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78)
로판 속 공무원 978화(979/985)
반올림하면 대충 10년 전으로 취급할 수 있는 과거. 정확히는 내가 아카데미 감찰관이라는 팔자에도 없던 직책을 맡은 시기.그 소식을 빠르게 접한 구 감찰부 과장들은 부장의 출장과 아카데미 방문을 남의 일처럼 기뻐했다.
절대 자기 일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부장의 고통과 수치심을 자기 일처럼 여겼다면 기뻐하는 게 아니라 사직서를 제출했을 테니.
‘아찔했지.’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일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카데미 파견 통보를 받은 다음날, 집무실로 출근을 하니 박수와 함께 휘날리던 플래카드는 정말 인상 깊었었다.내 멘탈을 확실하게 박살 냈던 화려한 퍼포먼스였어.
그걸 보고 너무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나올 뻔했었다. 감동과 감사를 주먹에 담아 과장 트리오에게 선보이기도 했고.
그리고 새삼스레 그때의 일이 떠오른 이유는 간단했다.
“압빠! 추카해!”
약 10년 전에 과장 트리오 중 한 명이었던 에리. 내 멘탈을 공격하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존재가 오늘날에는 내 부인으로 존재하기에.
그 부인이 내 공작 대리 등극 소식을 들은 다음날, 마치 과거처럼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발휘했기에.
“고마워, 우리 아들.”
대체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케이크를 들고 쪼르르 달려오는 페렌츠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통탄스러우면서도 전율이 돋았다. 기어코 남편의 비극에 티배깅을 날린 에리의 만행은 치가 떨리는 일이나, 자신이 직접 주도하지 않고 페렌츠를 전진 배치한 용의주도함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활짝 웃으며 축하 케이크를 건네는 우리 페렌츠. 이런 페렌츠 앞에서 어찌 광분을 하며 에리를 추궁할 수 있을까.
[ 경 ☆ 축 ! 우리 남편의 공작 대리 등극! ] [ 아! 너무너무 부럽다! 만인 위에 서는 위풍당당한 공작(대리) 생활! ]‘익숙한데 이거.’
그 와중에 케이크 윗면과 둘레에 적힌 문구에서 미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뭐지. 분명 처음 보는 문장이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은? 내가 저거랑 비슷한 문장으로 멘탈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나?
잘 모르겠다. 멘탈 공격을 당했다면 그 흔적과 기억을 최대한 빠르게 지우는 편이라.
“압빠.”
“응, 우리 아들. 말하렴.”
“근대 공작대리가 모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순수한 눈망울에 침묵하고 말았다.
그러게. 공작 대리는 대체 뭘까. 이 세상에 어째서 그런 흉하고도 무거운 직함이 존재하는 걸까. 심지어 그런 흉한 걸 트릭시는 100년 동안, 미래에는 마리아가 수십, 수백 년 동안 짊어질 거라는 게 안타까울 뿐.
“페렌츠. 아빠랑 같이 있으면 어떠니?”
허나 아이의 질문이 난해하더라도 어떻게든 대답하는 게 어른의 의무.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며 넌지시 운을 뗐다.
“죠아!”
“그치? 하지만 우리 페렌츠만 좋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좋게 만드는 사람이 공작 대리야.”
대신 나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은 나빠지지만.
목 끝까지 솟구친 말은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좋게 포장했다. 공작 대리, 혹은 그 외의 오등작이나 고위직 등. 나름 이름 높고 떵떵거릴 수 있는 명함을 가지게 된다면 다수를 즐겁게 해야 한다고.
고위직은 나 좋다고 사는 게 아니라 다수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 아직 어린 페렌츠에게는 어려운 말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한계지만, 이렇게 씨앗을 뿌려두면 언젠가는 훌륭히 발아하겠지.
“진짜?”
다행히 내 말에 페렌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멋쩌! 그럼 나두 공쟉대리할래!”
‘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안 된다. 아무리 어려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어릴 때의 꿈은 짧은 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나, 그게 평생의 염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내가 원하는 발아는 그런 발아가 아니었어.
‘어쩌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우리 페렌츠는 그런 거 하면 안 돼.’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들의 첫 번째 꿈을 순식간에 밟아버리는 흉악한 아비가 되는 거니까.
“공작 대리 말고도 멋진 건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우리 페렌츠가 될 수 있는 건 많아.”
“웅!”
덕분에 이런 뻔하고 의례적인 말로 상황을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이가 이상한 길로 갈 것 같다면 다른 길도 잔뜩 보여주자. 공작 대리라는 귀찮고 힘든 일 말고, 적당히 부와 명예를 누리며 백수로 지낼 수 있는 길을.
대충 영지를 가지고 떵떵거리는 백작이면 세상 살기에는 충분해.
“…그런데 페렌츠.”
“웅?”
“엄마는 어디 있니?”
“빼로니까!”
내 질문에 페렌츠는 해맑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한테는 아들을 내세워서 멘탈 공격을 한 주제에, 자기는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그럼 아빠랑 엄마랑 같이 케이크 나눠 먹을까?”
“와!”
기뻐하는 페렌츠를 품에 안으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한테 입술 당기기 형벌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거늘. 먼저 일선을 넘은 건 너다, 에르제베트 크라시우스.
남자가 한을 품으면 겨울에도 눈이 녹아내리는 법이다.
