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40)
로판 속 공무원 940화(941/945)
유적이 내 가족이 되었다.
대영지 하나에 대규모 유적이 여섯 개나 오밀조밀 모여 있다면 가족이 맞다. 어쩌면 타일글레헨에 계시는 부모님보다 유적과의 물리적 거리가 더 가까울 수도 있어.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컸던 제도를 향한 열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 내가 위리디아에 거주한다면 칼 크라시우스의 가족 관계 증명서에 유적을 적어야 할 테니까. 역시 사람은 지방이 아니라 수도에서 살아야 돼.
“완벽한 상태로 발굴하겠습니다. 대륙 고고학계가 위리디아를 성지로 여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관께서 피로로 쓰러지신다면 고고학계의 큰 기둥이 휘청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과한 염려십니다. 대륙에는 저보다 굳건한 기둥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영지 주인이 탈주를 노리고 있는 것과 달리, 제도에서 달려온 문화성 장관은 흉흉한 눈빛으로 사생결단을 부르짖었다.
두렵다. 평소에는 온화하기 그지없던 사람조차 초기 인류의 유적이라는 말에 광전사로 돌변하고 말았다.
내가 리제와 함께 발크로스 왕국으로 신혼여행을 가기 직전, 리제가 좋아하던 작가들과 다리를 놓아줄 만큼 친절한 그 장관이. 그러고도 딱히 생색을 내지 않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
‘도움을 받은 대가라고 생각해야 하나.’
애써 씁쓸함과 공포감을 억누르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하자. 문화성 장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니, 이제는 내가 문화성 장관의 열망을 들어줄 차례인 거다.
내 신혼여행을 도와준 사람이지 않나. 그런 사람이 학구열, 발굴욕에 불타오르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도리다. 애초에 말린다고 먹힐 상황도 아니고.
“게다가 감찰성 장관 덕에 최고의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 없지요.”
“제 덕에 말입니까?”
“유적이 어느 위치에 잠들어있는지 알고서 하는 발굴. 이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적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알고 있는 상태로 전쟁을 하는 것이며, 돈과 인력 제한이 없는 채로 건물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한 문화성 장관은 활짝 웃었다.
정말 활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큰 미소였다. 속세에 찌든 어른이 어떻게 저런 순수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물론 발굴 과정에서 유적에 손상이 가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미숙한 자는 이곳에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 예, 알겠습니다. 실로 믿음직스럽군요.”
일단 나는 저러지 못할 것 같다. 문화성 장관처럼 무언가에 미치거나, 잃어버린 동심을 되찾을 정도로 기뻐하지 못할 것 같아.
“참. 저 녀석에게는 장관께 적극적으로 협조하라 일러두었습니다. 필요하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편히 다루셔도 됩니다.”
내 말에 문화성 장관의 고개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유적과 제법 거리가 있는 공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즈를 향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도슨트.’
어느새 코까지 고는 지즈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평소에는 유감스러운 빅-독수리에 불과하지만, 이번 발굴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든든한 것이 지즈니까.
영원한 푸른 하늘조차 가물가물해 했던 유적의 이름, 위치, 건설 시기, 대략적인 인구 변화, 생활 양식 등. 모든 것을 줄줄이 읊었던 지즈다. 문화성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나 마찬가지일 터.
“그걸 대체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냐.”
– 매일 수 시간씩 듣다 보면 저절로 외워지더라고요…
실제로 지즈는 하늘 신에게 치가 떨릴 정도로 정보 유입을 당한 피해자니 틀린 말은 아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수백, 수천 년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할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예?”
덕분에 측은함을 담아 지즈를 보고 있던 중. 문화성 장관이 심상치 않은 플래그를 박았다.
“이 부족하고 미천한 놈은 황실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학자이자 작가,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광이었지요.”
허나 문화성 장관의 눈망울이 상당히 촉촉해졌기에 그게 무슨 말씀이냐는 태클조차 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감히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제국의 역사를 다시 쓸만한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꿈이니 망상이라 부르는 것이 옳은 수준입니다만.”
심지어 그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보다 연장자가 그러시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망상이라는 표현이 옳은, 문화성의 간부들조차 씁쓸한 농담으로 주고받던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장관으로 있는 시기에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문화성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이겠지요. 분명 그럴 겁니다.”
“하늘의 응답을 지상에 실현한 것은 장관이시고 말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입을 여는 것보다 문화성 장관이 허리를 숙이는 게 먼저였다.
“제 관료 생활을 걸고 다시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륙 고고학계는 위리디아를 성지로 여길 것이며, 모든 학자들이 위리디아에 방문하는 걸 일생의 소원으로 삼을 것입니다.”
멍하니 허리를 숙인 장관을 보다가 장관 뒤편을 바라봤다.
그새 소란을 느낀 것인지, 장관과 함께 온 문화성의 다른 간부들도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1호 발굴 현장의 리더인 발굴부장까지 달려오고 있을 정도.
