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7
제 17 화
레이먼은 두 눈을 깜빡였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달려 이제 헛것을 보는 건가 하는 생각에 눈을 몇 번이고 깜빡여 봤지만, 시야 가득 들어온 동생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라? 루아가 왜 여기에 있지?
“동생, 나 지금 꿈꾸는 거야?”
실없는 소리에 루아가 무릎으로 레이먼의 등을 찌르듯 때렸다.
“꿈은 잘 때나 꿔.”
“칫, 근데 너 왜 여기 있어? 합격한 거야?”
루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왼쪽 팔을 내밀어 보였다. 그녀의 팔엔 레이먼과 마찬가지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선명한 색을 띤 채 말이다.
아니, 합격도 안 한 녀석이 여긴 왜 있어? 우연히 왔다기엔 좀 거시기한데?
하도 이해가 가지 않아 두 눈만 연신 깜빡이자 레이먼의 얼굴에서 의문을 파악한 루아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합격하려면 네가 필요해.”
“우리?”
“나랑 유림이랑 데몽 씨.”
잔뜩 애교 섞인 목소리에 레이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너랑 유림이랑 데몽 씨?
“유림이야 그렇다 치고, 데몽 씨는 누구야? 아, 그 유림하고 어쩌다 알게 됐다던 친구?”
애석하게도 레이먼은 시험장에서의 일 따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근데 그게 왜?”
“네 도움이 필요해. 정확히는 모르땅의 도움이 필요해.”
“모르땅?”
모르땅. 레이먼과 계약한 성물 중 하나이자 큰 체구와 우람한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였다. 그리고 레이먼의 눈동자와 같은 쪽빛 깃을 가진 드물고도 우아한 성물이었다.
근데 모르땅이 왜 필요해? 아! 잠깐, 설마…….
루아의 의중을 파악한 레이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니까…… 하늘에 올라가기 위해 우리 셋째가 필요하다는 거야?”
“응.”
치사한 녀석. 결국, 너희 미션 하기 위해 나보고 힘 좀 쓰라는 거잖아.
“치사해. 안 해! 내 것도 못하고 있는데 내가 왜 해줘?”
“나 말고 네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유림이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웃기시네. 내가 그런다고 넘어갈 것 같냐? 거기다 지금 다리가 풀려서 갈 힘도 없거
든?”
“업어줄까?”
“퍽이나.”
레이먼은 계속 다리를 주물럭거리며 투덜거렸다.
쉽게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레이먼의 투정에 루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붉기만 했던 하늘이 이젠 푸른색이 섞여 한층 더 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끌고 가 작전을 짜기에도 빠듯한 시간인데, 이렇게 버티다니……. 하긴, 생각하면 레이먼의 미션도 문제였다. 다 마치지도 못한 녀석을 끌고 갈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루아는 앞에서 우아하게 날개를 펴고 있는 니아고를 바라봤다. 기진맥진 상태인 레이먼에 비해 지나치게 멀쩡한 것이 괜히 기분이 나빴다.
“좋아.”
“뭐?”
“도와준다. 5분 안에 니아고의 깃을 잡고 유림이한테 달려가는 거지.”
“어떻게?”
레이먼의 말에 루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손끝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일었다.
“튀겨 버리자.”
“엑?!”
루아의 거침없는 발언에 레이먼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제 동생이라지만 저 저돌적인 성격만은 정말 감당이 되지 않았다.
뭐든 다 튀기고 보는 거야? 그렇게 튀기는 게 좋으면 전업을 요리사로 바꿔!
“야, 정말 튀길 거야? 그렇게 하면 모든 털이 다 뽑힐 거라고.”
“부리 깃을 뽑으라고만 했잖아. 요점은 뽑는 거지, 다른 깃이 뽑히든 말든 알게 뭐야.”
“그래도 돼?”
“아마.”
데몽과의 회의에 의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뽑기만 하면 되니까.
루아는 오른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검지 끝에서 생겨나는 작은 번개의 불빛.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호선을 그리는 전기의 잔상은 아찔할 정도로 따가워 보였다.
“야, 야! 설마 너…….”
“후후후.”
레이먼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루아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보다 루아의 손짓이 더 빨랐다.
“이압!”
루아는 공을 집어 던지듯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날카로운 전기가 긴 호선을 그리며 활처럼 날아갔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레이먼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짧은 비명과 함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지지직!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전기의 아찔한 소리. 그리고 그 뒤에 울리는 건,
“아아아아악!!”
우연히 그 자리로 뛰어든 테오의 비명이었다.
“……아?”
“에……?”
전기를 다룰 수 있게 된 지 어언 19년. 처음으로 사람을 튀긴 순간이었다.
그 당시, 테오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발견한 꽃에 바
로 열매가 맺혀 팔찌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이곳에 있는 아이들 중 가장 먼저 3차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뤘다.
후후, 잘생긴 녀석이 미션까지 빨리하다니. 아, 나 좀 짱인 것 같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으로 대단하다 느껴졌다.
테오는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음흉하게 웃으며 턱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륜이 자신과 같은 미션을 받았었다. 잘하고 있으려나?
데몽이야 원체 알아서 잘하는 놈이라 걱정이 안 됐지만, 륜은 좀 달랐다. 그 녀석은 의외로 굼떠서 이것저것 실수가 잦았으니 말이다.
결국, 테오는 남은 시간 동안 륜이나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숲은 넓었고 주위에선 미션을 하기 위해 아이들이 날뛰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구름 고래를 잡기 위해서인지 하늘에서 울려오는 쿠웅 하는 소음들이 테오의 공간감을 깨트려 놓았다.
