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64
제 164 화
장모님-
“…….”
“……?”
순간 모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다. 무슨 헛소리를 들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은하의 말에 모두는 자신이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맞아, 엄마. 우리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레이먼과 은하의 폭탄 발언에 뒤늦게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가장 놀란 건 단연 은하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제 딸이 사귄다는-심지어 미래를 약속했다는-사람이 13대 귀족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말까지 더듬어가며 확인했다.
“으, 은하야, 정말이니?”
“응, 정말이야.”
그리고 이 말에 옆에 있던 유림이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진짜? 농담 아니고?!”
“응, 진짜라니까. 근데 림은 왜 놀라? 너한텐 말했잖아.”
“어?”
나한테 말을 했다니? 얘가 어디서 약을 팔아.
“내가 이렇게 충격적인 이야길 까먹을 리가 없는데. 언제 했는데?”
“축제 3일 차인가? 하여튼 그때.”
이 망할 것아. 그때 내 정신과 개념은 유체 이탈을 했단 말이다! 아버지랑 이사장님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 그리고 그런 상태의 나한테 말하는 넌 또 뭐고!
차마 입 밖으로 하지 못할 쌍욕을 삼키며 유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유림이 입을 꾹 다물자 그걸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은하의 모친이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의 반응과 확고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사실인 듯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은하…… 너 혹시…… 사고 쳤냐?”
“엄마!!”
“아니, 갑자기 결혼이라니까 그렇지…… 그래서 너도 그런 건가 해서. 요즘 그런 경우 많다잖아.”
“무슨 엄마가 딸한테 그런 말을 해?!”
“미안……. 하여튼 진짜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냐!! 진짜 완전 나빠!!”
“그치? 하긴 네가 그럴 위인은 아니지…….”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아냐, 우리 딸 착하다고.”
“으으~ 욕한 거지?”
“정말로 칭찬한 거야.”
그녀가 다시금 긴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걱정할 일이 터진 것도 아니고, 나름 건전하게 잘 사귀고 있는 것 같다만 어쩐지 마냥 ‘그래’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녀도 은하가 클레이즈에 간단 말을 들었을 땐, 그곳에서 높은 신분이나 능력 있는 집안의 아이들과 친분을 맺어 인생의 앞길에 큰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없잖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건 상대가 너무 대단했다. 거기다 결혼을 전제라니.
가능한 건 둘째 치고, 그런 말이 오갔다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릴 정도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볍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애당초 결혼이란 게 둘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그런 걸 말하기엔 둘 다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은하의 친구들을 반겨주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 일단 그 이야긴 나중에 하고…… 다들 안으로 들어갈까?”
그녀는 아이들을 집으로 안내했다.
은하의 엄마는 아이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주었다. 찐 고구마와 매실차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맛있게 먹으렴.”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이런 게 입에 맞을까 하고 걱정했던 그녀의 우려와 달리,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구마를 집었다.
레이먼은 뜨거운지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손톱만 세워 고구마의 껍질을 벗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은하가 능숙하게 껍질을 벗겨주었다.
“고마워, 깜둥.”
“별말씀을!”
두 사람은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심하게 꽁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루아는 미간을 팍 구기며 뻑뻑한 고구마를 우걱우걱 씹었다. 아까 레이먼과 은하의 폭탄 발언을 들은 뒤부터 울컥한 배신감이 가시질 않았다. 어떻게 쌍둥이인 자신한테 아무 말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더 웃긴 건 집에 와서 한 말이었다.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냐는 은하네 모친의 말에 진지하게 ‘자녀는 2남 2녀를 생각 중입니다! 물론, 나중에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건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레이먼의 가족계획이었다. 아들 둘, 딸 둘이면 이모, 고모, 외삼촌, 삼촌이 다 생기니까 그게 가장 좋겠다면서 말이다.
‘생각할수록 화나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쩜 이 순간이 되도록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가 있지?
루아는 속으로 불만을 곱씹으며,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상견례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입도 뻥긋 안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루아는 다시금 전투적으로 고구마를 씹어 먹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하민이 차를 건네며 물었다.
“근데 림은 어디 간 걸까?”
“글쎄…….”
유림은 미리 말했던 대로 집에 도착한 이후로 개별 행동을 시작했다. 갈 데가 있다며 그대로 쌩 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힘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대체 뭘 힘내라는 거지?”
“글쎄다. 그보다 디하르는 어디 갔냐?”
“아까 림이 따라갔어, 혼자 보내기 뭣하다고.”
뭐, 유림이 썩 내켜 하진 않았지만, 완강히 거절하지 않은 걸 보면 비밀의 장소나 그런 곳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 같이 가지, 왜 따로 움직이려 한 걸까.
“어디 가는지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다.”
하민이 약간의 호기심과 조금의 걱정을 더해 말을 내뱉었다. 그때 차와 간식거릴 더 가져온 은하네 어머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마 산에 갔을 거야.”
산?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아와 하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녈 바라봤다. 무언가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비쳤다.
