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6)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소중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것을 잃고 나서야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법.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대표적으로 건강이 그렇다. 20대도 분명 팔팔한 나이에 속하지만 10대 때 너무 힘을 쥐어짜서 그런지, 건강을 잃어가는 게 스스로도 체감이 될 정도였다. 대토벌 전쟁과 내부 숙청 연타는 너무 가혹하긴 했지.
하지만 대륙 역사에 전무후무할 어느 대마법사님의 은혜 덕분에 잃어버린 건강을 빠르게 되찾고 있는 중이다.
“감사합니다, 마종공.”
요즘 내 하루는 마종공을 향한 경건한 감사 인사와 함께 시작됐다. 들리지 않을 인사지만 어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감사도 표하지 않을까. 난 검은 머리기는 하지만 짐승은 아니다.
무료로 받은 작고 소중한 포션 하나만 마셔도 어느 때보다 활기찬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니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종공!
‘대단하긴 하네.’
처음 마실 때는 그냥 플라시보 효과인 줄 알았다. 좋다고 하니 그냥 좋은 줄 알고 마시는 거지. 그런데 마시면 마실수록 정말 효능이 느껴지더라. 평소에는 피곤했을 시간에도 쌩쌩한 컨디션에 마음으로 울었다.
순간 하루에 두세 병씩 마실까 하는 충동을 겨우 참았을 정도. 어느 도적 도시에서는 지나친 포션 남용은 오히려 체력에 좋다고 하지만, 이 세계에서 포션 남용했다가는 한참을 고생한다. 도핑은 당장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 몸에는 해롭지.
“주인님, 들어가도 될까요?”
빈 병을 매만지는 사이 문 밖에서 유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너무 오래 세워뒀네.
“그래. 들어와.”
곧 유리스의 손에 이리저리 만져질 머리를 슬쩍 쓸어올렸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신나는 출근을 하는 날이다.
밀린 업무는 고작 하루 출근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어제 차장이 가져온 서류를 다 처리해서 끝난 줄 알았지만, 다음 서류는 내일 가져오겠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사실 하루 만에 일을 끝내는 건 월급 루팡의 심보기는 하다. 개월 단위로 밀린 일이 하루에 처리가 가능하다면 애초에 난 필요 없는 사람이잖아. 내 자리에 인형 앉혀두는 게 더 경제적이겠네.
‘미친.’
그렇다고 진짜 앉혀두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기껏 유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했더니, 내 자리에 웬 인형 하나가 있었다. 심지어 얼굴 부근에는 초상화 하나가 당당히 붙은 상태로. 남의 얼굴 가지고 뭐하는 짓이야.
시선을 인형 옆으로 돌리자 1과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고개도 묘하게 들어 올린 것이 상당히 거슬렸다.
“이거, 설명.”
“부하를 아끼는 상사를 새로 세웠어요.”
한숨과 고함을 억누르며 인형을 가리키니 1과장은 더욱 열받는 표정으로 당당히 답했다. 분명 의문을 풀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의문이 더 쌓이는 건 왜일까.
미친 건가? 고작 당직 한 번 했다고 돌아버린 건가? 진짜 머리 한 대만 쥐어 박을까.
내가 내면의 폭력과 싸우는 사이 1과장은 인형을 끌어안으며 이쪽을 노려봤다. 이 시발, 적어도 초상화는 떼고 해.
“부하를 괴롭히는 못된 상사는 필요 없어요! 우리 칼은 언제나 누나를 사랑해 준다고요!”
“이게 미쳤나.”
상사 이름을 막 부르는 사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안 그래도 미쳐 날뛰는 것들인데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제어할 자신이 없다.
이름과 반말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 빙의 전 군대에서도 선임에게 말을 놓기 시작하면 그건 선임이 아닌 동기가 되어버렸다.
인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1과장은 벌벌 떨면서도 인형을 품에서 놓지 않았다. 대체 밤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거야. 당직이 그렇게 억울하더냐.
“오지 마세요! 부장님은 제가 지켜요!”
“대립 부장은 죽인다.”
“아, 안돼!”
버둥거리는 1과장의 품에서 인형을 강제로 뜯어갔다. 사실 내 거 아니라고, 2과장이 만든 거니 망가뜨리면 안된다고 주절거리는 말은 무시하며 목부터 뜯었다.
그렇게 감찰부 대립 부장 칼(재봉 인형, 제조 후 6개월)의 난은 빠르게 진압됐다.
“우리 칼, 누나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랄 말고 이거나 받아.”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인형 조각을 수습하던 1과장에게 봉투 하나를 던졌다. 아침부터 이런 장난을 칠 줄 알았으면 안 가져왔는데.
손에 든 인형 조각을 내던지고 봉투를 받은 1과장은 내용물을 확인한 후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케이크 답례. 주방장이 만든 거야.”
“헤헤, 잘 먹을게요.”
봉투에 든 빵 하나를 꺼낸 1과장이 행복한 표정으로 빵을 입에 물었다. 하여간 사소한 일로도 감정 변화가 극적인 녀석이다.
