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89)
로판 속 공무원 989화(990/1009)
아우구스트 숙부가 ‘이때까지만 오면 된다.’ 라고 알려준 시간은 대충 이른 점심.
허나 우리 가족은 아침부터 데아스트 백작가로 갈 준비를 했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우리 삼남매, 부인들, 제수들, 아이들과 조카들까지 합치면 상당한 대가족이니, 미리 가서 자리를 채워주는 게 연회 주최자 입장에서 안심이 될 거라는 명분이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연회를 여실 때도 막내 고모를 제외하면 아우구스트 숙부가 가장 먼저 왔었지. 그렇기에 아버지도 제일 먼저 자리를 빛내고 싶다 하셨으니, 졸지에 아침부터 대이동을 하게 됐다.
‘오랜만에 아침 바람 좀 쐬겠네.’
그렇다고 아버지의 결단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다.
우리 가족이 20명을 가뿐히 넘는 대가족이라는 걸 감안하면 남들보다 늦게 입장하는 것보다 먼저 입장하는 게 옳다. 갑자기 20여 명이 우르르 몰려오면 다른 친척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잖아.
또한 아버지는 칠남매의 맏이. 비록 연회 책임자는 아우구스트 숙부지만, 동생의 긴장을 위해 옆을 지켜주는 건 아름다운 행동이다. 이를 응원하면 응원했지 반대할 생각은 없다.
“압빠. 진쨔 우리만가? 가치 가는거 아냐?”
그렇게 저택을 떠나기 직전. 페디의 물음에 픽 웃음을 흘렸다.
“응. 오늘은 사람들만 모이기로 했어. 동물 친구들은 같이 못 가.”
페디가 같이 가기를 원하는 건 티티와 성수들, 마네, 미네, 주니 같은 애완동물들이다. 우리 아이들의 영원한 친구 겸 장난감이니 같이 놀러 가기를 바라는 것.
하지만 그건 곤란하다. 안 그래도 크라시우스 가문 전원이 모이는 자리라 다소 북적거릴 텐데, 거기에 말하는 짐승들까지 투입된다? 그것도 평범한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 말이나 사슴, 양, 곰, 호랑이 등등이 포함된 기묘한 조합이야?
언젠가는 데려가도 되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원활한 연회를 위해서는 참아야 돼.
“그럼 리씨안느는? 리씨아느는 동물 아니자나.”
‘아.’
논리적이고도 철학적인 의문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네. 리시안느가 사람이냐, 동물이냐를 따진다면 사람에 가까운 존재기는 하다. 비록 여러 의미로 사람에서 벗어난 존재지만 동물은 확실하게 아니다.
사람도 동물의 일종이다, 같은 생물과학적인 이야기는 필요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동물은 과학적인 동물이 아니라 관념적인 동물이니.
“…리시안느만 같이 가면 다른 애들이 부러워할 거야. 그럼 리시안느가 많이 미안해하겠지? 그러니까 리시안느도 두고 가자.”
덕분에 ‘리시안느도 사실 동물이었다고 말하기 vs 리시안느를 두고 갈 명분 만들기’ 중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전자를 택하면 어린아이 특유의 호기심에 휘말릴 미래가 보였다. 대충 후자로 마무리 짓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다.
“웅! 리씨안느도 두고갈게!”
‘됐다.’
이윽고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페디의 모습에 안도했다. 다행히 후자가 먹혔어.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건 순발력과 변명 실력밖에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이게 아비의 숙명이라면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럼 우리 페디. 슬슬 숙부님 뵈러 갈까?”
“웅!”
슬쩍 페디를 품에 안자 페디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게도 페디는 아우구스트 숙부를 비롯한 친척 어른들을 좋아한다. 직접 뵌 건 딱 한 번뿐이지만 그 한 번의 만남에서 다들 페디를 귀여워해 주셨으니까.
물론 페디 말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당시에 너무 어렸거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어쩔 수 없어도, 당시의 기억이 있는 아이들은 숙부를 보러 간다는 말에 좋아했을 정도지.
‘아이들만 밝아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마음의 벽을 무너뜨린 칠남매. 어른들을 좋아해서 해맑게 웃고 다닐 아이들.
이제 나랑 에리히 같은 크라시우스 2세대들만 서로 친해지면 된다.
아침부터 행차한 아버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동생의 초대를 받고 왔다. 혹시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나?”
“각하께서 가장 먼저 오셨습니다!”
“그런가.”
저 멀리서 20명이 넘는 인원이 우르르 몰려오자 황급히 정문까지 달려온 데아스트 백작가의 집사장.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와중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버지의 물음에 완벽한 직각을 그리며 허리를 숙였다. 너무 완벽한 직각이라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야.
“가주님과 부군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괜찮다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도 한때 영주였기에 집사장이 누구보다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만 말해주도록.”
“아닙니다, 각하! 집사장의 업무 중 하나가 귀빈을 주인께 안내해 드리는 것인데, 어찌 바쁘다는 이유로 의무를 저버리겠습니까!”
“흐음. 그렇다면야.”