“산에요?”
“그래. 거기에 하림이가 있거든.”
“하림이라면…… 림의 아버지요?”
“응. 원래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거든. 오래간만에 왔으니까 거기 갔을 거야.”
그제야 전날 저녁에 유림이 해야 할 일이 있다 한 것이 뭔지 깨달은 일행이었다.
루아와 하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 들었다. 그런 거라면 같이 가거나, 적어도 어딜 가는지는 말해줘도 되는 게 아니었나, 하는 마음 말이다.
은하네 모친은 그들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옅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서운해도 조금 봐줘. 원래 림이는 하림이한테 갈 땐 은하하고도 잘 안 가려고 하거든.”
“물론 내가 죽어라 쫓아가지만!”
“그래. 그래서 후엔 반쯤 포기했지. 어쨌든 다시 이쪽으로 올 테니, 우리는 그때까지 즐겁게 기다리고 있자. 알겠지?”
상냥함에 가득 담긴 미소에 루아와 하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안 추워?”
디하르의 질문에 유림이 괜찮다며 옅게 웃었다.
은하네 아줌마가 아이들을 집으로 안내할 때, 유림은 갈 곳이 있단 말을 한 채, 그 자릴 빠져나왔다.
디하르는 그런 유림이 어쩐지 걱정돼, 쌍둥이에게 말을 남기고 그녈 따라 나섰다.
유림은 괜찮으니 애들하고 있으라 했지만, 디하르는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진짜 그냥 혼자 가도 되는데.”
“괜찮아. 혹시 내가 같이 가면 곤란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좀 창피하달까.”
“뭐가?”
“……말 안 해줄래.”
유림이 멋쩍은지 뺨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다시 말없이 산을 거닐었다. 그리 가파른 곳은 아니었지만 길이 없는 곳이라 걷기 불편할 법도 한데 유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나갔다. 거기다 나무가 복잡하게 자라나 있어 방향을 파악하기 힘듦에도 이정표라도 있는 것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 익숙함이 묻어나는 걸음이었다.
디하르는 그런 유림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새하얀 꽃을 바라봤다.
산에 들어서기 전, 유림의 집 뒤뜰에 자란 걸 꺾어온 거였다. 디하르는 그 행동만으로도 유림이 어딜 가려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부친의 산소에 가는 거겠지.
순간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어릴 때 생각난다.”
“어릴 때?”
“응. 내가 어머니 보겠다고 몰래 빠져나간 날 말이야.”
디하르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반년 정도가 되던 날이었다. 그리고 유림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날이기도 했다.
어린 디하르가 모친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아버지 몰래 성을 빠져나왔던 일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고아원 밖으로 나온 유림과 만나게 되었고, 어린애 혼자 보낼 수 없다는 그 말에(지금 생각하면 좀 웃긴 말이다) 같이 가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성묘하게 되었고, 후에 아버지에게 걸려 둘 다 된통 혼나고 말았다.
유림도 그때의 일이 기억나는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진짜 대책 없었다. 어떻게 거길 따라갈 생각을 했을까, 얼굴도 모르는 분이었는데. 그때 좀 그랬지?”
“아니, 괜찮았어. 나 때문에 같이 혼난 건 미안했지만.”
“아…… 그때 진짜 심하게 혼나긴 했어.”
두 사람이 옛일을 떠올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잠시 후, 앞서 걷던 유림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크게 말했다.
“도착! 진짜 징그럽게 멀다니까-!”
산의 중간에 있는 한적한 들판, 그리고 그 위에는 허망하리만큼 큰 묘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 묘의 주인을 나타내는 비석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작은 나무 판 하나가 묘의 앞부분에 꽂혀 있었다.
유림이 빠른 걸음으로 묘에 다가가더니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손수건으로 변형해, 나무 판의 먼지를 살살 털었다. 생각보다 묘 주위가 깨끗한 것을 보니 은하네 아줌마와 아저씨가 종종 와 정리를 해준 듯했다.
잡초까지 뽑아주실 필욘 없었는데.
미안함과 고마움에 유림이 쓰게 웃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진짜 오래간만이죠?”
마치 정말로 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림은 뒤쪽에 있는 디하르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은하 말고 다른 친구랑 같이 왔어요. 제가 말했던 소꿉친구들 기억해요? 얘가 그중 한 명인 디하르예요. 클레이즈에서 다시 만난 거 있죠.”
헤실헤실 웃던 유림이 뒤쪽에 있는 디하르를 흘끔 바라보며 멋쩍게 물었다.
“인사…… 할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쩐지 유림이 말한 창피하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묘 앞에서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게 남들 보기엔 조금 그럴 수 있단 의미겠지.
사실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는데…… 이걸 이상하다 생각하는 사람도 몇 없을 테고. 오히려 디하르는 이런 유림이 더 인간적이어서 좋았다. 거기다 어릴 적 모친의 묘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딱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디하르는 자연스럽게 유림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녀가 했던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디하르라고 합니다. 아버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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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