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91)
로판 속 공무원 991화(992/1009)
22명의 2세대 중에서 장래 희망을 대답한 건 7명뿐이었다.
하지만 22명 중 셋은 나와 에리히, 테레사니 제외해야 하며, 아직 아카데미 졸업은커녕 입학도 하지 못한 사촌들도 제법 있는 편이다. 그러니 7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 오히려 귀족가 자제들치고는 많은 편이라고 봐야 한다.
‘6명은 작위 계승이 확실한 입장이기도 하고.’
게다가 사고만 안 치면 작위를 계승할 수 있는 가문의 맏이, 혹은 장손. 그런 입장이라면 장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가문과 영지 관리 업무로도 바쁜데 관직까지 노리는 건 어지간한 워커 홀릭으로는 불가능하지 않겠나.
사실 나도 제국백 가문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비공무원으로 살아갈 팔자였는데 말이지. 제국백에서 제국만 빠지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들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노력과 충성심을 갖춘 귀족에게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쓴웃음이 나올 뻔한 걸 황급히 억누르며 사촌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의 길을 택한 건 모리스 하나, 행정부 공무원을 꿈꾸는 건 넷, 사법부 진출을 희망하는 건 둘. 아주 밸런스 넘치는 장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딱 좋아.’
심지어 제국군, 행정부, 사법부─ 셋 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라 다행이다.
제국군은 전승공이 있으니 은근한 청탁이 가능하고,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으며, 사법부는 저번 사법계 감찰 이후로 어느 정도 발언권이 생겼다. 당장 사법성 장관만 해도 내가 슬쩍 말을 꺼내면 진지하고 적극적인 검토를 할 테니까.
만족스럽다. 사촌 동생들을 훌륭하게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형이 될 수 있겠어.
“꿈이 변치 않는다면 형으로서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저도 가주셨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니, 저 또한 가주로서 동생들을 보듬어야지요.”
“아, 아닙니다! 형님 같은 사촌이 있는 걸로도 자랑스러운데, 어찌 사사로운 도움까지 받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렇게 응원을 받는 것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내 말에 장래 희망을 밝힌 동생들은 고개와 손을 열정적으로 내저으며 겸양을 표했다.
저 말을 듣고 ‘그럼 응원만 할게.’ 라고 넘어가는 건 인성 파탄자나 마찬가지다. 이 세계가 철저히 시험만으로 공무원이 되는 21세기라면 모를까, 인맥의 천거와 혈육의 비호가 당연한 신분제 사회다. 오히려 자기 혈육을 너무 냉철하게 대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구설수에 오를 일.
물론 그 혈육에게 심각한 하자가 있다면 예외지만. 아무리 혈연과 인맥이 작용해도 무능하고 흉포한 놈은 좀.
“그거 참 서운한 말씀입니다. 제 직책이 직책이라 불의를 눈감아줄 수는 없지만, 친척에게 기회를 줄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에리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이 녀석도 제가 살짝 밀어주니 훨훨 날아올랐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형의 후광 덕에 성공했다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리를 차지했다고 욕하지는 않습니다.”
내 후광을 보더라도 감히 욕할 사람은 없다는 말. 동시에 내가 주는 것은 작은 기회지, 그걸 살려서 출세하는 건 개인의 노력이라는 말.
실로 적절한 발언이라 내가 다 흡족스러울 정도다. 이렇게 말하면 동생들도 더 거절하지는 못할 테니.
Z2dKbDJFSCtSbEo3WFlpUEN0eDQxV2d6elBWU2R2WDZONGRNR0dFUHFaeG5iRkJPaVlMUlRIaERtaCtNcnJ1aw
“…….”
다만 예시가 된 에리히가 침묵을 고수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 눈치 없는 놈. 여기서 너도 적극적으로 동의해야 설득력이 더 높아지잖아. 침묵이 동의가 되는 경우도 있다만, 지금은 입을 여는 것이 적절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형님의 과분한 도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형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
사촌들을 대표하여 다부지게 말하는 모리스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내 추천장을 받거나 지지 약속을 듣고 허리를 숙인 사람들은 많았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만 해도 두 자릿수의 인재를 파밍했으며, 감옥에 있거나 타국 출장을 나갔을 때도 인재를 발굴했었지.
허나 혈육에게 이런 극진한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처음이다. 내 덕을 본 혈육이라고는 에리히가 유일한데, 저놈은 형 덕에 명예로운 제국의회 의원도 되고 후작위도 얻었으면서 고마운 줄을 모르더라.
그런 내 앞에 감사할 줄 알고 성품도 괜찮은 것 같은 사촌이 나타났다. 에리히 따위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인 혈육이 등장했다.
‘이건 못 참지.’
육아 휴직을 기간 동안 희미해지고 있던 파밍 본능이 다시 눈을 떴다.
마침 유일한 제국군 지망생이라 밀어주기도 편하다. 다른 동생들은 넷과 둘이 나눠가질 기회를 홀로 독식할 수 있다.
“모리스 동생. 제국군을 지망한다고 했었지요?”
“아, 예.”
“혹시 동생이 괜찮다면.”
모리스에게 제안을 하나 하려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말을 하는 게 옳은 걸까? 괜히 모리스에게 부담을 주거나, 수치심을 주는 건 아닐까?
