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73)
로판 속 공무원 973화(974/985)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가라앉은 직후.
“끝났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임에도 땀 범벅이 된 의사가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마님도, 따님도 건강하십니다!”
그것도 몇 시간 동안 간절하게 기다린 소식과 함께.
‘딸이라.’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미소가 동시에 나왔다.
아들인 페렌츠에 이어 이번에는 딸이 태어났다. 나도 에리도 아이의 성별을 정할 능력은 없으니 의도한 건 아니나, 졸지에 아들 하나 딸 하나라는 밸런스를 갖추게 됐어.
“이번에는 외손녀인가!”
이 절묘하고도 아름다운 우연에 장인어른도 크게 기뻐하셨다.
이오네스 후작성에서 느긋한 티타임을 즐기다가 에리의 진통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장인어른이다.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연말의 고요함은 깨졌지만, 그깟 고요함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연말 선물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 기뻐하지 않으랴.
“다만 그, 각하.”
“왜 그러나?”
뛸 듯이 기뻐하는 장인어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의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만이라니. 불안하게 왜 그런 말을 덧붙이는 거야. 마님도 따님도 건강하다며.
“따님께서 예정보다 다소 이르게 태어나신지라, 평균적인 여아들에 비하면 조금 작으십니다. 다행히 건강에 영향을 주거나 일상에 지장이 갈 수준은 아닙니다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건강하다면 덩치가 조금 작은 게 대수일까.”
불안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말이라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딸이 남들보다 조금 작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 맞다. 그래도 예정일보다 이른 출산인 걸 감안하면, 건강과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수준이 아니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보다 문제가 없다면 들어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의사의 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문과 벽이 막고 있음에도 비명소리가 유독 우렁찼던 에리다. 하필 에리 바로 직전에 출산을 겪은 산모가 린이라 더욱 대비되는 비명소리였지. 오죽하면 출산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갈등했을 정도였어.
그러니 에리한테 고생했다는 말이나 하자. 건강하다는 걸 보면 단순히 비명소리만 컸던 것 같지만, 아무튼 고생한 건 맞으니까.
“에리야! 우리 외손녀!”
그리고 내가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눈앞으로 장인어른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생신 기념 연회 때 뵈었던 에리의 조모님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분도 아흔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를 선보이셨지.
‘유전자의 힘인가.’
조모님의 유전자가 장인어른에게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저 경이로운 속도도 이해할 수 있다. 아흔의 나이로도 달리기가 가능한 분인데, 그 아들인 장인어른은 고작 중년이지 않나. 단순한 달리기뿐만이 아니라 물구나무 질주도 가능할 터.
정작 에리는 조모님의 강인함을 물려받지 못한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다. 솔직히 조모님이 놀라운 거지 에리가 허약한 건 아니야.
아마도.
어제까지만 해도 내 피를 이은 아이들은 총 11명이었다. 페디와 세쌍둥이, 프리드리히, 알리나, 페렌츠, 메리, 율리아, 플로렌스, 리온─ 이렇게 11명.
그중 마르가 낳은 페디와 율리아를 제외하면 전부 내가 아닌 모친을 더 닮은 편이었다. 이상하게 흑발로 태어난 애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엄마 쪽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더라. 서운한 건 아니지만 뭔가 신기했다. 내 유전자가 약한 편은 아닐 텐데 말이야.
헌데 그 기묘한 규칙이 드디어 깨졌다.
‘까맣다.’
솜털이라는 표현도 민망한 수준인 머리카락. 미약한 물기 때문에 머리에 달라붙은 쪼그마한 머리카락.
이거 분명 흑발이다. 우리 아이들 중에서 페디와 율리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흑발로 태어난 아이가 됐어.
‘이 아빠한테 이런 선물을.’
덕분에 코끝이 찡해졌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중요하지, 머리카락 색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여겼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닮은 것도 예뻐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내 유전자가 힘낸 것을 직관하니까 왜 이렇게 기쁜지. 나 흑발 좋아했구나.
‘…적안인가?’
빼애앵 울음을 터뜨리는 우리 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 눈을 뜨지 못했기에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는 알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이건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자. 애초에 막 태어난 아이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할 수도 없으니까.
“우리 외손녀. 어찌 이리도 앙증 맞고 사랑스러운지. 혹여나 잘못 만지면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무섭구나.”
그 와중에 장인어른은 에리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밀착하여 에리와 우리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장인어른의 표정이 엄청나게 녹아내렸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딸이 태어나도 사랑스러운 법인데, 외손녀는 오죽하겠나.
“딱딱하게 외손녀가 뭐예요. 이름으로 불러요.”
그리고 장인어른의 격한 애정 표현에 에리가 삐죽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름을 정해야 부르지. 없는 이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넹? 장관님이 말 안 했어요?”
그러자 장인어른은 물론, 다른 가족들의 시선도 나한테 쏠렸다.
