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31
제 131 화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방에 불이 들어왔다. 디하르와 레이먼은 갑작스러운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둘을 데몽이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둘이 뭐하냐?”
“그냥 있었어. 그보다 용케 빠져나왔네.”
데몽의 얼굴에 질린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징그러운 인간들. 내일 일정도 있는데 다들 저렇게 마셔도 괜찮나 몰라.”
“그러고 보니 최강자전의 경쟁자를 줄이기 위한 뒤풀이라는 소문이 있어.”
“하- 뭐야. 술독에 빠트려서 다 기권시키는 거야? 뭐, 말은 되네.”
데몽과 레이먼은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디하르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응. 가서 쉬게.”
어쩐지 좋지 않은 분위기에 데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고민 상담.”
고민 상담이라니. 누가 누굴?
대체 뭔 일인가 물어보고 싶은 데몽이었으나 쉬란 말과 함께 방을 나서는 디하르 때문에 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데몽은 디하르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문단속을 뒤 그대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푹신한 시트가 뺨에 닿았다.
씻어야 하는데 이대로 자고 싶단 생각이 가득했다.
“아- 피곤하다.”
“완전 피곤해. 내일 시합할 수 있으려나?”
“글쎄. 그보다 웬 고민 상담?”
“하하- 뜨끈뜨끈한 청춘 상담이지.”
레이먼의 개구진 말에 데몽이 아~ 하고 고갤 끄덕였다.
“유림에 관한 거냐?”
별거 아니란 듯 가볍게 툭 던진 데몽이었으나, 그걸 들은 레이먼의 반응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쪽빛 눈동자 가득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데몽은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눈치를 엿 바꿔 먹은 사람이라도 디하르가 유림을 대하는 태도를 본다면 분명 알아챌 것이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진짜?! 아, 어쨌든 이거 다른 애들한텐 비밀이다. 알았지?”
디하르가 유림을 좋아하는 게 비밀이라는 건지, 아니면 고민 상담을 해왔다는 게 비밀이란 건진 모르겠지만, 전자라면 대실패했다고 생각한 데몽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옆에서 레이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그래서. 디하르가 뭐라는데?”
“그냥 좀 신경 쓰이나 봐. 왜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친하면 괜히 질투 나고 그런 거.”
“그 샨인지 뭔지가 신경 쓰인데?”
“헉뜨, 너 돗자리 펴라.”
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데몽은 레이먼의 순진한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뜩 전부터 품고 있던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샨. 그 이름만으로도 정체가 의심되는 사람. 눈치가 지나칠 정도로 빠른 데몽이었지만, 그가 유림을 위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레이먼, 하나만 묻자.”
데몽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레이먼이 그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응? 뭘?”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샨이란 사람, 왜 그렇게 유림 일에 발 벗고 나서냐? 유림의 정보가 넘어가서 클레이즈에 왔다곤 하는데, 보통 그런 경우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들진 않잖아. 뭐, 요한이랑 같이 오긴 했다만 어쨌든 좀 위험하잖아, 실험도 당했었고.”
“그건 그렇지.”
“솔직히 뭔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 어릴 때 먼저 사라졌다는 것도 그렇고, 히야스 교수님까지 매수해 유림이 입학을 도운 것도 그렇고.”
“…….”
레이먼이 몸을 돌려 앉았다. 확실히 샨의 행동이 조금 과하긴 했다. 한편으론 디하르가 예민하게 구는 게 이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음…… 그렇긴 하네.”
“그치?”
“근데 난 왠지 샨이라면 그래도 별 위화감이 안 든달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레이먼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샨은 우리랑 성장 과정이 조금 달라.”
“다르다니?”
“샨이 지금 이렇게 있는 건 유림 때문이거든.”
“어?”
레이먼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니까 샨은 우리랑 달리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정확히는 유림과 달랐어. 유림이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의 실험이라면, 샨은 밀폐된 곳에 갇혀서 살았다고 했거든.”
“뭐?”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샨은 나중에 만난 거였으니까. 그냥 상황이 좋지 않았단 건만 알아. 애 상태가 말이 아니었거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판단력도 없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진짜 백지 그 자체. 말만 알아들었어.”
데몽은 가끔 샨에게서 느끼던 묘한 위화감이 그 때문이었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근데 그걸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게 유림이야, 데려온 것도 유림이고. 그래서 샨에게 유림은 좀 특별해. 아까 디하르한테도 말했지만, 샨한테 유림은 엄마 같은 거야.”
“뭐?”
데몽은 어쩐지 동갑내기 친구에게 쓰기엔 부적절한 비유 같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레이먼도 그 사실을 아는지 허둥지둥하며 변명했다.
“아니, 그렇잖아. 유림이 이것저것 다 가르쳤는걸. 뭐 샨 자체가 워낙 똑똑해 얼마 안 돼서 엔간한 건 다 배웠지만, 하여튼 샨을 도와준 건 유림이야.”
“그래?”
“응. 거기다…….”
