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94)
로판 속 공무원 994화(995/1009)
2차 크라시우스 회합은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어느 누런 머리의 난입과 분탕으로 인해 빙하기처럼 분위기가 얼어붙기도 했지만, 에리히 말처럼 내 공작 대리 등극은 축하할 일이면 축하할 일이지 재앙이 아니다. 그저 100년이 넘게 군림한 공작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새로운 공작이 아닌 공작 대리가 채운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지.
그것도 공작 대리가 자신들의 친척이라면 더더욱. 졸지에 제국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존재의 친척이 된 거잖아.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나였어도 꿈인가 싶겠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나였어도 에리히… 는 너무 가까운 혈연이니 넘어가고, 대충 모리스가 공작 대리로 등극한다는 말을 들으면 넋이 나갈 자신이 있다.
아니지. 모리스는 제국군이 될 예정이니 공작이 아니라 대원수 겸 부사령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놀라는 게 당연한 정보 주입이다. 멀쩡하면 어디서 정보가 샌 건가 의심해야 할 수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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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다들 진정한 것 같더구나.”
“그렇습니까?”
그렇게 친척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제도로 복귀하자 아버지가 덤덤히 입을 여셨다.
황제의 분탕과 친척의 깜짝 선언으로 인해 친척들이 혼란에 빠진 건 맞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진정됐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중간에 터진 게 나았나?’
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계획은 적절하게 분위기를 조성하여 연회 마지막에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연회 중간에 밝힌 것이 맞았던 것 같다.냅다 폭탄을 터뜨리고 튀는 것보다는 터뜨린 파편을 같이 수습하는 게 맞으니까.
물론 동의 없이 폭탄을 터뜨린 황제에게 고맙다는 건 아니다. 그 새끼는 망할 새끼가 맞아. 빌어먹을 누렁이 같으니라고.
“다만 은퇴식이 2월인 점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선물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빠듯하지 않더냐.”
“친척들이 자리를 빛내주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입니다. 참석 자체가 선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다른 선물을 바라겠습니까.”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말 빈손으로 축하할 수는 없지. 너는 둘째 숙모가 은퇴를 하고 카롤리나가 백작이 된다면 빈손으로 축하할 수 있겠느냐?”
빈말로라도 그렇다고 할 수 없었기에 어색히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당사자가 진심을 담아 괜찮다고 해도 듣는 사람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어찌 친척의 경사에 박수를 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나. 내가 본 1세대 크라시우스, 2세대 크라시우스들은 그럴 성품이 아니다.
설령 그럴 성품이더라도 귀족은 체면을 중시하는 존재. 친척의 경사에 빈손으로 찾아온다면 금방 소문이 퍼지고, 소문이 퍼지면 뻔뻔하거나 빈곤한 귀족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그건 죽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지.
‘작년에 말할 걸 그랬나.’
친척들의 부담감을 떠올리니 자괴감과 미안함이 솟구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악의 선택은 트릭시의 은퇴와 공작 대리 등극을 함구하여 친척들도 모르게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친척들을 무시하고 불신한다는 이미지를 줄 테니, 친척들의 입지에 상당한 충격을 주는 일.
하지만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보를 공유한 건 잘 쳐줘야 차선 정도에 불과했다. 어차피 말할 거라면 늦어도 작년 말 정도에는 해야 됐는데. 여러 의미로 정신이 없어서 최선을 놓치고 말았어.
“이거 좋게 만났다고 짐만 얹어주고 헤어진 것 같아 민망합니다.”
“민망한 만큼 더 잘해주면 된다. 그 녀석들의 고민은 길어야 몇 주지만, 네가 친척들을 보듬는 건 수십 년이나 가능한 일이니.”
“명심하겠습니다.”
어깨를 토닥이는 아버지의 말씀에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크라시우스 일족을 보듬을 것 같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나 스스로가 동화에 나오는 신선이나 드래곤이 된 기분이니까.
“…아, 형.”
“왜.”
“나도 선물 보내야 돼?”
그 말에 에리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물, 선물이라. 다른 사람도 아닌 에리히의 선물.
…
“굳이?”
“그렇지?”
짧은 고민 끝에 단호히 거절했다.
적당히 가깝지만 적당히 먼 친척들의 선물은 받아도, 같은 동네에 사는 가족의 선물까지 받는 건 좀 그렇다.결혼식 축의금도 멀리서 온 친척들한테 받지 부모나 남매한테 받지는 않는 것처럼.
“그냥 은퇴식 직전에 의원들이랑 축사라도 써 놔. 비밀로 하는 건 잊지 말고.”
그러니 에리히에게는 딱 그 정도만 요구했다.
제국의회의 총의를 담은 축사. 100년 동안 공작의 짐을 짊어진 트릭시를 칭송하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리로 활동할 나에 대한 격려와 응원의 문구.
딱 그 정도만 받으면 충분하다.