어딘가 절박함까지 느껴지는 외침에 아버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도 아실 거다. 집사장이 허리의 유연함을 과시하면서도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주의 아주버님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보다 더한 존재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그, 리고 마종공 각하─”
“오늘은 세르베트 공작이 아닌 크라시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온 것이란다. 편히 백작부인이라 불러주렴.”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90도를 넘어 120도를 향해 달려가는 허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트릭시는 편히 부르라고 했지만 정말로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부모님도 트릭시를 온전한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지 않나. 오늘 처음 보는 집사장은 말할 것도 없지.
그래도 트릭시 말처럼 이 자리는 세르베트 공작이 아닌 현 크라시우스 가주의 부인으로서 행차한 거다. 흔히 말하는 배분을 따지면 친척 어른들보다 트릭시가 다소 아래니, 집사장에게 주의를 주는 건 필요한 절차다.
‘공작의 동생도 있는데.’
무심코 마르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사실 마르도 어디 가면 만인의 경배를 받는 핏줄이거늘. 바로 옆에 현직 공작(100년 집권)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약자가 돼버렸어.
‘조만간 은퇴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몇 주 후면 트릭시는 세르베트 공작위에서 완전히 내려온다.
전직 공작도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나, 현직보다는 전직이 심적으로 편한 법. 그때가 되면 친척 어른들도 트릭시를 편히 대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
집사장의 안내를 받아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가족의 선두에는 내가 서게 됐다. 분명 현 크라시우스 가주는 칼이지만, 이런 일에는 가장 큰어른인 내가 나서야 한다며 뒤로 물러났지.
세심한 배려에 고마우면서도 민망했다. 다른 귀족들은 아직도 현역인 나이에 은퇴를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니까. 내가 여전히 가주였다면 칼이 이 아비를 위해 마음을 쓸 필요도, 가주면서 뒤로 물러날 필요도 없었을 터.
‘폐하의 뜻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
허나 내 은퇴는 상황 폐하의 뜻이었다. 그것도 현 황제 폐하의 굳건한 기반과 통치를 위한 뜻. 그 고귀하신 뜻을 어찌 거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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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그렇게 민망함을 견디며 대연회장에 도착하니 아우구스트가 반겨주었다.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 제수, 내 조카로 추정되는 아이들과 함께.
‘아이라고 하기에는 장성했나.’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아우구스트에게 다가갔다.
칼의 저택에서 연회를 개최했던 이후로는 통신구를 통해 얼굴을 본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제국 중부, 아우구스트는 동부에 있기에 둘만의 약속을 잡기도 애매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직접 대면을 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20년도 참은 우리가 고작 수개월 만의 만남에 반가워하고 있어.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저야 언제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부인이 더 바쁘지요.”
“당당하게 말할 내용은 아니구나.”
아우구스트와 작게 포옹을 나눈 후, 이번에는 제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수씨가 참으로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저 사람이 말만 저렇게 하지, 가문을 위해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허어, 그렇습니까?”
짐작하고 있던 대답이지만 최대한 놀란 시늉을 했다.
아우구스트의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부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혼자서 놀 성격은 절대 아니라는걸. 그저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애써 농담을 꺼냈을 뿐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의 긴장을 풀기 위한 말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였으나 생각보다 안색이 평온했으니, 굳이 다 큰 동생을 위해 형이 나설 수준은 아니었다.
내가 배려해야 할 사람은 아우구스트와 제수 뒤에 있는 세 조카들. 지금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녀석들이다.
“처음 보는구나. 너희 큰아버지인 빌헬름이라고 한단다.”
그렇기에 제수와도 인사를 나누고 조카들에게 다가갔다.
“카, 카롤리나 데아스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큰아버지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런.’
세 조카 중 맏이로 보이는 아이의 대답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몸도 뻣뻣하고 말투도 딱딱한 것이 툭 건드리며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다.
“그래. 나도 영광이다.”
하여 최대한 빠르게 첫 번째 조카, 카롤리나를 지나쳤다. 괜히 오래 대화를 나누면 과호흡이 올지도 모르겠어.
“요한 데아스트입니다, 큰아버지.”
“모리스 데아스트라고 합니다.”
그나마 둘째와 셋째는 말을 더듬지 않았지만 신병과도 같은 부동자세를 보였다.
예상한 광경이지만 조금은 서운했다. 이것이 어찌 큰아버지와 조카가 보일 모습이란 말인가.
‘음?’
그러나 서운함은 두 조카의 눈을 보자마자 빠르게 녹아내렸다.
내가 아닌 묘하게 뒤편으로 향한 시선. 존경과 공포, 선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오묘한 눈빛.
‘허어.’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기에 절로 흐뭇해졌다.
사촌에게 향할 감정으로는 다소 기이한 감정이나, 그래도 처음 보는 상대를 향한 호감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
카롤리나 누님, 요한 형님과 나란히 서서 친척들을 반겼다.
살면서 처음 보는 친척. 아버지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기에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친척.
‘와.’
특히 내 또래 귀족들 중에서는 전설과 같은 친척의 등장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감찰성 장관이자 전쟁영웅인 그 사람이야.
‘저렇게 생겼구나.’
분명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묘하게 친숙함이 느껴지는 외견이다.
아무래도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하지?’
곤란하다. 긴장감이 몸을 잡아먹어서 입에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실수로 진짜 청탁을 입에 담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