‘하자.’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모리스의 자유다. 그러니 제안 자체는 확실하게 해야 돼.
“사관학교가 개교 되면 1기 입학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것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청년에게 다시 학교에 입학해 보라는 제안일지라도.
몇 살 어린 동급생들과 함께 학창 생활을 보내야 하는 것이라도.
“형, 미쳤어?”
“조용히 해.”
침묵을 지키던 에리히의 난입에 단호히 선을 그었다.
나도 좀 미친 발언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모리스가 진심으로 제국군의 길을 노린다면 이보다 좋은 루트도 없어.
사관학교는 전승공이 자신의 라스트 댄스로 여기는 프로젝트다. 진짜 라스트 댄스가 되느냐 아니냐와 별개로 1기 입학생들을 결코 허술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며, 군에 대한 열망으로 학교를 두 번이나 입학한 모리스를 기특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관학교라는 개념이 등장한다면 이르든 느리든 군의 중추는 사관학교 출신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다. 이건 내가 잠시 다녀왔던 세계의 역사가 증명해.
‘이 정도면 최소 군단장이다.’
내 친척, 전승공의 총애, 사관학교 1기 생도, 그중에서도 (아마)가장 연장자. 이런 타이틀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면 최소가 군단장이다. 능력이 있으면 그 이상, 운도 따르면 더 위를 노릴 수 있다.
“물론 강요는 아닙니다. 다만 고난을 감수하며 택할 가치는 있다, 그것만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명심… 하겠습니다.”
내 말에 모리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사관학교 개교까지는 수 년 정도가 남았으니 느긋하게 생각하면 될 거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음식과 술, 주스 덕분에 대화하는 틈틈이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다 숙부, 고모들 사이에 있던 아버지가 슬쩍 구석으로 빠지는 것이 보여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1세대끼리는 잘 놀고 계신지 확인 정도는 해봐야지.
“아버지.”
“칼?”
내 부름에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사촌들하고 있지 않고 왜 여기로 왔느냐.”
“다들 저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자리 좀 비켜줬습니다. 제가 없어야 서로 이야기할 것 같아서요.”
즉석으로 만들어낸 핑계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서로 처음 보는 사촌들이 전부 나만 보고 있다? 그러면 다른 집안 사촌들끼리는 대화할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다. 가주 겸 연장자가 버티고 있으니 자연스레 벌어진 참사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향했고, 에리히는 3세대와 놀고 있는 테레사를 챙기라는 명분으로 방출했다. 이제 나도 에리히도 없으니 다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을까?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고맙다.”
아버지도 이 세심한 배려에 감동하셨는지 가볍게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맏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주가 아닌 맏이라는 단어를 쓰자 입꼬리까지 희미하게 올라갔다.
역시 권위보다 가족의 정을 내세우는 게 정답이었다. 이런 사소한 단어 선택으로 효자가 되는 거지.
“헌데 아버지는 왜 여기 계신 겁니까? 혹시 찾는 음식이라도 있으십니까?”
“민망해서 잠깐 빠져나왔다. 우리 남매 중에 은퇴한 건 나밖에 없었지. 다들 현역이거나 후계자를 내조하고 있어.”
‘아.’
생각 이상으로 애잔한 사유라 탄식이 터져 나올 뻔했다.
남매 중에서 혼자 백수라 탈출했다니. 단순히 문장만 보면 못난 맏이가 부담감에 도망친 것 같잖아. 이미 이룰 건 다 이루어서 명예롭게 은퇴한 분인데.
“몇 년 후면 충용무쌍한 제국군을 위해 다시금 헌신하시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자유를 즐기시는 거니, 민망할 게 있겠습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이 따르지 않아서 문제지. 익숙해질 즈음이 되면 교관 일을 시작할 것 같아.”
그 말에 나도 아버지도 웃음을 흘렸다.
겨우 백수 생활에 익숙해지자마자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라. 그걸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모리스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더구나.”
“아, 들으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들었다. 이 아비가 너만은 못해도 나름 무인이지 않더냐. 그럭저럭 귀가 밝은 편이다.”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텐데, 괜히 아버지의 속을 복잡하게 한 건 아닐지.”
그러자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셨다. 딱히 불편할 것 없는 말이라는 것처럼.
“모리스가 단순히 할 게 없어서 군인의 길을 택한 것이라면 네 제안은 독이다. 허나 진심으로 군인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일생에 두 번 없을 조언이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습니까?”
“그래. 사관학교 졸업생이 나오기 시작하고 10년. 늦어도 10년이면 군의 중추는 사관학교 출신이 될 테니.”
아버지도 나와 같은 의견이라는 뜻이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귀족의 생태나 군의 분위기는 나보다 아버지가 더 잘 아신다. 그런 아버지도 이리 자신 있게 말씀하신다면 그게 옳을 터.
“게다가 모리스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챙겨주고,이 아비가 해야 할 일은 네가 다 하는구나.다시 말하는 거지만 고맙다.”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아버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평소에 감정 표현을 능숙하게 하는 분이 아니거늘. 이 연회 덕분에 좋은 광경을 보게 됐다.
“참, 아버지.”
“왜 그러느냐?”
“제가 대리가 되는 거. 언제쯤 말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버지의 미소가 잠깐 굳었다.
“…일단 연회부터 즐기고 생각하자꾸나.”
“아, 예.”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 굳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