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65
제 165 화
마치 정말로 그 자리에 하림이 있는 것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디하르의 모습에 유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배시시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하다 생각한 제 사고방식이 창피할 정도로 정중했다.
유림은 시선을 묘 쪽으로 돌리며 마치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집에 와서 떠드는 아이처럼 조잘조잘 입을 열었다.
“아버지, 쟤 치사하게 혼자만 큰 거 있죠. 진짜 전 하도 안 커서 우울해 죽겠는데 지 혼자 완전 쑥쑥 컸다니까요. 하여튼 클레이즈에서 만났을 때 깜짝 놀랐어요. 디하르뿐만 아니라 레이먼도, 루아도, 요한도, 그리고 샨도 만났어요. 동창회도 아니고, 좀 웃기죠? 아! 아버지 클레이즈 졸업생이었다면서요. 완전 치사해!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알아요?”
유림은 묘 앞에 털썩 주저앉아 꽃을 내려놓았다. 은은한 바람이 꽃잎을 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대화를 실어간 듯 아주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유림은 꽃을 바라보더니 씁쓸한 얼굴로 나무 판을 쓸었다.
“……그래도 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버지 후배였던 이사장님하고 히야스 교수님도 만났고요. 좀 짜증 나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어요.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그래서 다 함께 만났다면 좀 더 재밌었을 텐데.”
티는 안 냈지만, 아버지가 클레이즈의 졸업생이란 걸 안 뒤부터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다 함께 만났겠지? 진짜 밤새도록 떠들었을 텐데. 세 사람의 옛이야기도 나오고, 장난이 담긴 흉도 보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 흥분하고, 한참을 웃어재낄 것이다.
“뭐…… 꿈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지만요.”
유림은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쓰게 웃었다.
디하르는 그런 유림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묘를 빤히 바라본 채 이야기에 맞장구쳐 주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시린 바람이 뺨을 스치고 서늘한 한기가 땅을 타고 올라오는 완연한 겨울이었지만 그다지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 후로도 유림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재잘거렸다. 마치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하림에게 다 이야기하듯 말이다.
***
유림과 디하르가 은하네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약 한 시간 반 후의 이야기였다.
‘다녀왔습니다’라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은하네로 들어선 디하르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거나 늘어져 있는 애들의 모습에 흠칫하고 떨더니 미간을 좁혔다.
“……다들 무슨 일 있었어?”
디하르의 질문에 엎어져 있던 테오가 고갤 들었다. 어쩐지 얼굴이 맨질맨질 했다.
“토할 거 같아…….”
그리고 이 말에 옆에 있던 하민이 입을 틀어막았다.
“욱…… 진짜 할 거 같아.”
디하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계속 그려졌다. 오직 유림이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피식피식 웃을 뿐이었다.
늄을 먹는 걸로 회복하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식사량을 자랑하는 은하. 사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언급을 안 했는데, 은하가 많이 먹는 덴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다.
은하네는 쉬지 않고 먹는 걸로 유명했다. 정확하겐 집에 늘 먹을 게 준비되어 있었다. 밥을 먹으면 후식을 먹어야 했고, 후식을 먹으면 입가심을 해야 했다. 입가심을 한 뒤엔 이가 심심하니 뭔가를 또 씹어야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집어 먹다 밥때가 되면 배고프다며 식사를 하는 게 이 집의 풍경이었다.
평소에도 그렇게나 많이 먹는 식구인데 손님이 왔으니 어땠겠는가.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실로 유림의 예상대로 친구들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찐 고구마를 시작으로 차, 떡, 과일, 다시 찐 감자 등 음식들이 끝없이 나왔다.
처음엔 엄청난 양의 간식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먼 곳에서 온 딸의 친구를 반겨서, 또 사람 수가 많기에 이리 챙겨주는 줄 알았으니까. 근데 그게 아니었다. 은하네가 늘 그런 식으로 먹는 거였다.
더 웃긴 건, 이제 점심때가 되었으니 점심을 해야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간 은하의 엄마였다.
이렇게 먹고 또 밥을 먹는다고?
경악 어린 표정이 일행의 얼굴에 번졌다. 그러나 처음 간 친구네 집에서, 그것도 우리 딸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어머님 앞에서 ‘더는 못 먹겠습니다!’, ‘토 나올 것 같아요!’라고 말할 만한 애들도 아니었다.
“아…… 점심 어쩌지…….”
“테오…… 내 거 먹어줘.”
“닥쳐 데몽. 너나 처먹어.”
“으아~ 나 살 다시 다 찌겠어.”
“우욱- 더 이상은 무리야.”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이며 얼굴을 처박는 일행의 모습에 유림이 얄밉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힘내라고 했잖아.”
“유림이 너…… 알고 간 거지.”
“당연히 알지. 내가 여기 하루 이틀 오냐.”
젠장, 네가 그런 착한(?) 말을 했을 때부터 눈치를 깠어야 했는데.
데몽과 테오가 이를 갈며 유림을 노려봤다. 그럴 힘조차 없던 륜은 루아의 옆에서 그저 유림을 바라보며 쓰게 웃을 뿐이었다.
“넌 어떻게 해? 너도 이렇게 먹어?”
