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10
제 110 화
약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유림의 기분은 최고였다.
클레이즈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이사장님에 버금가는 천재가 아슈팔 선배이고, 그런 그와 한 팀으로 형별 토너먼트에 참여하는 자신은 그 누구보다 쉽게 우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때문에 기분이 붕붕 떠, 마치 바보 팔푼이 은하처럼 답지도 않은 미소를 싱긋싱긋 짓고, 애교(?)까지 부려봤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울함이 극에 치달아 누구든 진심으로 때리고 싶었다.
아, 진짜…… 세상에 이런 슈팔스런 일이 또 있을까.
“쟤 왜 저러냐?”
마른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는 히야스의 질문에 맞은편에서 오징어를 자르던 아슈팔이 유림을 바라봤다. 소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음침함을 풍기고 있는 자신의 후배.
아슈팔은 ‘나도 모릅니다’라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리고 그 태연한 대답에 유림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글쎄요’는 무슨! 선배 때문이잖아요!!”
그러더니 소파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이게 무슨 슈팔스러운 일이에요! 제가 형별 토너먼트 나간다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 선배가 기권하겠대요!!”
“이건 또 뭔 헛소리야?”
히야스가 왜 그러냔 눈으로 바라보자, 결국, 아슈팔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의 목소리에선 평화로움이 묻어 있었다.
“형별 토너먼트…….”
“형별 토너먼트?”
“제가 기권한다니까 우는 거예요.”
“에?”
히야스가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반문했다.
“왜? 그거 꽤 재밌는데.”
“관심 없어요.”
“그래도 나가보지?”
“전 평화주의자니까요. 그런 야만적인 일…… 사양이에요.”
그 말에 ‘네 취미가 살상 무기 만들기잖아’라고 생각한 히야스였으나 딱히 입을 열진 않았다.
“그래도 나가 봐.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아.”
히야스의 말에 아슈팔이 의심 가득 담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교수님, 제가 알기로 저희 토너먼트가 지금 룰로 바뀐 이유가 교수님들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랬던가?”
“교수님과 이사장님…… 그리고 해우 교수님, 하진 교수님, 리리아 교수님, 다단 교수님 이렇게 여섯 분이 장난 아니게 싸우셔서 사흘 동안 내리 토너먼트만 했다고, 그래서 그 꼴을 안 보기 위해 이렇게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하. 맞아. 그랬지. 그때 정말 내가 검 뚱땡이랑 종일 때려 부수느라 죽는 줄 알았다니까.”
“최강은 해우 교수님과 하진 교수님으로 알고 있어요. 계속 싸우다 결국 학교 측에서 무마시켰다고.”
“그 자식들은 정말 징그러웠어. 소꿉친구라서 그런지 서로의 약점을 잘 안달까? 이중인격자가 그렇게 욕을 찰지게 하는지 내가 그때 처음 알았다니까. 그리고 찐따가 더럽게 무서운 녀석이란 것도 처음 알았지.”
히야스가 그때를 생각하며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퉤 하고 뱉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자세히 좀 얘기해 주세요.”
“그냥 별 내용 없어. 치고받고 싸우다 건물 두 개 날려 먹고, 결국 다 끝났지.”
“우승자는 없었나요?”
“덴 케이, 그 빌어먹을 자식이 우승했어.”
“어떻게요?”
“어부지리.”
아슈팔은 평소와 달리 초롱초롱한 눈으로 계속 그때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 덕에 히야스는 오랫동안 까먹고 있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놓게 되었다. 참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엎어진 채로 부글부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는 유림만 빼고.
이 인간들이 지금 그런 이야길 할 때야?
결국, 참다못한 유림이 그대로 고개를 획 하고 들었다. 그리고 이를 갈며 스승과 선배를 노려봤다.
서슬 퍼런 눈빛에 이야기를 하던 히야스와 아슈팔이 대화를 멈추고 유림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마디씩 던졌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뚫어지겠다.”
“나도 나 잘생긴 거 알아.”
아, 진짜! 말이라도 못하면!
“진짜 둘 다 이럴 거예요?! 형별 토너먼트, 축제 대표 행사라면서요!”
“그렇지.”
“응.”
“근데 왜 이렇게 태평해요? 아슈팔 선배, 진짜 안 나갈 거예요?”
“응. 난 평화주의니까.”
아, 그 돼지 똥 싸는 소리 좀 그만하고!
“정말요?”
“응. 난 폭력적인 거 싫어.”
완고한 대답에 유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기를 들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게 아니면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유림이 어깨를 축 내리며 우울해하자, 맞은편에서 오징어 다리를 씹던 히야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유림이 넌 왜 그렇게 거길 나가고 싶어 하는 거냐?”
“네?”
“내가 알기로 너 동아리제도 했고, 최강자전도 나가지 않냐?”
“맞아요.”
“그럼 그거면 됐지, 뭘 또 하려는 거야. 세 개 다 하면 힘들어. 그거 꽤 지친다고.”
그걸 누가 모르나.
유림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뉘어 소파의 등받이에 파묻었다.
“저도 알죠. 그렇지만 승산이 없잖아요.”
“승산?”
“네, 1등이요. 이사장님 소원 받고 싶단 말이에요.”
유림의 말에 히야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 거에 관심 있었냐? 참고로 이사장 소원으로 연금은 약간 힘들다. 녀석의 기분 따라 달라지지만, 졸업 제도는 건들지 않는 게 교수들 사이의 교칙이야. 뭐, 진급시험 없이 한 클래스 정도 진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졸업까진 힘들걸.”