레이먼이 데몽을 보며 옅게 웃었다.
잠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샨’이란 이름도 유림이 준 거니까.”
***
“림, 괜찮아?”
샨의 다정한 질문에 유림이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한 밤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응. 이제 진정됐어. 고마워, 샨.”
“눈이 퉁퉁 부었네.”
“으…… 쪽팔려.”
유림이 민망함에 눈을 비볐다.
“진짜. 못 볼꼴은 다 보인다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니. 이 나이 먹고 애처럼 펑펑 울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쓴단 말인가.
유림은 오늘 샨 앞에서 운 일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문뜩 시선이 품에 안긴 상자로 향했다.
온실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있잖아, 샨.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들어줄래?”
“어떤 이야기?”
“방금 이사장님께 소원을 빌었어, 그리고 그 대답을 들었고.”
“……나한테 말해도 괜찮겠어?”
샨의 이상한 배려에 유림이 쓰게 웃었다.
“괜찮아.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하고 싶어. 그래야지만 생각이 정리될 것 같거든.”
그 말에 샨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있는 벤치로 자릴 옮겼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숨을 골랐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분한 녹색 눈동자를 보니, 어쩐지 저까지 덩달아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온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자신의 소원서부터 시작해 이사장님과 내부의 적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온전히 듣겠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유림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오히려 조급한 건 유림 쪽이었다. 왠지 말을 하면 할수록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다시금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유림은 품 안에 있는 상자를 꽉 끌어안음으로써 그리움을 달랬다.
이야기의 끝과 함께 찾아온 미묘한 침묵. 그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샨이었다.
“림.”
“응.”
샨은 유림을 꼭 끌어안았다.
“속상했겠다.”
“응…….”
“지금은 괜찮아?”
“응…….”
“걱정 마. 분명 잘될 거야.”
“응…….”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등을 두어 번 토닥이는 샨. 그는 유림을 꽉 끌어안은 뒤 놔줬다.
“조금 일이 위험해지긴 했지만…… 사건은 더 깔끔하게 이해가 가. 확실한 건 우리의 적엔 변동이 없단 거고.”
“응…….”
어째 계속 ‘응’이란 대답밖에 못 하는 것 같았다. 유림은 자신의 꼴이 웃겨 허탈하게 웃었다.
“있잖아, 샨……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난 그냥 그 연구에 관련된 사람이 이 클레이즈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버지도 관계가 있었고, 이사장님 또한 내부의 적으로 인해 혼자 싸우고 계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커져 버렸어. 아니, 원래부터 컸었나?”
입가에 계속 쓴웃음이 걸렸다.
“이사장님이 도와달라고 했지만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어. 이기적인 거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답해준다며 나왔어. 얼음 서고에서 나와 모두와 이야기를 했을 땐 다 같이 힘내자며 말을 꺼냈지만, 그때처럼 답할 순 없었어. 무언가가 걱정되고 답답해. 또 미안해. 나 때문에 너희까지 괜한 고생을 하는 거 같아.”
얼음 서고에서 나와 데몽들과 샨들이 동맹을 맺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단지 모두가 다치지 않게 자신이 열심히 하자, 내 정보는 내가 처리하자- 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고 이사장님을 몰아붙일 정도로 위협적이단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단순히 적이 여기에 숨어 있다가 아니라, 적진 한가운데 들어온 느낌이었으니까.
거기다 아버지도 연관되어 있었다. 유림은 이 사실이 불안했다. 그땐 단순히 연구의 실험체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들과 한편이었던 사람의 양딸인 것이다. 과하게 생각하면 데몽네들 입장에선 가해자의 딸이고, 내부의 적 입장에선 배신자의 딸이었다.
유림이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앉아 있자 샨이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림, 난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네 뜻을 따를 거야.”
“……내가 틀릴 거란 생각은 안 해?”
“안 해. 설령 틀렸다 해도, 그것이 최선이 되게끔 할 거야.”
“나 때문에 다쳐도?”
“상관없어.”
상관없어. 참으로 간결한 말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유림이 작게 웃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도 왠지 기분이 풀렸다. 한편으론 지금까지 고민한 게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있지, 샨. 아직도 머리가 복잡해. 이사장님에 대한 것도, 클레이즈에 숨어 있는 내부의 적이란 것도, 그리고 아버지 일도…….”
“응.”
“그러니까 조금만…… 남은 축제를 핑계 삼아서 생각을 정리해도 괜찮겠지?”
“그래.”
“그리고 모두한테도 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샨이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입학했을 때와 달리 가라앉은 찬 공기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쉬고 싶다.”
진짜 쉬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뒹굴고 싶었다.
그래. 푹 쉬자. 그리고 아버지가 쓴 편지를 차곡차곡 읽어보자…….
유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무리 하나 없이 샛노란 달이 환하게 밤을 비추고 있었다. 고요하리만큼 그윽한 밤이었다.
품 안에 있는 아버지의 편지. 유림은 그 상자를 떨어트릴세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클레이즈 축제 4일 차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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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