자신이 어디를 찾아봤는지, 또 어느 쪽에서 왔는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그때 테오의 눈앞에 낯익은 얼굴 둘이 나타났다. 열아홉 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뽀송뽀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소년과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한 아리따운 소녀. 바로 유림의 소꿉친구인 레이먼과 그의 어여쁜 쌍둥이 루아였다.
테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그것은 단연 여자일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 여자는 거룩한 것이었고, 루아처럼 얼굴 예쁘고 몸매 예쁜 여자는 찬양해도 무방할 정도로 위대한 존재였다.
결국, 륜을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 버린 테오는 루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 그의 눈에 멋스러운 자세를 취해 보이는 그녀가 보였다.
아- 루아 씨, 당신도 나를 반기는군요.
테오는 흐뭇한 미소로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갔다. 그때 그의 귀로 파지직 하는 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어라?’ 하고 짧은 의문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전류가 온몸을 강타했으니. 테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돼지 멱따는 소리와도 같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으아아아아악!”
온몸이 타들어 가는 짜릿함. 테오는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큰 덩치를 피해 저 멀리 달아나 버린 니아고였다.
“저기…… 괜찮아요?”
루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테오를 바라봤다. 짧은 머리카락이 살짝 그을려 끝이 말린 게 꼭 파마를 한 것 같았다.
테오가 입고 있는 옷이 군인들이나 입을 법한 보호복이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대로 황천길로 갈 뻔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루아는 최대한 저자세를 취해 보이며 상처를 살폈다.
얼굴에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지만 그리 심해 보이진 않았다.
“이거 흉 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레이디, 레이디께선 괜찮으십니까?”
테오가 루아의 손을 잡으며 느끼한 미소를 날렸다.
“네, 뭐…….”
참으로 뜬금없는 태도에 테오가 멀쩡하단 사실을 깨달은 루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이먼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테오의 등장에 도망가 버린 니아고를 바라보는 레이먼. 물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지만, 루아의 번개 때문인지 아니면 그걸 맞고 쓰러진 테오 때문인지 전과 달리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잡기가 더 어려워졌어.”
레이먼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좀 전보다 니아고의 경계심이 한층 더 높아졌다.
“닭 잡기야?”
레이먼이 니아고에 대해 생각할 때, 테오가 그를 보며 물었다.
“응?”
“미션 말야. 닭대가리 깃털 뽑는 거 아냐?”
“맞아.”
“근데 왜 안 잡어.”
“겁나게 빨라. 어지간한 짐승보다 훨씬 빠른 것 같아.”
“그래? 그렇게까지 빨라 보이진 않는데. 아, 레이디는 미션 하신 겁니까?”
“에? 아뇨. 아니, 그보다 그 레이디라고 좀 안 하면 안 돼요?”
“아름다운 여성에게 드리는 존칭일 뿐입니다. 후후훗.”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주세요. 유림이들하곤 말 놓으면서 지내는 것 같던데…….”
“그들은 친구니까요.”
“그럼 우리도 친구 하죠.”
그래, 친구부터도 좋지. 테오는 루아와의 관계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 그럼 말 놓고 편하게 대하는 겁니까?”
“그러죠.”
“좋아 좋아. 루아 맞나?”
“응, 맞아.”
테오는 얇게 째진 눈을 끔뻑이며 루아의 팔찌를 바라봤다.
“너 붉은색 맞지? 구름 고래. 미션 다 한 것도 아닌데 왜 여기 있어?”
아까부터 계속 들었던 질문을 건네자 루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미션 하려면 레이먼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모시러 왔는데 저 녀석이 미션을 못 끝내서 도와주려던 참이야.”
“우리?”
어째 조금 전 레이먼의 상황과 비슷하다 생각하는 루아였다.
“나, 유림, 그리고 데몽 씨.”
“데몽 씨?”
루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데몽이란 이름에 테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데몽과 루아가 안면을 튼 사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이름을 부르며 함께한다 말할 만큼 친하다곤 생각 못 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만난 것도 2차 시험 직후 아주 잠깐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는 건, 내가 없는 사이 접근했단 소리?
젠장,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벌써 작업에 들어간 거냐? (그런 적 없다)
여자 돌 보듯 하더니만, 결국 예쁜 건 알아본다 이거지? (그런 적도 없다)
이거 날 의식하고 먼저 선수 친 게 분명해. (이거야말로 정말 그런 적 없다)
테오는 질 수 없다는 듯, 의욕에 찬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주어 없는 테오의 말에 쌍둥이가 그를 바라봤다. 똑같은 얼굴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린 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오는 특유의 걸걸한 음성으로 낮게 웃으며 등에 고정해 둔 거대한 검을 꺼내 들었다.
“이 몸은 벌써 합격해서 할 일이 없어.”
그런 뒤 그 육중한 검을 어깨에 걸치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런 고로 도와주겠다 이 말이지. 둘 다 일어나라고. 빨리하고 가야 하니까.”
테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음하하, 하는 웃음과 함께 어깨를 당당하게 펴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 육중한 뒤태를 보며 ‘아니, 안 도와줘도 되는데……’를 생각하는 루아와 ‘역시 센스 있는 친구!’라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레이먼이었다.
레이먼은 활기찬 얼굴로 테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루아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쫓아갔다. ‘그래, 한 놈이라도 더 있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그들의 새 잡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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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