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25
제 125 화
“몰라. 말하기 싫어.”
레이먼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루아와 은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대체 뭐기에 이래?
“진짜 뭐 있었어?”
“뭔데 그래?”
“몰라 몰라- 그냥 짜증 나!”
레이먼은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에 머리칼을 잔뜩 움켜쥐었다. 그때 그들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훤칠한 키의 청년이 그들을 향해 웃고 있었다.
오드아이에 눈물점이 매력적인 청년 디하르였다. 그의 뒤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요한이 팝콘을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디하르랑 요한이다.”
“야밤에 모자는 또 뭐야.”
은하와 루아가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리고 자리를 옆으로 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은하가 다시 레이먼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엄청 다쳤네. 무슨 일 있었어?”
디하르의 질문에 레이먼이 홱, 고갤 돌렸다. 그리고 등을 보인 채 툴툴거렸다. 흡사 그를 무시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데?”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고 묻자 그제야 레이먼이 다시 고갤 돌려 그를 노려봤다. 디하르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몰라서 물어? 여자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 파렴치한 녀석 때문에 무지무지 열받아서 그런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 파렴치한 녀석하고 말하지 않을 거야.”
“이미 말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말 걸지 말라고!”
레이먼의 씩씩거림에 디하르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누차 말하지만 난 방해꾼으로 부탁받은 거야. 시합의 정정당당한 규칙 중 하나였다고.”
“웃겨. 유림이 1등으로 지나갔어도 그랬을 거냐?”
“그럴 리가 있겠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투에 레이먼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정말 너무 능청스러워 얄미울 정도였다. 더욱이 자신과는 가장 친하고, 또 가장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 사이가 아니던가. 근데 저를 그렇게 탈락시키다니.
레이먼이 연신 씩씩거리자 그 모습을 번갈아 보던 루아가 얼추 상황을 파악하고 손뼉을 쳤다. 그리고 옆에서 팝콘을 먹으며 폭죽놀이를 구경하고 있는 요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디하르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응.”
“너는? 너 눈치채고 있었을 거 아냐.”
“응.”
“근데 안 막았어?”
“응.”
“흐음~ 레이먼. 결국, 배신당한 거구나~”
루아의 말에 옆에 있던 레이먼이 발끈했다.
“시끄러워, 입 다물어.”
“하하하. 원래 그런 거지. 우정보단 사랑~ 당연한 거 아니겠어?”
디하르랑 요한만으로도 얄미워 죽겠는데 루아까지 거들다니. 정말이지 짜증 났다.
루아가 이번엔 디하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근데 진짜 의외다. 나 생각도 못 했어. 참가를 왜 안 하나 했더니만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참가는 했어, 다른 의미로지만.”
“어이구, 그러셨어요? 근데 왜 네가 했어?”
“원래 1클래스들이 많이 해왔데, 거기다 부탁도 있었고. 또 유림이 1등을 했으면 하니까.”
“어머나~”
루아가 기특하단 의미로 어깨를 토닥이자 레이먼이 빽 소리를 질렀다.
“둘 다 시끄러워! 떠들 거면 저리 가!”
그리고 그 말에 두 사람이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도 작게 피식 웃더니 다시 하늘을 구경했다. 오직 은하만이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결국, 은하가 입 밖으로 의문을 꺼냈다.
“둘이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는 거야? 디하르가 밑에서 왜 기다려?”
루아가 은하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작게 키득거렸다.
“디하르가 7형의 배를 두 동강 냈대.”
“아? 정말?! 디하르 대박! 그래서 뽀송이가 가라앉았던 거야?”
“응.”
“우리도 탈락하지 않았으면 볼 수 있었겠다. 근데 뽀송은 왜 이렇게 화나 있어? 정당한 규칙이잖아. 요한은 멀쩡한데 왜 혼자 화내?”
은하의 질문에 레이먼이 입을 삐죽였다.
“방해꾼의 참가 목적이 정당하지 않았으니까 그러지. 저 녀석, 유림이 1등 만들려고 기다렸던 거란 말이야.”
“진짜?”
“거기다 요한 놈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진짜?!”
은하가 두 눈을 깜빡이며 요한을 바라봤다. 레이먼을 도와 열심히 배를 몰기에 우승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디하르가 오는 걸 알면서도 안 피했다니. 정말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였다.
“그럼 요한도 림이 우승한 걸 도와준 거네.”
“결과적으론 그렇지.”
디하르의 말에 은하가 고갤 끄덕였다.
잠시 후, 레이먼의 치료가 다 끝났음을 안 은하가 손을 떼며 말했다.
“뽀송, 끝났어. 이제 괜찮을 거야.”
“아, 고마워.”
레이먼이 어깨와 목을 풀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신기해질 정도로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그전보다 상태가 좋아졌다.
유림이야 원래부터 관리를 해줬으니 그렇다 치고, 자신은 처음 맡기는 거기에 늄의 상태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도 이렇게 말끔히 치료하다니. 전문 치료사들 뺨칠 정도였다.
레이먼은 흠- 하며 어깨를 돌렸다. 그러다 문뜩 떠오른 유림의 얼굴에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왜 유림이 1등인 거야?”
“림의 배가 1등으로 도착했데, 나머진 다 탈락이고. 그래서 림과 슈팔 선배가 1등을 한 건가 봐.”
“말도 안 돼. 다 실격이어야지.”
그러자 루아가 레이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심통 부리지 마. 그리고 우승자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잖아. 더욱이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유림이 1등을 했다는데.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기분이 뭔가 아니란 말이야.”
