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48
제 148 화
제9교시 [후야제, 그리고.]
클레이즈의 후야제는 공연이나 연회 시에만 문을 여는 4교사의 홀에서 진행됐다.
금빛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홀, 예스러운 꽃 장식이 들어간 돔 형태의 지붕,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정교하게 짜인 긴 창문까지. 흡사 거대한 성처럼 꾸려진 4교사는 클레이즈의 재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쳐지는 후야제는 ‘클레이즈 축제의 핵심은 후야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려 그 자체였다.
륜은 간만에 입은 정장이 불편한지 팔과 어깨를 움직였다.
‘피곤해 죽겠는데 연회라니…… 여러 의미로 학생을 힘들게 하는 학교라니까.’
그는 교사 밖에서도 느껴지는 웅장하고도 화려한 분위기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입구 주변을 서성였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들어가고 뭐해?”
고개를 돌리니 멋스럽게 차려입은 데몽과 테오가 서 있었다. 둘 다 머리까지 깔끔하게 올린 것이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으음…… 왠지 불편하단 말이지.”
륜의 말에 테오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참 나. 애들끼리 하는 파틴데 불편해 봤자지.”
확실히 귀족들의 파티보다 편하긴 했다. 거기선 가문이니 신분이니 하면서 눈치 봐야 했으니까.
그래도 선뜻 들어가기 뭐한지 륜이 쓰게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데몽이 그의 등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륜이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고, 화려하게 꾸민 학생들이 가득했다. 매번 교복만 입고 날뛰던 사람들이 이렇게 꾸미고 있으니 흡사 클레이즈가 아닌 다른 곳 같았다.
“다들 힘 좀 썼네. 역시 후야제라니까.”
“저런 옷들은 어디서 구하나 몰라. 입학할 때 들고 오는 걸까?”
“글쎄. 신청만 하면 외부에 주문도 넣을 수 있다고 하니 미리 주문해 놓은 사람들 아닐까?”
그런 게 있었나?
륜과 데몽이 이야길 하자 옆에 있는 테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야야, 지금 옷을 어떻게 구했는지가 중요하냐? 저렇게 예쁘고 멋진 여성들이 잔뜩 있다는 게 중요하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두 사람은 테오의 타박에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좀…….”
“넌 그런 것만 보이냐?”
“당연하지. 파티가 왜 아름다운지 알아? 바로 여자들이 최고로 멋지게 꾸미고 오기 때문이라고. 더욱이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들을 보라! 정말이지 저 곡선 하며, 시원한 트임까지……!”
“적당히 해라…… 저러다 칼에 좀 찔려야 정신 차리지.”
륜은 데몽의 말에 동의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륜을 부르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세 사람이 반사적으로 고갤 돌리니 레이먼과 디하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순간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푸른색과 백색의 정장을 입은 레이먼, 앞머리를 뒤로 넘겨서 그런지 쪽빛 눈동자가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거기다 푸른색 머리에 장식한 백색의 크리스털 핀은 특유의 장난기를 날리고 세련됨과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평소엔 그가 귀족이란 사실을 잊고 살 정도였는데 이렇게 보니 진짜 귀족 같았다.
륜은 시선을 돌려 디하르를 바라봤다.
붉은색이 감도는 갈색 정장을 입은 그는 레이먼처럼 특별하게 꾸민 것은 아니었지만, 원체 체격이 좋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그런지 무언가 진중하면서도 깊은 멋스러움을 자아냈다.
“역시……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인 건가.”
“짜증 나네.”
정체 모를 패배감에 울컥한 데몽과 테오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을 정도였다. 실로 그렇게 생각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는지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며 숙덕거리고 있었다.
쪽빛 눈동자에 화려한 외모 때문에 이런 시선이 익숙한 레이먼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여기서도 자꾸 쳐다보네. 눈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보다 레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도록 해. 사람들이 보고 있어.”
오래간만에 듣는 핀잔에 레이먼이 질색했다.
클레이즈에선 딱히 티를 안 냈지만, 디하르는 쌍둥이들의 보호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다잡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문에 누가 되지 않고 떳떳하고 교양 있는 이들로 자랄 수 있게 말이다.
“여기서도 귀족답게?”
“뭐…… 그럴 필요까진 없지만, 그런 차림으로 막 행동하는 건 안 좋아. 습관 들어.”
“오늘 정돈 자유롭게 놀자. 너도 편하게 놀아. 거기다 유림이도 있잖아. 루아가 기합이 잔뜩 들어갔으니 장난 아닐 거야.”
레이먼의 말에 디하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루아의 치장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실력이라면 평생 보지 못한-혹은 앞으로도 볼 수 없을 모습의-유림을 볼지도 모른다.
레이먼은 놀리듯 디하르의 등을 팔꿈치로 툭툭 치더니 이내 음식이 차려진 곳으로 이동했다.
‘나중에 깜둥 오면 맛나고 비싼 것만 털어야지~’란 생각을 하며 접시에 음식을 담을 때, 누가 레이먼의 뒤에 서서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시선을 살짝 내리니 여자 실루엣이었다.
그는 그 손길이 귀찮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 애인 있어요-”
그리고 그 말에 더욱 퉁명스럽게 말하는 상대방이었다.
“나도 애인 있거든요?”
“응?”
익숙한 목소리였다. 레이먼이 황급히 고갤 돌렸다. 그러자 웬 여자아이가 그를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동그란 눈, 그리고 반짝이는 선홍빛의 입술. 입고 있는 분홍색 드레스는 어깨와 팔이 트인 귀여운 미니드레스였고, 결 좋은 단발머리에 장식한 붉은 크리스털 머리핀은 마치 레이먼이 한 머리 장식과 한 쌍인 것 같았다.
