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93)
로판 속 공무원 993화(994/1009)
이 자리에 없는 누런 머리 짐승이 연회장을 뒤집어 놓았다.
나한테 있어서는 천하에 둘이나 있으면 안 될 추악한 놈이지만, 대다수 귀족들과 평민들에게는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가문의 경사를 축하한다며 친히 선물을 보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그것도 마차 여러 개를 가득 채워서. 황제가 하사하는 거라면 평범한 장신구도 감지덕지인데, 질은 물론 양도 신경 써서.
‘망할 새끼.’
차라리 깃발 하나만 보냈다면 순도 100% 티배깅으로 인식해 항의를 했을 거다. 당장 깃발을 들고 달려가서 깃대로 황궁 하늘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깃발은 수많은 선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깃발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항의를 한다? 나만 쪼잔하고 이상한 놈이 되는 거야. 그건 곤란해.
“허어. 정말 처음 보는 문장이로군.”
“둘째 형님도 모를 정도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뮤노 이전의 문장일 수도 있겠군요.”
“뮤노 이전이라. 확실히 당시에는 불타버린 기록이 많아서 우리가 모를 수도 있지.”
“그럼 폐하께서는 이 문장을 어찌 알고 보내신 겁니까?”
“최근 다니스 인근에서 공사를 시작했잖니. 거기서 뮤노 건국 시기 유물이라도 나온 거겠지.”
그렇게 착잡한 속을 달래는 사이. 집사장이 가지고 온 깃발을 보며 1세대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숙부와 고모들, 숙모와 고모부들까지. 진실을 알고 있어서 침묵 중인 부모님을 제외하면 전부 머리를 맞대며 깃발─ 정확히는 문장의 정체를 추리하기 바빴다.
그리고 어른들이 술렁거리자 2세대들도 문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려 황제가 선물로 보낸 하사품이자 귀족 사회에 능통한 어른들도 모르는 문장. 나름 머리가 굵어진 일부 2세대 입장에서는 흥미롭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오라버니. 혹시 저 문장에 대해 아시는 거 있나요?”
“어, 예?”
하지만 카롤리나의 화살이 나에게 날아와 잠깐 당황하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폐하께 큰 신뢰를 받는 분이잖아요. 그러니 폐하께서 저희의 경사를 축하하며 선물을 보내신 거겠고, 오라버니와 연이 있는 걸 보내시지 않았을까요?”
‘논리적이네.’
참으로 현명하고 완벽한 질문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역시 나와 에리히를 제외하면 2세대 중 최연장자인 인재답다. 차기 데아스트 백작가 가주다운 통찰력이기도 하고.
원활한 군신 관계가 중요해도 황제가 모든 귀족 가문의 경사를 하나하나 챙기지는 않는다. 즉 이 깃발을 포함한 모든 선물은 나에게 주는 선물과 마찬가지니, 정체불명의 문장 또한 나와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다.
실제로도 나와 관련된 문장이니 당장이라도 설명할 수 있다. 저 문장의 정체를 밝히고, 친척들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다만 의문을 풀자마자 충격에 휩싸일 거라는 게 문제다.
아니, 물론 공작 대리에 등극할 예정이라는 건 말할 생각이었지. 부모님과도 ‘마지막 날에 말하자.’ 라고 합의를 봤잖아.
그래도 내가 판을 주도해서 말하는 것과 남에게 등이 떠밀려 말하는 건 별개다. 아직 분위기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냅다 폭탄을 터뜨리면 충격 분산이 어려워.
‘망할 새끼.’
그렇기에 속으로 다시 한번 황제를 씹었다.
조만간 그놈 찻잎통에 보드카라도 몇 방울 넣어야겠다. 그리고 황후한테 ‘이 새끼 몰래 술 처마셨어요!’ 라고 고발해야지. 이상적인 군신 관계라면 받은 만큼 돌려줘야 예의인 법이니.
인내 중인 사람 앞에 함정을 설치하는 건 추한 행위지만 먼저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건 그 새끼다. 상대가 추하다면 나도 추하게 나오리.
“카롤리나 말이 맞군요. 조카님이라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고 있으니, 카롤리나의 말을 들은 1세대와 2세대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해맑고 순수한 3세대들만이 이 폭풍전야 속에서 해맑게 뛰어놀 뿐이었다.
“예, 저도 최근에 알게 된 문장입니다. 저와 폐하, 그리고 극소수의 신하들밖에 모르는 문장이지요.”
그 순수한 광경에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랜 후, 최대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극소수만이 아는 문장이라. 상당히 귀하고도 역사적인 문장인 모양이군요.”
틀린 말은 아니라 쓴웃음이 나왔다.
일개 제국백 나부랭이가 공작 대리라는 중책에 올라서 얻게 된 개인 문장. 이 얼마나 역사적인 문장일까. 크펠로펜 역사상 두 번 나올 것 같지는 않아.
“예. 역사적인 문장이기는 합니다.”
아무튼 크리스틴 숙모에게 다가가 깃발을 건네받았다.
밝히기로 했다면,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시간을 길게 끌 필요가 없다. 차라리 빨리 때려야 회복도 빠르게 되지 않겠나.
“허나 과거에 묻힌 문장이 다시금 세상에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옵서 친히 만드신 경이로운 문장이지요.”
“폐하께옵서 친히… 말입니까?”