“저에게 그런 선물을 주신다면 어찌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다 ‘자신보다 연장자인 문화성 장관에게 갑질을 한 감찰성 장관’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 것 같아 황급히 문화성 장관의 손을 잡았다.
감찰성 장관이 공포의 대상이어야 하는 건 맞지만, 감찰 대상이 아닌 상대에게도 갑질을 일삼는 프로 씹새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서운 것과 더러운 건 다르잖아.
“저희가 첫 번째로 발견한 유적은 공교롭게도 다른 다섯 유적의 어버이되는 유적입니다. 이 위리디아의 시발점이자 근간이 되는 유적이니, 그 유적의 발굴이 끝난다면 거대한 박물관을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로 현명하고도 아름다운 결단─”
“그리고 박물관의 이름은 장관의 이름을 따서 팔레리스 박물관으로 할 생각입니다. 고작 영지의 주인이라는 이유로 제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는, 열정과 애정으로 유적을 발굴한 분의 이름을 붙이는 게 도리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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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문화성 장관의 허리가 빠르게 솟아올랐다.
역시 이 말에는 반응할 줄 알았다. 내가 생각해도 좋은 선물이었거든.
“아니지. 아예 모든 유적 앞에 박물관을 세우고 부장들의 이름도 붙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가 남기는 한데, 거기에는 그냥 제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그러면 딱 여섯이군요.”
“자, 장관. 그건 땅을 파는 것이 고작인 우리에게 너무도 큰 영광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섯 유적을 아우를 특구에는 황제 폐하의 존함을 붙일 생각입니다.”
에이만카 17세 문화 특구, 혹은 길버트 유적 지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나.
“허니 마음 편히 받으십시오. 장관께서 저에게 다짐을 하셨으니, 저도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것이 옳습니다.”
내 단호한 선언에 문화성 장관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그래도 거절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문화성의 사기가 12배 정도 상승한 다음날. 어떻게 보면 유적 발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전승공이 찾아왔다.
“근래 칼 군이 고생이 많은 것 같아서 다시 왔다네. 혹시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어.”
“이미 손님들이 많은데 반가운 손님 하나가 늘어났다고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오히려 각하를 다시 뵙게 되어 반가울 따름입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야.”
작게 웃음을 흘린 전승공은 왼손에 들고 있던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래도 칼 군의 영지를 뒤엎어버린 당사자로서 빈손으로 오기는 민망하더군. 그래서 보야르 와인 중에서도 최상등품인 물건을 구해 왔다네. 황금공이 꽁꽁 숨기고 있던 걸 뺏어온 거니 실망스럽지는 않을 거야.”
“이런. 황금공께서 다시 내놓으라고 쫓아오시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나하고 같이 마셨다고 하게. 설마 배를 갈라서 가져가겠나.”
황금공이라면 가를 것 같았지만 그저 미소만 지었다. 전승공으로서도 고심 끝에 가져온 선물이니 목숨 걸고 사수해야지.
“그보다 성으로 오면서 얼핏 보니 발굴 열기가 어마어마하던데. 대규모 유적이 여섯 개라고 했었나?”
“예. 사실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칼 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걸세. 사관학교 부지를 찾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누가 알았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전승공은 찻잔을 매만지더니, 픽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총사령부에서는 사관학교가 아니라 유적 방위대 본부를 짓는 거 아니냐는 농담까지 돌고 있다네. 차마 부정할 수 없더군.”
“유적 방위대라.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짓궂기 짝이 없군요.”
그러나 전승공 말처럼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대규모 유적 여섯 개가 밀집된 구역에 전쟁성의 미래, 제국군의 미래가 걸린 교육 기관이 세워진다? 단순히 사관학교 경비만이 아니라 유적 경비를 위한 전력이 집중될 것이 뻔하다.
그럼 유적 방위대 본부가 맞아. 아주 튼튼하게 지킬 수 있겠어. 유적도 박물관도 완벽하게.
“그래서 말인데 칼 군.”
“관광 수입 일부는 제국군에 기부하겠습니다.”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아 먼저 대답을 했다.
사관학교 경비 병력으로 겸사겸사 유적 지구 경비도 같이 할 터이니, 적당히 유지비만 보태 달라는 요구일 터.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수락할 수 있다.
“늘 고맙네. 역시 칼 군과 대화하면 용건이 빨리 끝나서 좋아.”
“좋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좋게 끝나는 법이지요.”
그러자 전승공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
‘유적 경비?’
순간 괜찮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적 하나당 박물관 하나면 무려 여섯 개나 되는 박물관이다. 심지어 대륙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쓸 정도로 거대한 유적이니, 그 앞을 지키는 박물관도 덩달아 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박물관의 수장고도 상당한 용량을 자랑한다는 뜻.
‘창고… 생겼네…?’
그것도 제국군이 눈에 불을 켜며 지킬 창고가.
만약 털린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 제국군의 경비 미스인 창고가.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영지에서 이벤트가 터지더니 제도 저택의 우환이 사라졌다.
이게 그 행복 총량 보존의 법칙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