세르베트 공작령의 핵심 귀족들과 가족들에게 공작 대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한 후. 최종적으로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황제도 작년 초부터 트릭시의 은퇴와 내 대리 등극을 알고 있던 사람이지만, 모든 준비가 끝났다면 다시 말하는 것이 도리지.
“─하여, 2월 중순 즈음에 트릭시가 세르베트 공작위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소신은 은퇴와 동시에 공작 대리가 될 것이며, 이를 위한 축하 연회는 3월 정도에 진행할 듯합니다.”
“그런가.”
또한 무려 공작위, 공작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통신구가 아닌 대면 보고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덕분에 추운 겨울임에도 번거롭게 태양전까지 왔어.
“이거 참.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어. 벌써 백작이 공작 대리로 오르는 날이 올 줄이야.”
아무튼 내 보고에 황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흘렸다.
망할 놈. 이게 그렇게 기뻐할 일이냐. 약 100년 동안 제국의 기둥으로 군림한 공작이 물러나고, 공작가가 아닌 다른 가문의 일원이 대리가 되는 건데.
“그보다 대리인이 되면 대리하는 작위를 미들네임으로 가지게 됐었지? 2월부터는 칼 세르베트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이라 해야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에 성도 붙여주십시오.”
“호오, 정말로 원하나?”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단순히 공문서나 공식 석상에서 ‘성’을 붙이는 것보다 더한 일이 터질 것 같아.
“…제가 훗날 주 앞에 선다면 성 칼이라 불리겠지만, 지금은 폐하 앞에 있습니다.”
“백작의 뜻이 그렇다면야.”
직감에 굴복하여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100%다. 이거 숙이지 않고 달렸으면 바로 후회했어.
“어쨌든 짐도 이 사태가 아직 당황스러울 따름이나, 이왕 이렇게 된 거 후회를 남기지 말고 열심히 하게. 딸 앞에 꽃길이 펼쳐질지, 가시밭길이 펼쳐질지는 백작의 손에 달렸으니까.”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고의로 실수만 연발하지는 말고. 전임자가 너무 유능해도 비교 당하는 게 두렵다만, 무능해도 이어받는 입장에서는 골치야.”
“그 또한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브노만의 충고라 무엇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황제는 상황이라는 미친 능력자의 후임이 되었고, 상황은 암군 연타석의 뒤를 이었지. 극과 극인 리브노만과 달리 유능과 무능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내 최우선 과제다.
그래야 차기 공작이 될 마리아가 편할 테니. 전임자와 과하게 비교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전임자가 저지른 참사를 수습할 필요도 없는 공작.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참. 짐이 여름 즈음에 만든 선물이 있다네. 마침 백작이 온 김에 지금 주는 것이 좋겠군.”
“예?”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되려던 찰나. 갑자기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흠, 여기 어디에 뒀었는데.”
그러고는 한참이나 서랍을 뒤적거렸고,
“여기 있군.”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하나 꺼냈다.
불안하다. 저놈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면 절대 정상적인 물건이 아니다. 그것도 여름부터 묵혀두었던 선물이라니. 대체 어떤 한 방을 날리려고.
“자, 받게나. 원래는 공작 대리가 될 때 줄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황송, 하옵니다.”
그래도 황제가 친히 건네는 물건을 보지도 않고 버릴 수는 없는 일.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황제가 건넨 두루마리를 받았다.
다행히 크기는 작았다. 적어도 두루마리에 괴랄한 내용이 가득하다는 건 아니다.
‘문장?’
그저 글자 대신 딱 하나의 문장만이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었다.
검은 늑대가 포효하고, 늑대의 뒤에 검과 지팡이가 X자로 교차되어 있는 문장이.
“저, 폐하. 이게 무엇인지요? 소신이 문장학에 해박한 것이 아니라, 이런 문장은 처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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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가문이나 단체의 상징이다. 즉 문장에 능통하다는 것은 타 집단과의 관계 형성에 능통하다는 뜻이니, 나 같은 감찰 공무원보다 외교 공무원들이 해박하다.
물론 나도 감찰부장에 등극한 이후로 어지간한 주요 가문, 전통 있는 가문의 문장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그런 나조차 처음 보는 문장이라는 게 문제지.
“처음 볼만하네. 방금 말한 것처럼 짐이 여름에 만든 선물이니까.”
픽 웃음을 흘린 황제는 손가락을 뻗어 문장을 짚었다.
“늑대는 북방에 위엄을 떨치는 중인 백작을 나타내고, 검은 대륙 제일 검의 권위를 의미하지. 지팡이는 말하지 않아도 알 터.”
‘이런 씹.’
친절한 설명에 바로 문장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 내 문장이었다. 가문이나 단체의 문장이 아닌, 내 개인 문장이었어.
“아무리 대리여도 공작의 권한을 행사하는 귀족일세. 황실과 다른 공작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백작 위에 설 수 없어. 그렇다면 개인 문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황제와 5공작을 제외하면 제국 내에서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개인 문장.
그 미친 권위와 명예가 내 손에 들어왔다.
“폐, 폐하. 소신에게는 과분한 영광이옵니다. 부디 거두어주소서!”
“거두어달라니. 짐이 선물이라고 해서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 어깨에 황제의 손이 얹어졌다.
“백작에게는 선택권이 없네.”
그리고 손보다도 무거운 말이 어깨를 짓눌렀다.
망할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