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08
제 108 화
축제의 둘째 날은 첫날보다 경쾌했다. 우선적으로 유림이 있단 것 자체에서 분위기가 전날보다 가벼웠고, 어제의 이벤트로 제법 입소문이 나 오후가 되기도 전에 모든 물량이 빠져 목표량을 채울 수가 있었다.
“대박. 진짜 많이 벌긴 했다. 레이먼네가 도와준 게 효과가 있긴 있었나 봐.”
유림은 번 돈의 일부 금액을 동아리 비상금으로 빼놓은 뒤, 정확히 4등분 해 일행과 나눠 가졌다.
“레이들도 줘야 하는 거 아냐?”
“다들 필요 없대. 그냥 나중에 맛난 거 사 달라던데?”
은하의 말에 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하르는 깔끔하진 내부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축제를 즐겨볼까?”
“응. 그 전에 뭣 좀 먹자. 나 배고파.”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열네 그릇에 달하는 국수를 먹었음에도 배고픔을 토하는 은하의 위장에 세 사람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쟤 위는 무슨 무한으로 늘어나나? 아니, 어떻게 또 먹을 수 있지?
몇 년째 보고 있는 일임에도 경악스러운 식사량에 유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놀라운 위장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은하가 유림 일행 중 가장 말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이 움직이는 것이 아님에도.
어쨌든 은하를 제외한 세 사람이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건 사실이었기에 하민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점심때를 놓치긴 했지.”
“이왕이면 맛난 거 먹자. 돈도 잔뜩 벌었잖아. 어때, 림?”
하민이 유림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평소였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엔 그 제안에 부응해 줄 수 없었다.
“미안. 사실 나 가야 할 곳이 있어.”
“뭐?”
“어디?”
“어디 가?”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유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선배를 좀 보러 가야 하거든…….”
“선배? 누구?”
“아슈팔 선배.”
아슈팔?
아슈팔이라면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인상에 평화주의를 외치는 주제에 무기를 만들고 개조하는 것이 취미인 악질적인 선배가 아니던가.
한유림 쟁탈전으로 인해 면식이 있었던 그들이 그를 떠올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그 선배는 왜?”
“어…… 그, 형별 토너먼트 때문에.”
“형별 토너먼트? 림, 그거 안 한다 했잖아.”
은하의 질문에 유림이 이번엔 뺨을 긁적였다.
“아……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8형은 인원이 둘밖에 없어서 무조건 참가해야 한대. 심지어 예선은 부전승이라고 하더라고.”
“잘됐네. 어차피 우리 물량 다 빠져서 시간 남아돌잖아.”
정말로 잘됐다는 듯 웃어주는 하민의 모습에 심장 한켠이 쿡쿡 쑤시는 유림이었다. 은하와 디하르는 형별 토너먼트를 신청했지만 하민은 동아리 장사를 이유로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사도 일찍 끝나고, 또 거기다 자신이 형별 토너먼트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하민만이 참여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린 거였다.
유림은 그것이 자신 때문인 거 같아 왠지 미안했다.
“왠지 너한테 미안하다…… 나 때문에 참여 안 한 거잖아.”
“그게 왜 네 탓이야. 동아리제를 하려 한 거지. 거기다 난 그거 별로 하고 싶은 마음 없었어.”
“하지만 내일 심심할 거 아냐.”
“괜찮아. 형이 부탁한 것도 있고, 또 간만에 교수님들하고 밥 먹기로 했거든. 그러니 걱정하지 마.”
진심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유림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으~ 그러고 보니 진짜 내일 하는구나. 나 잘할 수 있을까?”
“나도 걱정이야……. 2형은 워낙 뛰어난 애들이 많아서.”
은하와 디하르가 쓰게 웃자 하민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형이 그러는데, 그거 1클래스는 무조건 한 명씩 붙게끔 해준대. 학교 풍습이라나? 아마 우리 중에서도 올라가는 애가 있을 거야. 디하르랑 은하의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봐.”
“음- 그럴까?”
“1클래스 사이에서라면 확실히 해볼 만해.”
은하와 디하르의 말에 하민이 턱을 괴며 웃었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잘하면 신청한 애들 다 붙겠다. 디하르도 올라가고 은하도 올라가고 림도 올라가고. 다 결승전에서 만나는 거야! 그럼 완전 재밌을 텐데.”
하민은 정말로 재밌겠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음후후후’ 하는 음흉한 미소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
“아니, 그냥. 왠지 좀 두근두근해서.”
참여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두근두근할까? 유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말을 계속했다.
“아…… 여튼 아까 말을 계속 이어 하자면, 그래서 선배를 좀 만나러 가려고. 가면서 키르도 받고 말이야.”
“키르 못 받았어?”
“응. 어제 까먹고 그냥 왔어. 가다가 집행회 들러서 가야지 뭐.”
바쁘네, 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은하가 조각 습격 사건이 생각났는지 볼을 잔뜩 부풀렸다.
“진짜 그 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딱지가 나. 어떻게 그런 누명을 씌우지?”
