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40
제 140 화
해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의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세룬이 작게 중얼거렸다.
“은하가 이겼군.”
“네?”
순간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세룬과 대화를 하느라 경기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은하가 도망치고 있단 건 알겠다. 관객들이 화끈하게 싸우라며 소리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근데 은하가 이길 거라고?
“은하가 이긴다고요? 제가 봤을 땐 졌는데요?”
“아뇨. 이겨요.”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기가 찼다. 해우가 봤을 때 은하는 100% 패배였으니 말이다.
“그럴 리가요.”
“2분만 기다려요. 결과가 나오니까.”
그 말에 해우가 말도 안 된다며 경기를 관전했다. 은하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경기장을 뱅글뱅글 돌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 뒤로 3형의 학생이 검을 뽑아 든 채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왜 그렇게 쫓아오는 거예요?”
“뭘 쫓아가! 시합을 하는 거지!!”
“전 싸울 능력이 없단 말이에요!!”
“그럼 기권해!”
“그건 싫어요!!”
“그럼 싸워!!”
“그건 더 싫어요!!”
동네 꼬맹이들이 뛰어노는 것만 같았다.
은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후에 있을 데몽과 테오의 시합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면 승부는 무서운데…….
은하가 머리칼을 움켜쥐며 곡소리를 냈다. 그때 뒤따라오던 선배가 크게 돌진하더니 그녀를 향해 검을 세웠다.
“인제 그만하자!”
“꺅!!”
그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은하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쫙 뻗어 늄을 조율했다.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딱 하고 멈췄다. 그리고…….
풀썩.
그대로 고꾸라지고만 그였다.
일순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든 이가 이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였다. 그때 가만있던 은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악! 큰일 났다! 또 조절을 잘못했어!!”
은하는 쓰러진 상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늄의 과부하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은하가 할 수 있는 기술은 딱 하나였다. 바로 상대방의 늄을 조율하는 것. 문제는 그 양을 잘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의 늄은 각자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낯선 사람에다 대상의 늄을 살필 여유가 안 되는 상황에서 딱 맞게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덧붙여 말하자면 은하는 과하면 과했지, 덜하진 않는 성격이었다.
즉 은하의 과한 조율로,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늄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한 상태로 회복된 탓에 도리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은하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이 무(無) 조절 능력 때문에 과거 유림이 죽을 뻔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이젠 이런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사람마냥 처참하게 좌절한 모습에 당황한 리리아가 은하의 승리를 외쳤지만, 은하는 유림에게 죽도록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하하- 저거 졸업하기 전에 고칠 수나 있으려나. 에휴, 일이 점점 늘어난다니까.”
은하의 상태가 웃긴지 세룬이 한참을 키득거렸다.
해우는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 다소 바보스러운 얼굴로 은하를 바라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거죠?”
“음…… 과유불급이랄까?”
아무래도 누워 있는 학생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아 세룬이 옷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해우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우야, 너무 자만하지 마라.”
몇 년 만에 듣는 친근한 호칭에 해우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과거에나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왔다.
“세룬 선배?”
“너무 과하면 피를 보게 될 거야. 난 내가 아끼는 후배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쓰러진 학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해우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다잡으며 세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설마-’ 하는 단어가 메아리마냥 계속 반복되었다.
***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유림.”
지독하리만큼 차분하고 태연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말보다 뚜렷한 힘을 담고 있었다.
유림은 숨을 삼켰다.
들켰다.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긴장감에 어깨가 굳고 손에 땀이 찼다. 마치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심장이 쿡쿡 쑤시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우스운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다단 교수에게 들켜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자신이었다.
유림은 쓰게 웃으며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저린 다리에 의해 마치 절을 하는 것처럼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털썩.
다리에 전기가 올라 찌릿찌릿했다.
……아버지, 오늘 뭔 날입니까? 아니면 요즘 마가 꼈나요?
유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나 마치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라도 생긴 것처럼 저려오는 다리 탓에 다시 툭 하고 무릎을 꿇었다.
“…….”
“…….”
다단의 시선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을 정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그니까 이건…….”
아 씨. 뭐라 하지?
들켰다는 당혹감보다 창피함이 앞섰다.
어째야 할지 몰라 애먼 땅만 쳐다보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다단이 작게 웃었다.
그가 다가가 유림을 일으켜 세웠다.
“자.”
다단은 유림의 팔을 잡고 균형을 잡아주었다. 순간 발에서 종아리까지 전기가 올랐다.
“으아아아…….”
