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05
제 105 화
학교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어제와 전혀 딴판이었다. 활기찬 분위기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거기다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향기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평소 같으면 이런 분위기에 어울려 함께 들떴겠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림이 계속 멍하니 걷자 요한이 툭 하고 한마디를 꺼냈다.
“피곤해?”
“응? 어……. 좀 피곤하네.”
유림은 고개를 돌리며 뻣뻣한 목을 풀었다. 그러다 문뜩 요한과 단둘이 있는 것이 꽤 오래간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로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다, 조금 그리운.
“오랜만이다…….”
추억에 젖은 중얼거림에 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냥, 이렇게 있는 거. 너랑 단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그렇네.”
“이게 몇 년 만이야. 8년 만인가? ……진짜 시간 빨리 간다. 그치?”
“그러게. 벌써 스물이라니…….”
“솔직히 난 너희를 다시 못 볼 줄 알았어.”
“작정하고 사라졌으니까.”
“응. 그래서 죽을 때까지 너희하고 이렇게 같이 웃고 떠들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솔직히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신기해.”
유림의 말에 요한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싫어?”
그 어떤 사족도 붙지 않은 정직한 질문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사실 유림에게 있어 요한네들은 작정하고 숨을 만큼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니며, 저를 걱정해 주고 있다.
참으로 미묘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좋았다. 간지럽고 아련한 게 괜히 뭉클했다.
유림은 요한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 좋아. 정말 좋아.”
확실히 오늘은 좀 분위기를 탄 듯싶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오글거리는 말, 하지도 못할 텐데.
“그래서 요한 너한테 고맙게 생각해.”
“뭐가?”
“네가 초대장을 보내줬잖아. 그게 아니었다면 올 생각조차, 아니, 올 기회조차 없었겠지.”
“오지도 않았던 주제에.”
“그거야 작년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이곳에 와봐야 뭘 하겠어. 도움될 것도 없고, 또 그땐 연금도 몰랐잖아.”
연금이란 말에 요한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 정돈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저게 목적이었을 줄이야. 너무 유림다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금이라…… 작년에 알았다면 왔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여튼 네 덕에 올 수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고맙다 이거지.”
“이상한 소리. 넌 네 선택으로 이곳에 온 거야. 나완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으면 못 왔잖아.”
“결과적으로 오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난 상관없어.”
“그래도 올핸 왔잖아. 작년에 안 왔다고 삐친 거야?”
순간 요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계속 대화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올해 왔다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제야 유림도 무언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너희가 보낸 거 아냐?”
“내가 뭘 보내?”
“초대장.”
뚝. 요한의 걸음이 멈췄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던 그의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구겨졌다.
“내가 초대장을 보냈다고?”
“…….”
요한의 태도에 유림 또한 표정을 굳혔다.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섬뜩한 감각이 일었다.
유림은 주위를 둘러본 뒤, 사람이 없는 곳으로 요한을 끌고 갔다.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건물의 뒤로 온 유림은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한, 너 나한테 초대장 보낸 거 아니었어?”
“보냈어, 작년에.”
작년에.
그 단어에 세상이 얼어붙고 뇌가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유림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뭐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러니까, 올해는…… 아니었어?”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올해 클레이즈의 초대장을 받은 게 아니었어?”
“받았어. 하지만 그건 가짜였어. 그래서 네가 보낸 건 줄 알았다고.”
“……!”
요한이 눈을 홉뜨며 숨을 삼켰다.
“……자세히 말해봐.”
“초대장이 왔어, 한유림으로. 너도 알다시피 그건…… 내 이름이지만 본명은 아니야.”
“……확실히 가짜군.”
“작년에도 한유림으로 왔으니까, 그래서 난 네가 보낸 줄 알았어.”
“작년은 내가 맞아. 한유림으로 보낸 것도 맞아. 그래야 네가 들키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올해는 아니야. 애초에 네 능력이면 초대장이 갈 텐데 내가 뭣 하러 의심 살 짓을 하겠어. 거기다 이미 한 번 들켜서……. 하여튼 안 했어.”
“들키다니?”
“작년에 이사장님께 샨의 초대장이 가짜라는 걸 들켰어. 그분이 그걸 무마해 주셔서 걔가 이렇게 편히 다닐 수 있는 거야.”
샨의 초대장이 들켰었다니. 이건 이거대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여튼 그게 사실이라면 요한이 내게 초대장을 보낼 이윤 없었다.
“잠깐, 그럼 왜 히야스 교수님이 날 도와준 거야? 입학시험 4차 때 이것저것 이야기해 줬다고. 그거 너희가 부탁한 거라며, 히야스 교수님은 믿을 수 있다면서.”