빵을 오물거리는 1과장을 뒤로 하고 찢어진 인형 조각을 발로 툭툭 치며 한곳에 모았다. 어제는 케이크, 오늘은 인형. 내일은 뭐지? 꽃이라도 주나? 꽃까지 받으면 선물로 딱 좋은 삼종 세트기는 한데 죄다 찢어진 상태네.
“부장님, 먼지 날려요. 쓰레기는 나중에 치우세요.”
아까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태세 전환 뭐야. 진짜 내가 얘만큼 미친 애는 본 적이 드문데.
“…그래.”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떠오르자 차마 주먹을 들 수 없었다. 우리 개같은 1과장, 많이 먹고 무럭무럭 건강히 자라렴.
‘시발.’
마종공이 준 포션 없었으면 진작에 뒷목 잡았을 것 같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을 방치하면 내 일만 더 쌓이지.
당직 업무도 끝난 1과장을 쫓아내자 바로 차장이 들어왔다. 들어오려다가 집무실이 소란스러워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미안하다, 이상한 꼴을 보여서.
차장과 조금은 어색한 시선 교환을 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틀만 더 하시면 끝납니다.”
“다행이네.”
그나마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끄적끄적 서명을 했다. 어제, 오늘, 내일, 모레. 그래, 딱 나흘만 고생하자. 나흘만 구르면 당분간 감찰부에는 얼굴도 비출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이것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들이미는 서류도 없으니 대형 사건도 없는 모양이다. 그나마 대형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변경백의 파견 요청도 어제 처리했으니 신경 쓸 거 없고.
─라고 생각하자마자 책상 위에 둔 통신구가 영롱한 빛을 뽐내기 시작했다.
“…….”
“부장님.”
“그래, 받아야지.”
못 본 척 넘어갈까, 라는 유혹이 잠시 들었지만 차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통신구를 손에 쥐었다. 차장 없었으면 진짜 무시했을지도 모르겠네.
“감찰부장입니다.”
– 특무성 장관이오.
연락을 받으니 지네를 보는 것 같은 꿰맨 자국이 가득한 특무성 장관의 얼굴이 반겨줬다. 저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되네. 아니, 치료할 수 있으면서 왜 상처를 그대로 두지? 누구는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가 않아서 미치겠는데.
그래도 황제가 직접 지우라고 명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을 얼굴이니 넘어갔다. 괜히 신경 써봤자 나만 피곤하지.
“예,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 내 집무실로 오시오. 감찰부장과 긴히 논할 일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 외무성 장관도 있으니 서둘러 왔으면 좋겠소.
“아, 예.”
특무성 장관은 일방적인 소환 명령과 함께 연락을 끊었다. 특무성 장관은 물론 외무성 장관도 있는 자리?
‘가기 싫다.’
만나면 가장 귀찮은 조합이 만나버렸다. 양지의 외무성과 음지의 특무성이 결합할 정도면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거야.
잠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아까보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가기 싫지만 장관 둘의 호출을 무시한 후환을 감당하는 건 더 싫다.
“다녀온다.”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살아돌아오라는 기원처럼 들리는 배웅 인사에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
역시 두 부서가 만나면 귀찮은 일이 맞다.
“신성교국에서 보낸 정보가 있었다네.”
드물게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외무성 장관을 보면 확실하지. 슬쩍 특무성 장관에게 시선을 돌리자 특무성 장관도 딱딱히 굳은 안색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 양반까지 이렇다고?’
기본 인상부터가 험악한 편이라 어지간히 기분이 더러운 게 아니면 표정이 변하지 않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황혼 교단.”
내 질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특무성 장관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외무성 장관은 혀를 차고, 나는 본능적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귀찮은 일은 아니었네. 단순히 귀찮은 수준이 아니라 더럽고 개같은 대형 사건이다.
“황혼 교단이 제도로 오고 있다는군.”
“그것들 미쳤답니까?”
“광신도가 괜히 광신도겠나.”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신성교국이 황혼 교단을 추격하던 중, 황혼 교단이 제국에 진입한 정황을 파악했다네.”
이번에는 외무성 장관이 말을 이었다. 아까보다는 안색이 괜찮아졌지만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닦는 걸 보면 아직도 심적 피로가 큰 모양.
“한동안 제국에는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갑자기 국경을 넘었지.”
“그리고 목표는 제도고 말입니까?”
“그렇다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외무성 장관이지만 눈으로는 온갖 욕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필 이 시기에 제도를 노리는 황혼 교단이라, 목적이 무엇일지는 너무 뻔하다.
“타니안 에네스.”
“암살이 목적이겠지.”
지금도 내 저택에 머물고 있는 타니안. 차기 성자라는 휘황찬란한 직함을 달고 있으니 황혼 교단 입장에서는 교황과 맞먹는 수준의 타깃이다. 죽일 수만 있다면 여명 교단에 막강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존재.
아무리 생각해도 암살밖에 없다. 이미 제국이 자기들을 잡으려고 눈이 뒤집힌 걸 알면서도 기어 들어온다면, 이번 잠입으로 거물을 보내버리겠다는 의미니까.
“감히 제국을 우습게 본 것이지.”
맹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이번만큼은 특무성 장관의 말에 공감이다.
‘개새끼들이.’
제국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그딴 짓을 계획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