“좋게좋게 생각해.”
“흠…… 뭐, 뒤의 누구는 좋겠어. 그토록 바라던 레이디가 우승을 해서.”
레이먼이 비꼬자 디하르가 옅게 웃었다.
“당연한 결과지. 이렇게 유능한 기사가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능청스러운 대답에 레이먼이 입을 떡 벌렸다.
“대박- 야, 깜둥 봤냐?”
그는 은하가 저를 도와 디하르에게 한 소리를 해줬으면 했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순진한 은하는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왜? 림이 우승하면 좋은 거 아냐?”
“으아~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거야? 요한.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너도 림이 우승해서 다행이라 생각해?”
“적어도 1형이 우승하는 것보단.”
“아, 그건 그래. 루아랑 데몽이 우승하는 꼴은 볼 수가 없지.”
그 말엔 다들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루아만이 ‘내가 뭐!’ 라고 소리치며 그들의 말에 반박하고 있을 뿐이었다.
“흥! 그래도 데몽이 물을 얼린 걸 고맙게 여기라고! 내가 다 튀기려다가 만 거니까!”
“야…… 그럼 진짜 누구 하나 죽었어.”
“그니까 고마워하라고!”
“적반하장 좀 봐라.”
레이먼은 자신의 행동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루아를 나무랐다.
비슷한 얼굴로 서로를 향해 툴툴거리는 쌍둥이. 디하르는 언제 봐도 재밌는 남매라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다 은하를 찾아온 목적을 상기하곤 입을 열었다.
“맞다. 은하야, 유림이 어디 있는지 알아?”
“림? 림은 왜?”
“아니…… 뭣 좀 물어보려고. 시합 끝난 지 꽤 됐잖아. 우승자도 발표가 났고, 뒤풀이도 시작했는데 통 보이지가 않아서.”
“으음~ 아마 이사장님하고 있지 않을까?”
“왜?”
“소원 빌러.”
은하의 말에 레이먼이 불쑥 끼어들었다.
“소원? 그걸 왜 1:1로 빌어? 보통 공개적으로 빌지 않아?”
그 질문에 은하가 보기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쓰게 웃었다.
“남들 앞에선 빌 수 없는 소원인가 봐. 거기다…… 왠지 림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어.”
“왜? 1등도 했겠다, 안 좋을 일이 있나?”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돌아와서 이야기해 준대. 아마 밤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걱정 어린 목소리에 왠지 숙연해진 네 사람이었다. 은하는 저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거 같아 머쓱하니 웃다 디하르를 바라봤다.
“근데 유림이한테 뭘 물어보려고?”
“응? 아니, 그냥 좀……. 은하, 넌 유림에게 뭐 들은 말 없어?”
“들은 말?”
“응. 이사장님에게 묻고 싶은 게 뭔지, 뭐 그런 거…….”
디하르의 질문에 은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아, 묻고 싶은 게 있단 이야긴 들었어. 그게 뭔지는 대답을 들은 후에 알려주겠다고 했고.”
“그래?”
디하르는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사실 그는 샨이 방해꾼을 제안했을 때부터 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유림이 대체 이사장님께 묻고 싶은 게 뭐기에 소원이라는 거창한 방법을 빌려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서 시합이 끝나면 물어보려 했는데 유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은하에게조차 그 이유가 뭔지 말하지 않은 듯했다.
은하를 가장 신뢰하기에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일인 걸까. 그리고 샨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분명 뉘앙스가 유림이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디하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은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물어왔다.
“왜? 무슨 일 있어?”
디하르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잡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음……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림은 나한테 숨기는 거 없으니까 뭐가 있으면 말해줄 거야. 그게 아니면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말을 안 하거나.”
“확실하지 않아?”
“응. 림은 항상 형태가 좀 잡혀야지만 말을 하거든. 그 이전엔 말을 잘 안 해. 예전에 선생님도 유림의 나쁜 버릇이라며 혼냈었어.”
“그래?”
“나중에 유림이 말해주면, 너한테도 알려줄게.”
그 말에 디하르가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은하가 아예 알고 있는 거면 모를까, 후에 듣는 거라면 본인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디하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장님께 하고 싶다던 질문,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우승시켜야 한다던 샨.
그러고 보니 표정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고개를 돌려 덴 케이의 온실을 바라봤다. 제법 멀리 있어 작게만 보이는 온실이 마치 유림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아 슬펐다. 디하르는 그곳을 계속 바라보며 제발 유림에게 별일이 없길 속으로 빌었다.
***
덴 케이는 온실의 중앙에 자리한 의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리 천장을 통해 쏘아지는 폭죽들이 보였다.
마치 별처럼 하늘을 가득 메운 빛의 향연에 그가 눈을 감았다. 귀를 간지럽히는 풀벌레 소리, 은은한 풀 내음, 작게 들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
그는 이 여유로운 시간이 계속되길 빌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다잡고 느긋하게 누워 있을 수 있도록.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마치 지금 이 시간이 사치라고 질책하는 것처럼 그의 여유를 방해하는 손님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덴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늘을 향해 쏘아진 빛이 유리를 통해 온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에 반하기라도 하듯 짙은 침묵과 함께 무거운 어둠이 따라붙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모든 것이 침묵과 어둠 속에 잠긴 고요한 공간.
케이는 어둠을 바라보더니 옅게 웃었다.
다시금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쏘아지며 온실 안이 환하게 빛났다. 그 빛의 사이에 서 있는 건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림이었다.
덴 케이는 그녈 보며 옅게 웃었다.
“어서 와.”
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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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