“이미 지난 거 싶게 생각하지 말자. 근데 선배 만나러 가면 림은 같이 밥 못 먹겠네. 아쉽다.”
“대신 저녁에 먹자. 연락할게.”
유림의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이따 연락해. 우린 열심히 놀고 있을 테니까.”
“애들 다 불러서 먹자. 첫 외식!”
“좋다.”
유림이 은하의 말에 찬성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고쳐 신었다.
“그럼 나 얼른 다녀올게. 신나게들 놀고 있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유림. 세 사람이 그런 유림을 향해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유림이 키르를 받으며 인사했다. 선명한 보라색이었던 키르가 안 본 사이 회색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 듯싶었다. 왜, 키르는 주인의 늄에 반응한다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고 정말 신기하네, 대체 무슨 원리지?
유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늄을 부여했다. 이윽고 키르에 은은한 빛무리가 감돌더니 선명하고도 말끔한 보라색으로 돌아갔다.
유림이 그 색에 만족하며 미소 지었다.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림 양.”
“네?”
고개를 들자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붙이던 집행회의 회장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림이 왜 불렀냐는 의미로 올려다보자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했습니다.”
엥?
“축제 기간인데……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어이 어이,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이쪽이 뭣하잖아.
찝찌름한 느낌에 유림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뭐, 이미 지난 일이고 이젠 괜찮으니까…….”
“사과하고 싶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돈이요.
라고 바로 답하고 싶었으나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닌 거 같아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뭐든 말씀해 주세요.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제완 너무나도 다른 태도였다. 어찌나 미안해하는지 도리어 저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차라리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편이 더 편한데, 거참.
유림은 멋쩍음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잘못한 건 사실이었으나 엄밀히 따지면 아버지와 이사장님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어서 오히려 득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에휴, 할 수 없지.
“정말 괜찮아요. 뭐 정 뭣하시면, 앞으로 제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한번 눈감고 넘어가 주세요. 알았죠?”
유림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그제야 그가 구겨진 표정을 풀고 옅게 웃었다.
“그럼, 꼭 필요할 때 말해주세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약속이에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예.”
실로 무언가를 부탁할 확률은 낮았지만, 어쨌든 좋은 거 하나 얻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림은 집행회 회장을 향해 가볍게 인사한 후 걸음을 옮겨 건물 뒤쪽에 자리한 작은 정원으로 나왔다. 평소엔 딴 세상처럼 조용하던 곳이, 축제라서 그런지 꽤나 시끄러웠다.
이 인간들은 질리지도 않나? 설마 이런 분위기가 매일매일 가는 거야?
유림은 대단하다 생각하며 아슈팔에게 통신을 했다. 약간의 신호음 후, 아슈팔 특유의 평화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왜냐니.
“…….”
유림이 너무 당황해 아무 말 못 하자, 아슈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림아, 왜?」
“……선배,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당연한 거 아냐?」
아니요.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걸 다 떠나서 저 선배한테 통신하는 거 처음이거든요?
유림은 알면 알수록 전혀 모르겠는 자신의 선배를 생각하며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여유롭고도 평화로운 목소리, 어떻게 보면 조금 얄미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묻고 싶은 말도 있고요.”
「말해.」
“어…… 통신으로 하긴 그런데……. 선배, 지금 어디세요? 제가 찾아갈게요.”
「나 지금 밖이야.」
“밖이요?”
「응.」
“밖에 어디요?”
「말하기 귀찮은데.」
아나, 이 인간이…….
유림이 키르를 죽일 듯 노려봤다.
“어딘지 말씀 안 해줄 거예요?”
「말해도 모를 텐데……. 지금 누구 만나고 있어. 이거 끝나면 히야스 교수님 연구실로 갈 거야. 너도 그쪽으로 와.」
“히야스 교수님 연구실이요? 저 열쇠 없는데요?”
「10분 안에 갈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연구실에서 봬요.”
「응.」
그 말을 끝으로 아슈팔이 통신을 끝냈다. 유림은 키르를 주머니에 넣은 뒤, 히야스 교수님의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
“10분이라니…… 너무 하네.”
투정 섞인 목소리에 아슈팔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봤다.
기분이 안 좋았다. 늘 봐왔던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도 어쩐지 능글맞아 보였고, 저 여유로움에 괜한 불쾌감이 올라왔다.
아슈팔은 맘에 안 든다는-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전혀 차이가 없어 보이는-듯 말했다.
“할 말은 그게 끝?”
“끝이라니…… 너무 냉정하잖아.”
나빴다는 듯한 말에 아슈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는 이가 황급히 따라 일어나 팔을 잡았다.
“알았어. 미안미안. 내가 장난이 지나쳤어.”
다정한 어투와 아이를 다루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아슈팔은 그 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찬찬히 바라봤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숲을 담은 듯한 고운 녹빛의 눈동자가 제 신경을 거슬렀다.
“그래도 이렇게 삐치면 섭섭해. 나름 의형제 아냐?”
더욱이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떠들다니.
“샨.”
아슈팔은 조용히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청년, 아니, 샨을 불렀다. 평소보다 한 톤 정도 낮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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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