“페렌츠 이름 지을 때 여자 이름도 같이 준비했었어요. 다음에 딸 태어나면 그거 쓰자고 했었는데?”
눈을 깜빡이던 에리는 이내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과장스레 말을 이었다.
“설마! 우리 딸 이름! 까먹은 거 아니죠!”
“아니야.”
농담인 거 알지만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혹시 우리 딸이 알아들을까 무서워.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우리 아빠는 내 이름도 까먹는 사람이구나!’ 라는 인식이 생기면 어떡해.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 크라시우스.”
그렇기에 서둘러 장인어른께 우리 딸의 이름을 알려드렸다.
내 12번째 아이이자 8녀인 베로니카. 스테판의 영광이니, 동 다니스니, 대륙 단위 기부니, 살아있는 성인의 성유물이니 뭐니 하면서 소란스러운 연말이었으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눈처럼 다가온 우리 보물. 올해를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찾아온 작은 천사.
그래서인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도 입꼬리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우리 딸 베로니카. 잊지 못할 연말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베로니카라.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이름이군. 사위가 아이들 이름을 잔뜩 짓다 보니 작명 실력이 늘었어.”
“과찬이십니다.”
게다가 우리 베로니카는 태어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인데, 다른 선물도 함께 안겨주었다. 언제나 천대받았던 아빠의 작명 실력을 웃어른에게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감동적이다. 티티의 이름을 베아티투도, 리제의 애칭을 루라고 지으려 했을 때 얼마나 많은 괄시와 무시를 당했던가. 부인들마저 내 말을 못 들은 척 넘어갔을 때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이제는 아니야.’
참으로 치욕스러웠던 기억. 그 추악하고 어두웠던 과거와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가 됐다. 난 이제 작명가 칼 크라시우스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과찬이긴 하죠. 그거 제가 지은 이름인뎅.”
“뭣.”
허나 이어지는 에리의 말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베로니카가… 에리가 지은 이름이었나?’
혼란스럽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페렌츠의 이름을 지을 때 같이 지었던 이름이라 벌써 2년인가 3년 전의 일이다. 결과물은 기억해도 그 과정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특히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후보군을 수십 개 정도 쏟아부었다가 하나하나 추리는 편이다. 그 후보군 중에 어떤 이름이 누구 아이디어인지 누가 기억할까.
“내가 지은 게, 아니었어?”
“아니니까 와서 베로니카 좀 안아줘요. 몸에 힘이 없어서 놓칠 것 같아.”
에리의 구박 아닌 구박에 서둘러 베로니카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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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익숙해져가고 있던 엄마 품에서 낯선 아빠 품으로 이동해서 그런지, 겨우 잠잠해졌던 울음소리가 다시 거세졌다.
그래도 이 울음소리조차 베로니카가 건강하다는 증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천사들의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
에리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들을 낳고 2년 후에 딸을 낳다니. 에리도 가문의 번창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구나.
‘둘이나 낳을 줄은 몰랐는데.’
페렌츠를 낳은 후. 한동안 아프다고 징징거렸던 에리다. 그래서 에리는 페렌츠 하나만 정성스레 기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올해 임신하더니 해가 지나기 전에 출산까지 마쳤다.
엄살이란 엄살은 다 피우면서 실속은 챙기고 말이야.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종잡을 수 없으니 원.
‘이러다 내년에는 셋째도 낳겠어.’
에리의 셋째.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에리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쟤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절로 들었던 후배였다. 그런 후배가 연하 남편을 만나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까지 낳았다. 불과 몇 년 전의 내가 들었다면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이야기.
‘나도 분발해야지.’
슬며시 배를 매만지다가 조심스레 차를 마셨다.
우리 넷째. 아쉽게도 새로 태어난 에리의 딸보다는 1살 어리겠지만, 다행히 1살 차이 정도는 친구로 지낼 수 있다.
사실 황실의 피, 공작가의 피를 가지고 있다면 1살이 아니라 5살까지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겠지만.
‘2, 3년 정도만 지나면 시녀로 삼아도 되겠어.’
아무튼 에리가 우려와 달리 평범한 아내, 평범한 엄마로 지낸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이렇게 무럭무럭 모성애를 쌓아가면 아이들도 잘 돌볼 테고,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어울리는 훌륭한 사회인이 되겠지?
그렇다면 넉넉하게 3년 정도 후. 그때쯤에 에리를 황태녀궁의 시녀로 삼자. 그때면 우리 샤를로테도 황후궁이 아니라 다른 궁으로 독립해야 할 때고, 독립한 샤를로테 곁에 에리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으니까.
‘감찰부 과장에서 황태녀궁의 시녀라.’
내가 결정한 인사 배치지만 너무 극단적인 변경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나도 에리와의 연이 아니라면 이런 결정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놀랍게도 에리만큼 샤를로테에게 훌륭한 시녀가 될 사람도 없으니.
샤를로테가 가족처럼 따르고, 샤를로테를 가족처럼 사랑할 사람은 에리 정도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