레이먼은 너무 놀라 멍하니 보다 뒤늦게 소리쳤다.
“깜둥?!”
“예~”
“대박이다. 딴 사람 같아. 안경을 벗어서 그런가? 아! 앞은 잘 보여?”
“아니, 잘 안 보여. 근데 루아가 벗으래. 거기다 화장해서 다시 쓰면 안 된대.”
툴툴거리는 은하의 대답에 레이먼이 키득거렸다.
“괜찮아. 이쪽에서 잘 에스코트해 줄 테니까. 그보다 배 안 고파?”
“고파!”
“그럼 뭣 좀 먹자.”
레이먼이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수북이 쌓인 접시를 내밀었다. 과일은 하나도 없고 육류만, 가득했다.
“근데 루아랑 유림은?”
테이블로 자리를 이동하며 묻자 은하가 포크로 테오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언제 왔는지 루아가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빼어난 치장 솜씨답게 지금의 루아는 화려와 우아 그 자체였다. 옆선이 길게 트인 검은 드레스에 살짝 걸친 푸른색 숄. 길고 탐스러운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렸고, 평소와 달리 눈매가 강조된 성숙한 화장을 했다. 그 덕에 주변의 시선을 한껏 끌어안고 있었다.
레이먼은 루아랑 함께 있으면 시끄러워질 것을 직감하고 고갤 돌렸다. 그리고 은하와 뒤늦은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이 제 방식대로 파티를 즐기고 있을 때, 디하르는 루아의 과한 드레스를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았다.
“루아…… 과해.”
그러자 루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얄밉게 웃었다.
“왜. 이 정돈 꾸며줘야지~ 안 그래?”
디하르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테오의 모습에 흠칫 떨었다. 얼굴에 황홀이 가득했다. 흡사 사이비 종교를 믿는 광신도 같았다.
“루아, 너무 예뻐! 아름다워! 환상적이야!”
테오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물론, 우리의 루아는 륜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륜, 저 오늘 어때요?”
“하하하. 아름다우십니다…….”
륜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테오의 뒤에 숨었다. 어쩐지 조금 웃긴 풍경이었다.
디하르는 쌍둥이를 번갈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이즈에 가서도 레이먼과 루아가 귀족의 교양과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던 그의 주인어른. 가능한 한 그 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인 듯싶었다.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교양과 품위를 어떻게 지키란 말인가.
결국, 그는 오늘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답답한 속도 달랠 겸, 사람이 없는 동쪽 테라스로 향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찬 공기가 훅 하고 들어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디하르가 황급히 고갤 돌렸다. 그러자 테라스 구석에 있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검은 덩어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석에 쭈그려 있던 인영도 숨을 삼켰다.
디하르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구석에 숨은 인물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유림?”
유림이었다. 그녀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 안녕…….”
“……왜 여기에……?”
“하하하하…… 제기랄.”
유림은 작게 욕지거리를 지껄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만 디하르였다.
루아가 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유림은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올리던 머리가 길게 흘러내려 가슴께를 덮고 있었고, 반쯤 올려 묶은 머리엔 나비 장식의 비녀가 꽂혀 있었다.
호박 모양처럼 부풀어 오른 짧은 푸른색의 드레스. 반투명한 하늘색의 저고리. 동대륙의 느낌이 가득 묻어나는 옷이었다.
디하르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유림만 바라봤다. 그러자 민망했는지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안 어울리는 거 아니까.”
“아냐. 잘 어울려.”
“……괜찮으니까 거짓말 안 해도 돼. 으으~ 내가 진짜 루아 때문에 미쳐! 이러고 어떻게 다니란 거야…….”
정말로 자신의 모습이 부담스러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림의 모습에 디하르가 옅게 웃었다.
“정말 잘 어울려. 근데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쪽팔리잖아. 그래서 여기 숨어 있었어.”
“춥겠다.”
“춥지. 엄청 추워.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이런 옷이나 입히고. 안 입으려고 하는데 자꾸 지난 일 들먹이잖아. 말없이 사라진 거 서운했네, 네가 그러는 거 아니네, 이러는 거 있지! 내가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런 옷 안 입는데. 그보다 이거 언제 끝나? 그냥 지금 갈까?”
“그럼 안 되지, 그래도 축제인데. 거기다 모두 다 안에 있다고.”
‘그래서 안 들어가려는 거야!’
유림은 괴롭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이내 포기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들켰으니 끝날 때까지 숨어 있는 건 무리일 것이다. 거기다 너무 추워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었다.
유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심호흡을 했다. 디하르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뭐해?”
“준비.”
“준비?”
“응. 으으으~ 이렇게 해서라도 긴장을 풀어야지. 아, 진짜 나 이런 분위기 정말 싫단 말이야. 차라리 술 파티를 해. 그런건 즐길 수 있다고.”
차마 루아가 고정해 준 머리를 헤집진 못하고 허공만 움켜쥐는 유림의 모습에 디하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좀 더 둘이 있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유림의 옷이 너무나 얇았다.
디하르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기 위해 단추를 풀었다. 그때 유림이 ‘아자!’ 소리를 내며 유리 테라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들어가자, 디하르!”
그러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옷을 벗어줄 타이밍을 놓친 디하르는 아쉽다는 듯 쓰게 웃으며 그녈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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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