“천천히 움직이도록.”
“네…….”
유림은 자신의 몸뚱이를 저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발가락부터 천천히 움직였다. 이윽고 다리를 괴롭히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좀 괜찮나?”
“예…… 괜찮아졌어요.”
물론, 아직도 찌릿찌릿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좀 전보단 많이 나아졌다.
“가서 좀 앉도록 하지.”
“아…… 네.”
다단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 다른 교수들과 조금 전까지 이야기했던 소파로 향했다.
그가 손짓했기에 유림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다리를 쭉 펴고 오금을 주무르고 있을 때 다단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야, 나한테만 들켜서.”
“……언제부터 아셨어요?”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올까 말까 고민하는 게 느껴졌거든.”
확실히 유림은 다단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숨진 않았다. 이즈네의 등장에서야 필사적으로 기척을 죽였지.
솔직히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땐 이즈네 교수님께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저 교수님…… 죄송해요…….”
유림의 사과에 다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무엇이?”
“아…… 그게, 숨었던 거요.”
“사과할 필요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던 건 확실하니까.”
“……그래도 그 때문에 몰래 엿듣게 되었잖아요.”
“뭐, 좋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내게 잘못한 건 아니지.”
“그래도…….”
“흠- 괜찮다 했는데도 자꾸 이러는군. 좋아. 이렇게 된 거 우리가 한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겠나?”
의외의 선처에 유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고맙군.”
고맙다니……. 오히려 잘못은 자신이 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단은 자신에게 고맙다 말하고 있었다.
유림은 그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낀 다단이 물어왔다.
“왜 그러지?”
“예? 아니에요. 하하하.”
“흠…… 난 속에 담아두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묻고 싶은 게 있는 건가?”
자신을 배려하듯 먼저 물어봐 주는 다단의 모습에 더욱 미안해진 유림이었다. 그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물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뭐지?”
“실례가 안 된다면 아까 이야기했던…… 내부의 적인가…… 그거, 물어봐도 될까요?”
유림의 질문에 다단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으아, 역시 이건 아니었나? 혹시, 나 알면서 물어보는 티 났나?
다단의 반응이 영 시원찮자 유림이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말을 번복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몰라야 하는 거면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아니, 괜찮아. 단지 제삼자가 들으면 어떤 식으로 들릴까 궁금했을 뿐이야.”
그런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좋아. 내부의 적에 대해 궁금하다 이건가.”
“네.”
다단은 턱을 쓸며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흠-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 감이 안 서는군. 간단하게 말하자면 클레이즈 내부에 내부의 적이란 존재가 있어. 정확한 명칭은 아니야. 다만 우리가 그렇게 부를 뿐이지.”
“내부의 적이 뭘 하는 사람들인데요?”
“이상을 현실로 만들려 하고 있지. 한편으론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야.”
깔끔한 그의 정리에 유림이 쓰게 웃었다. 자신이 그 비현실적인 인간들 때문에 유년 시절을 비롯해 일생이 꼬였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위험한 사상이네요.”
“그래, 위험한 녀석들이지. 중요한 건 이 내부의 적이 클레이즈에 숨어 있단 거야. 특히 덴 케이는 우리 중에도 그 내부의 적이 있다 생각해.”
“교수님들 중에…….”
유림은 마치 처음 듣는 사람마냥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아까 하진 교수님이 화를 낸 건, 이사장님이 교수님들을 의심해서 그런 건가요?”
“비슷해. 하진은 보기와 달리 우리 중 가장 정에 약하고 신의가 두터운 녀석이니까.”
왠지 하진 교수님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사장님의 발언은 그들 사이에 의심을 심었고, 알 수 없는 벽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자신이라도 싫었을 것이다.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림의 질문에 다단이 턱을 쓸었다.
“유무를 묻는 건가? 아니면 견해를 묻는 건가.”
“우선…… 유무요.”
다단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있다고 봐.”
“있다…….”
“그래. 그들은 클레이즈 내부에 숨어 있어. 몇인지 알 순 없겠지만 한둘은 아닐 거야.”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리 생각했다. 분명 한둘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짐작할 수가 없단 거지만…….
“누구일까요…….”
“글쎄. 그것을 안다면 이러고 있지 않겠지. 안 그런가?”
맞는 말이었다. 알면 이렇게 지끈거리는 일을 끌어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유림은 모두에게 지금까지 알게 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단에겐 미안하지만, 애들한텐 모든 걸 다 말해야 하겠지?
그리 생각할 때 다단이 불쑥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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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