날이 밝자마자 태양전으로 달려갔다.마침 당장이라도 황제한테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었는데, 자기가 먼저 얼굴 좀 보자고 부르더라.
망할 새끼. 네가 황제면 내가 못 팰 줄 알고?
“음. 백작 왔는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당연히 못 팬다. 주먹 한 번만 내지르면 누런 머리가 뻘건 머리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만, 나도 칼 크라시우스에서 칼/크라시우스로 퇴화할 가능성이 높으니.
진짜 기회가 오면 작위 떼고 정정당당하게 붙어 보고 싶다. 황제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고 하니, 하늘을 베는 검사 정도가 되면 황제를 팰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아님 말고.
“이리 빠르게 와줘서 고맙군. 짐의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폐하께옵서 하사하신 선물은 소신이 아닌 데아스트 백작가에게 향한 것 아닙니까. 어찌 소신이 마음에 들고 말고를 논하겠습니까.”
“하하, 그랬었지. 짐이 잠시 잊고 있었네.”
전혀 잊지 않은 얼굴이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추궁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저놈이 일개 1황자였던 시절이 자연스럽게 팰 수 있던 마지막 기회 아니었을까? 그때 내가 북방에 있던 것이 유일한 한이야.
“폐─”
“크라시우스 가문의 비극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었어.”
이윽고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래서 내 문장을 왜 데아스트 백작가로 보낸 겁니까.’ 라고 항의하려고 했으나, 황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전전대 타일글레헨 백작은 실로 유능하고 충직한 신하였지. 무인으로서는 당대에 이름을 날렸고, 지휘관으로서는 능히 일군을 이끌었으며, 영주로서는 영민들에게 공명정대하였으니 말일세. 상황 폐하께서도 전전대 타일글레헨 백작을 기특히 여기셨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스르륵 입을 다물었다.
뭐지. 이놈이 왜 갑자기 남의 조상을 언급하는 거지. 이러면 내가 입을 열기 애매해지잖아.
“그래서 상황 폐하께서는 크라시우스 가문의 사정을 알면서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네. 황실과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신하에게 괜한 말을 하여 사이가 틀어지면 그보다 우스운 일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존귀한 황제여도 귀족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건 이상한 일이고.”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침묵 중임에도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저 말 뒤에는 ‘상황 폐하께서도 남의 사생활을 지적할 분이 아니셨지.’ 라는 한탄이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하여 황실을 수호하는 서른 제국백 가문 중 하나가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여도, 전전대 백작의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독자적으로 행동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네. 그로 인하여 황실을 지키는 방패가 작아져도 어쩌겠나. 상황 폐하께서는 그것조차 감수하시어 침묵을 지키셨고, 짐 또한 그 뜻을 계승하였으니.”
“폐하.”
“헌데 작아졌던 방패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네. 금이 간 방패가 다시 바위처럼 단단해지고 있어.”
작게 미소를 지은 황제는 상석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는 너무도 기쁜 일일세. 황실과 제국, 백성과 천명을 위하여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외면한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거늘, 그 비극이 비로소 희극으로 결말을 내려고 하지. 사실 짐은 갑작스러운 장르 변환은 좋아하지 않으나, 행복한 엔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네.”
어느새 내 어깨에 손까지 얹었다.
“그래서 짐이 갑작스럽게 선물을 보낸 것이야. 크라시우스의 피를 가진 자들이 한곳에 모인 장소에서, 크라시우스 가주의 경사를 알린 것이지. 한 가문의 비극을 방관한 책임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 말에 멍하니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말이다. 내가 항의를 하면 뻔뻔하게 대꾸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구구절절 기괴한 변명을 내뱉을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따지기도 전에 스스로 회개를 하듯이 입을 열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비극에 상황과 황제의 지분도 있다고, 사과를 표하고자 다시금 하나 된 크라시우스에 경사를 전달한 것이라고.
“짐이 성급하고 경솔했다는 건 인정하네. 백작도 다 생각이 있었을 터인데, 짐이 너무 무심했어.”
“아,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옵서 소신의 가문을 이리도 염려하여 주시니 영광스럽고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리 말해주어서 고맙네.”
그 뒤로 이어진 말들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황제가 말하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간간이 황제가 어깨를 토닥이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태양전 밖으로 나갔다.
항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로.
“와…”
새파란 하늘을 보다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내가 저 새끼랑 황제랑 신하 관계로 만나서 진심으로 다행이다.
만약 보이스피싱범과 피해자 관계로 만났다면 전부 털렸을 거다.
‘이제 어쩌지.’
뒤이어 형용할 수 없는 공포심이 몰려왔다.
안 그래도 신분이 깡패라서 이기기 힘든 놈이었는데, 저런 미친 언변과 감정 호소 능력까지 익히기 시작하면 난 어쩌지? 일개 제국백 나부랭이는 무슨 방법으로 황제와 맞서야 한단 말인가.
세상이 너무나 가혹해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