“네가 입학시험에 참여한 이상, 마음만 먹으면 녀석들이 네 정보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워. 그래서 최대한 의심받지 않고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한 거야.”
“아니, 그니까……!”
순간 유림이 하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얼음 서고에서 나와 레이먼의 방에 모여 샨의 이야기를 들었던 날, 샨과 요한은 올해도 초대장을 보냈단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히야스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 했을 때도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럼 히야스 교수님은 어떻게 내 초대장이 가짜였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거지……? 분명 잘 숨기라고 하셨잖아. 분명 잘…….
“……!”
쿵.
묵직한 무언가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만 같았다.
설마, 내가 지금까지 멍청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 애초에 히야스 교수님도 모르고 계셨던 거다. 그저 내가 멍청하게 오해한 것이다.
“요한…… 그럼 너희가 히야스 교수님께 날 부탁했던 건…… 내가 내 ‘이름’으로 들어왔을 거라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그런 이유도 있어.”
하하하…… 염병할.
정리하자면 이런 거다.
샨과 요한은 내가 정식으로 입학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이름이 드러났다 생각해 그것을 숨기기 위해 4차 시험의 담당자였던 히야스 교수님께 부탁했다. 그리고 샨의 과거를 비롯해 내 과거를 알고 있던 교수님이 나에게 잘 숨기라 했던 것이다, 바로 내 ‘과거’를.
내가 그 말을 오해한 것은 데몽을 통해 내 초대장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히야스 교수님께서 한 숨기란 말을 가짜 초대장을 숨기란 뜻으로 오해한 것이다.
애당초 히야스 교수님도, 샨도, 또 요한도 올해 받은 가짜 초대장에 대해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얼음물에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이 멀쩡해졌다. 아니, 그러다 못해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이제 이곳에 숨어 있는 적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게 초대장을 보낸 이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대체 누구지? 누가 나한테 초대장을 보낸 걸까.
“진정해.”
요한이 유림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진지한 표정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침착하게 생각해.”
“응…….”
그래. 침착하자, 한유림.
분명 아무 이유 없이 가짜 초대장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명확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도 모르는 사이 내게 접근했을 수도 있었다.
유림은 그간의 일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이사장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거지?
분명 샨의 가짜 초대장도 눈치챘다고 하셨다. 실로 이 거대한 학교를 운영하는 그의 실력이라면 눈치채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에게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만약 다른 교수님들이 있어서 그런 거라면 나중에 저만 따로 불러 물어볼 수도 있었다.
거기다 히야스 교수님이 시험에 개입한 것만으로도 예민하게 구시던 분이다. 그런 분이 지금까지 아무 언급도 안 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알았을 텐데……. 내 초대장이 가짜라는…… 걸…….
“…….”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쿵쿵쿵쿵.
온몸을 울리는 고동 소리.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강렬하게 들려오는지 마치 세계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착각이 만든 또 다른 착각.
만일 이사장님이 히야스 교수님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게 단순히 내 시험에 개입해서만이 아니라면?
“…….”
어째서 단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까…….
어째서 이걸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거지?
유림은 입술을 짓씹었다.
“요한, 자세한 건 좀 이따 마저 하자. 그리고 이 이야기……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말아줘.”
“샨한테도?”
“……응. 일단은 너랑 나만 알고 있자.”
요한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은 그에게 이따 보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피곤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치고 넘어질 뻔한 것도 몇 번.
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학교가 이렇게 넓었던가?
모든 것이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확신은 없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지금 하려는 행동이 나를 향한 칼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오늘 다단에게 받은 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이리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제 생각이 맞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입학시험 때, 방구석에 집어 던진 초대장이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히야스 교수님을 의심하고, 저를 떠봤으며 되먹지도 않은 거래를 요구했다. 애당초 의심이 가는 학생에게 그렇게 다정하고 편하게 대할 리가 없지 않은가.
황급히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성한 풀들이 눈앞에 드러났다.
이제는 자연스러울 정도로 익숙해진 풍경을 뚫고 유림은 달리기 시작했다.
따스한 온기, 화사한 햇살, 잔잔한 침묵. 그리고 눈앞에 깔끔한 대나무 소파가 등장했을 때, 드디어 달리던 두 다리를 멈출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유림은 부족한 산소를 채워가며 앞을 응시했다.
눈이 부실 만큼 푸른 나무들, 그리고 그 밑에서 여유롭게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았고, 가슴이 아팠다.
요한이 잔상까지 틀어 만든 가짜 초대장의 정체를 밝혀낸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실로 이 학교에서 가짜 초대장을 만들고,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매끄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림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푸르스름한 빛을 잃고 붉게 타들어 가는 하늘.
그 온화한 노을빛 속에 덴 케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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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