“미쳤냐? 어떻게 먹어. 그냥 적당히 먹는 거지. 몇 번 겪으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내공이 생겨.”
이게 뭐라고 내공까지 생겨야 하는 걸까.
진심으로 그렇게 묻고 싶은 륜이었지만 입을 열 때마다 올라오는 매슥거림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거 점심은 너랑 나만 먹어야겠다.”
유림의 말에 동의하듯 디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 한 명 존재했으니, 바로 아직도 멀쩡한 은하였다. 그녀가 유림을 향해 두 손을 붕붕 흔들며 말했다.
“아냐, 림! 나 먹을 수 있어! 밥 먹을 거야!”
일행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경악 어린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일부는 납득했다, 쟤의 엄청난 식사량은 타고난 위장과 이 집의 식습관으로 인해 오랜 시간 단련된 거라고.
레이먼은 올라오는 토기를 틀어막으며 ‘내가 앞으로 저걸 제대로 먹여 살릴 수 있을까?’라는 다소 늦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후, 유림의 드물게 상냥한 배려로 더 이상의 음식을 면하게 된 일행은 은하를 비롯한 세 사람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휴식기를 가졌고,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유림의 집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긴 한가해서 그런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거 같아.”
루아의 말에 디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소난은 여유로웠다. 한편으론 어째서 유림이 이곳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유림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 근데 왜 다들 우리 집에 우르르 몰려가는 건데?”
당초 성묘한 뒤 집 청소나 하며 친구들과 따로 보내려 했던 유림의 계획은 은하네 집에 있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일행에 의해 무산되었다.
“당연히 가봐야지. 이왕 온 거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
“거기다 낚싯대도 빌려야 하고.”
“낚시하게?”
유림의 질문에 데몽과 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이 근처가 낚시하기 좋다며? 그래서 륜이랑 낚시나 하려고.”
“근데 낚싯대를 왜 우리 집에서 찾아?”
“은하가 너희 집에 있다던데?”
박은하수, 저 거지 같은 가스나가…….
유림이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물론 저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종종 했으니까. 다만 이걸 꽤 오래전에 창고에 처박아놔서 지금은 얻다 두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거였다.
유림은 귀찮음에 머리를 박박 헤집었다. 그때 하민이 물었다.
“근데 림네 집은 어디야?”
“응? 아, 저기.”
유림이 들판 너머의 한 집을 가리켰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해졌다. 확실히 은하가 사는 집에 비해선 아담한 크기였다. 소난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집.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집 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와 주변에 새하얀 꽃들이 심어져 있단 것이었다.
“저 나무 있는 집?”
“응.”
유림의 집 주변엔 다른 집들이 더 없었기에 마치 거대한 들판 위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도시의 궁궐 같은 성에서 살았던 대귀족의 자제님들에겐 정말로 동화 속의 집 같아 보였다.
“레이, 우리 여기에 별장 하나 지을까?”
“오, 좋네. 3층짜리로 아담하게.”
“근처에 호수고 바다고 다 있으니까 딱히 내부에 뭘 만들지는 말자.”
“그래야지. 아, 그래도 작은 텃밭은 만들까?”
“…….”
일행이 모두 질린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특히 유림은 반쯤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별장을 짓고 텃밭을 꾸리다니.
제 친구들이지만 정말 저럴 때는 받아주기 힘들 정도였다.
어느새 모두 다 유림의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유림은 정말로 제집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며 나뭇가지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열쇠로 변형시켜 문을 열었다.
곧이어 잠금이 풀리고, 끼익 하는 나무 마찰음과 함께 집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담한 집의 내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거실과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커다란 방. 방엔 작은 좌식 책상과 두툼한 매트가 있었고, 거실엔 식탁과 각종 선반이 나열되어 있었다.
단출했지만, 크게 부족한 건 없어 보이는 아담한 집이었다.
유림은 의외로 깨끗한 집의 모습에 옅게 웃었다. 분위기를 보니 은하네 아줌마가 종종 와서 청소를 해준 듯싶었다.
혹시 모르니까 열쇠를 두고 가라 하시기에 왜 그런가 했었는데 이러려고 그랬던 거구나.
“집 완전 아담하고 깨끗해.”
“정말. 거기다 보기와 달리 있을 거 다 있어.”
아이들은 마치 박물관에라도 온 듯 유림의 집을 구경했다. 집 안 구석구석에 유림의 흔적이 있었다. 현관문 옆 벽엔 유림의 키를 나타내는 표시 선이 있었고, 선반 위엔 직접 만든 걸로 보이는 목공예품들과 조각칼들이 놓여 있었다.
집의 가장 큰 선반 위엔 유림의 양부가 만든 걸로 추정되는 조각품과 함께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었다.
디하르와 하민은 그 사진을 빤히 바라봤다.
자세히 뜯어보면 비슷한 외모가 아닌데 웃고 있는 표정이 비슷해서 그런 걸까? 둘이 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아이들은 계속 집 안을 구경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민망한 유림은 뻘뻘거리며 그들을 쫓아다녀야만 했다.
그렇게 한바탕 집안을 들쑤신 일행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 퍼질러 누웠다. 자리가 없어 눕지 못한 일부만 식탁에 앉아 반쯤 늘어져 있었다.
유림은 친구들의 뻔뻔한 자태에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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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