이번에는 대답 대신에 깃발을 망토처럼 둘렀다.그러고는 뒤를 돌아 문장을 친척들에게 과시했다.
포효하는 검은 늑대와 그 뒤로 교차된 검과 지팡이. 북방 파벌의 수장인 나와 대륙 제일 검인 나, 대륙 제일 마법사의 부군인 나를 상징하는 문장을.
“황송하옵게도 우둔하고 미천한 저를 위하여 친히 만드시고 하사하신 문장입니다.”
이 제국에서 오직 황제와 5공작만이 가질 수 있는 개인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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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신 나간 선언에 연회장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몸을 돌린 상태라 다행이다. 친척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안 봐도 되니까.
“저, 조카님?”
“말씀하십시오, 숙부님.”
그래도 아우구스트 숙부가 말을 거는데 여전히 등으로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 조심스레 몸을 돌리자 넋이 나간 친척들이 보였다.
“혹시 크라시우스 가문의 문장을 새로 하사받으신 겁니까?”
‘아.’
어딘가 절박함이 느껴지는 물음에 꾹 입을 닫고 말았다.
솔직히 그게 합리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일개 제국백 나부랭이가 개인 문장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문의 문장을 하사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설득력 있잖아.
이미 300년 동안 사용한 역사가 있는데 갑자기 바꾼다? 이 또한 말이 안 되지만 제국백의 개인 문장보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흔한 건 아니지만 역사에 남을 공을 세운 귀족이 나타나면 그 공을 기념하는 문장이 하사되기도 하니.
“그건 아닙니다. 크라시우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어찌 제 대에 바꾸겠습니까.”
순간 ‘가문 문장 맞아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현실 도피를 해봤자 트릭시가 은퇴하면 바로 들킬 발악에 불과하다.
“사실, 트릭시가 조만간 공작위에서 물러날 예정입니다.”
그 말에 친척들의 시선이 트릭시에게 쏠렸다.
경악과 당혹감, 현실 부정이 뒤섞인 강렬한 시선으로.
“하지만 아직 5살인 아이가 바로 차기 공작이 되는 건 무리가 많지요. 그러니 마리아가 장성하기 전까지는 제가 공작 대리… 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선은 그대로 나에게 옮겨졌다.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민망할 따름입니다. 허나 제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원활한 공작위 계승을 위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부디 좋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리액션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즉각적인 화답이 돌아왔다면 그게 더 무서웠을 것 같기는 하다.
***
혼이 빠져나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분명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음에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다. 입을 애써 들썩이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소식이다. 울켄 공작이 교체되어 제국이 떠들썩했던 게 작년 일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작이 교체된다고? 그것도 세르베트 공작이?
‘이건 대체.’
예상하지 못한 말이다.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마종공께서는 엘프의 피를 이은 분이다. 이미 100년이 넘게 공작으로 군림하셨지만 최소 200년에서 300년은 더 사실 분. 그러니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당연히 공작으로 계실 줄 알았는데.
심지어 곧장 차기 공작이 등극하지 않고 공작 대리가 중간에 낄 줄은 몰랐다.
‘시조카가 공작 대리.’
무심코 침을 삼켰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너무 조용해서 이 침 삼키는 소리마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 것 같기에.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들 넋이 나가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시조카에게 살가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남편도. 귀중한 조언을 얻은 모리스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 와중에 정체 모를 책임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데아스트 백작가의 가주. 이 연회장을 관리하는 주인. 연회 분위기가 굳어버렸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 의무가 있… 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풀어야 하지? 이 충격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제는 공식적으로 2인자가 되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미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으며 감찰성 장관이자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인 시조카다. 그런 시조카에게 대리라지만 공작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이제 실질적 2인자가 아닌 공식적 2인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전승공 각하와 더불어 황제 폐하의 양옆을 지키는 날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아.’
멍하니 고개를 돌리다가 막내 아가씨 가족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아가씨의 남편 되는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위험했어.’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눈동자를 떨고 있는 모습. 아무래도 재작년에 있었던 사법계 감찰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그 일이 늦게 터졌다면 나르젠 백작가는 공작 대리가 주도하는 감찰을 당했을 터. 가문 자체가 무너졌을 수도 있다. 불과 2년의 차이로 가문의 명운이 갈렸으니 어찌 두렵지 않을까.
“저, 저기, 형님.”
‘모리스?’
덕분에 더더욱 무슨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풀어야 할까 고민하려던 찰나. 놀랍게도 모리스가 침묵을 깼다.
“형님께서 공작 대리에 등극하신다면 실로 축하할 일입니다. 형님의 능력이 능히 공작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라는 말 아닙니까.”
“과분한 말입니다. 트릭시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지요.”
“그런 말씀은 마시지요. 마종공 각하와 카토반의 가신들이 고작 혈연에 눈이 먼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자 시조카는 옅게 미소를 지었고, 내 속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먼저 나서준 건 기특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 이 어미는 너무 불안해.
“헌데 형님. 그, 공작 대리가 되시는 건… 정확히 언제입니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자리에 참석하여 형님께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 시기. 그러고 보니 시기를 말하지 않았군요.”
모리스의 질문에 시조카는 잠시 턱을 매만졌고,
“2…”
“2년 후요? 생각보다 빠듯하군요.”
“2월입니다.”
덤덤한 대답에 모리스의 입이 닫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