠본 이유가 있었다.
유리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거다. 이건 유리스에게도 선물을 줘야 할 일. 디저트를 좋아하는 아이니 집사한테 말해두면 좋은 걸로 챙겨줄 거고, 늘 붙어 다니는 소피아 것도 같이 주면 더 좋아하겠지.
그런데 꽃말은 정말 상상도 못했네. 꽃 이름도 모르는데 꽃말을 어떻게 알아. 이리나가 내 지식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
주인님이 문을 열고 나가시는 소리에 허리를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언니인 줄 알았는데.’
처음에는 산사나무를 선물한 것이 페넬리아 언니인 줄 알았다. 평소 페넬리아 언니를 보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지금 언니는 메이드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주인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상황. 혹시나 하는 기대 정도는 가지게 된다.
하지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그 페넬리아 언니가 그런 대담한 수를 띄울 리가 없지.
‘바보.’
언니가 2년이나 홀로 품은 마음. 실상은 주인님을 제외한 모든 주변인이 다 눈치챘지만 홀로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는 마음. 정말 늠름하고 멋진 언니인데 왜 이런 일은.
그에 반해 주인님과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을 귀족 언니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세상에, 꽃말로 마음을 표현하다니. 적어도 2년이나 묵언수행 중인 누구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행보다.
‘유일한 사랑.’
괜히 내 얼굴이 뜨거워졌다. 직접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말이니까.
그래서 주인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할까 싶었다. 이런 용감한 사랑은 응원하고 싶어지니까. 주인님이라면 이런 세심하고 수줍은 고백은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을 거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도 결국 다른 꽃말을 말한 것은 마지막까지 페넬리아 언니가 마음에 걸려서였지.
‘미안해요.’
금발에 푸른 눈이 예뻤던 귀족 언니에게 들리지 않을 사과를 했다. 난 우리 언니가 주인님이랑 잘 됐으면 하는걸.
이미 바렌티 공작가의 공녀님이 주인님에게 푹 빠진 상황이라 언니가 1부인이 되는 건 무리다. 아무리 주인님을 먼저 만났어도 신분 차이가 너무 극심하니까.
하다못해 주인님이 공녀님보다 언니와 먼저 맺어진다면 주인님 성격상 언니를 1부인으로 둘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다른 귀족의 등장? 언니는 대체 어디까지 밀릴까.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 아직은 안 된다. 주인님이 자력으로 알아채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입으로 경쟁자를 늘릴 수는 없다. 일단 언니가 결실을 맺어야 그 뒤에 경쟁자가 생기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쑥쑥 자라나는 죄책감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니,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누가 그런 애매한 꽃으로 주래? 꽃말이 사랑밖에 없는 꽃이었다면 내가 다른 꽃말을 말하지도 못했을 거잖아.
괜히 다른 꽃말도 있는 걸로 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리고 주인님도 내가 말하기 전에는 꽃말이 뭔지도 몰랐잖아. 응, 내 잘못은 아니야. 오히려 주인님 잘못이야.
애써 죄책감을 털어내며 복도를 어슬렁거리자 주방에서 주방장 아저씨를 돕던 소피아가 한가득 과자를 들고 왔다.
“주인님이 우리 먹으래!”
생각해보니 주인님 잘못은 없는 것 같다.
***
황태자는 감찰부에 매일 출근할 필요는 없어도 얼굴은 가끔 비추라고 했었다. 어제는 광장 관광이니 의전이니 정신이 없어서 못 갔지만 오늘은 그동안 밀린 일 결재하고 퇴근해야지. 괜히 미뤘다가 발등에 불 떨어질라.
“방학 축하드려요!”
‘시발.’
그냥 돌아갈까?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케이크를 들고 있는 1과장이 보였다. 방학을 왜 축하해. 우리한테 방학이 어디 있냐고.
“인생 첫! 방학! 축하드립니다!”
묘하게 특정 단어에 힘을 주는 2과장의 목소리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1과장과 2과장의 연타에 일을 미루지 않겠다는 다짐이 순식간에 흔들리고 말았다.
슬쩍 케이크로 시선을 내리니 여섯 개의 촛불이 꽂혀 있고, 그 중 하나에만 불이 붙어 있었다. 뭐냐 이거. 근본 없는 축하라 그런지 촛불도 근본이 없네.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2과장이 낄낄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 첫 번째 방학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방학 한 번에 불 하나씩 더 붙이려 합니다.”
이 개새끼가 이딴 식으로 티배깅을 해?
“여섯 개에 전부 불 붙으면 부장님도 졸업이에요!”
“야, 부장님은 입학도 못 하셨어.”
“아차!”
주먹을 쥐었다 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구석에 박혀 시선을 피하는 3과장이 보였다. 이번 사태는 미치광이 삼인방 중 하나의 눈으로 봐도 아니다 싶었나 본데.
차장과 5과장은 애초에 집무실에 있지도 않았다. 말리는 것에 실패하면 도망친다는 전술은 언제나 유효하지.
“3과장은 나가 있어.”
“가, 감사합니다…”
굽신거리며 나가는 3과장을 뒤로 하고 1과장이 들고 있던 케이크를 잡아 올렸다.
케이크의 생크림은 1과장의 백발과 비슷하고, 빵은 2과장의 금발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