“그런 건 안 바라요. 아니, 사실 연금 주세요! 하고 싶지만…… 이사장님 성격에 연금을 줘도 그 뒤의 후폭풍이 장난 아닐 걸 아니까 그런 건 안 빌어요. 단지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
듣고 싶은 대답이라니. 대체 그게 뭐기에 소원까지 써가며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대답인데?”
“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서 소원까지 필요한 거냐?”
“…….”
유림은 히야스를 빤히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소원, 즉 질문은 과거, 그리고 아버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 이야기를 히야스 교수님께 해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샨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히야스 교수님은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거기다 아버지의 제자이자 후배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뭐, 자신이 아버지의 양녀라는 건 모르는 것 같지만.
“무슨 대답이냐니까?”
히야스의 재촉에 유림이 등받이에서 몸을 뗀 뒤 입을 열었다.
“그니까…… 이사장님이 저한테…….”
“왜 그렇게 특별 대우를 하는지 궁금하대요.”
순간 아슈팔이 유림의 말을 가르고 대신 답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졌다.
아슈팔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이 유림이 담당 교수님이잖아요. 거기다 자주 맛있는 것도 먹이고.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나 그게 궁금한 거래요.”
유림이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궁금해한댔는데?
이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슈팔이 왜 저렇게 대답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직감적으로 제가 하려던 말을 하지 말란 의미를 담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역으로 말했을 때, 아슈팔은 자신이 이사장님께 뭘 물어보려 하는지 알고 있단 거였다.
말을 왜 막는지, 이전에 그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유림이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에 그대로 굳어 있을 때, 아슈팔은 대화의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히야스에게 전혀 다른 내용을 질문했다.
“근데 교수님, 아까 어디 가셨던 거예요?”
“응?”
“방문까지 열어두고 어딜 가셨나 해서요.”
“아~ 잠시 이중인격자한테 다녀왔어.”
“해우 교수님께요?”
“응. 너 올해 졸업 시험 신청했잖아. 그래서 그 건으로 물을 게 있다고 불러서 잠깐 다녀왔어.”
“아……. 올해 담당이 해우 교수님이신가요?”
“원래는 해우인데, 일이 좀 있는지 다단이 한대. 하여튼 그래서 다녀왔…… 아 젠장, 큰일 났다.”
갑자기 히야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표정을 구겼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다단이 잠깐 보자고 했는데, 오징어 다리 때문에 잊고 있었어.”
“…….”
히야스가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헤집었다. 가뜩이나 정리 안 된 머리가 한층 더 지저분해졌다.
그는 아슈팔이 잘라놓은 마른오징어를 몇 점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둘 다 여기서 놀고 있어. 나 오기 전에 갈 거 같으면 문 잠그고 가고.”
“네.”
“한유림은 정신 좀 차리고.”
“네? 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히야스가 유림과 아슈팔을 향해 다녀온다며 손을 흔든 뒤, 투덜거리며 방 밖으로 나갔다.
끼익, 탁.
친절하게 방문까지 닫고 가시는 우리의 교수님.
유림은 문을 한참 바라보다 고개를 홱 돌려 아슈팔을 바라봤다.
“샨이 말해줬어요?”
“그래.”
목적어를 뺐음에도 질문을 정확히 알아들은 모습에 유림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요?”
“왜?”
“아니, 샨이 그렇게 입이 싼 애는 아닌데…… 왜일까 싶어서요.”
“의형제거든.”
“의형제요?”
아슈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은 그 대답에 더 이해가 가지 않아 다소 의아하단 얼굴로 바라봤다.
의형제라면 그거 아닌가. 친형제가 아닌 사람이 형제를 맺는 것. 근데 아슈팔과 샨이 의형제라고? 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대체 무슨 조화야?
“둘이 의형제예요?”
“응. 녀석이 입학하고 나서 이것저것 일이 있었어. 그때 여차여차하다가 그렇게 됐어.”
거참 좋은 설명입니다.
“음…… 샨이 어디까지 말해줬어요? 전부다?”
“글쎄. 어디까지가 전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네 아버지와 초대장, 그리고 형별 토너먼트까지 이야기해 줬어.”
그럼 전부 다 말해준 거잖아.
의형제라서 그럴 수 있는 건가?
유림은 아슈팔을 미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 샨의 결정이라면 뭐라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의형제라니. 다른 걸 다 떠나 샨이 그런 걸 맺을 수 있게 됐단 게 좀 충격적이었다.
“음…… 좀 이상하지만 일단 넘어가고. 그럼 선배, 아까 제 말 왜 막았어요?”
“…….”
그 질문에 아슈팔이 아무런 대답 없이 유림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허, 얼굴 뚫어지겠네.
유림은 피식 웃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선배는 다 알고 있다면서요. 그럼에도 막았다는 건 히야스 교수님이 몰랐으면 한다는 뜻 아니에요? 왜요?”
정곡을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에 아슈팔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떨었다. 그리고 그건 유림에게 있어 놓치기 아까운 하나의 틈이었다.
“오호~ 뭔가 반응이 수상한데요?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뭔데요?”
“…….”
아슈팔의 침묵이 길어졌다.
“선배?”
마치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평소와 다른 진지한 그의 모습에 멋쩍어진 유림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좀 웃긴 내용이면 약점 잡아서 같이 출전하자 하려 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니 그른 모양이었다.
유림이 어색한 분위기에 눈만 깜빡일 무렵, 가만있던 아슈팔이 입을 열었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