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72
제 172 화
“유림이랑 은하…… 그니까 그 두 조가 안 왔다는 건 도합 아홉 명이 안 왔다는 거네.”
“응.”
히야스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반문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어차피 아직 10시 안 됐잖아. 왜 벌써 이래?”
실로 해가 지긴 했지만, 8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생각해 둔 10시까진 아직 두 시간이 넘게 남은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리리아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근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히야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싱글벙글한 얼굴이 기분 나빴다. 거기다 뭐랄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느낌?
그때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 설마…….”
“응, 맞아. 아무래도 끌고 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감 적중. 깊은 한숨이 히야스의 입을 타고 토해졌다.
“걔들이 애들이냐?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그건 그런데 연락이 되질 않는단 말이야.”
“뭐?”
“아까 유림이네 언제 오려나 싶어서 연락을 해봤는데 안 받아.”
“바쁜가 보지. 거기다 그 녀석 오늘 자기네 집 간다 했단 말이다. 분명 집에서 신바람 나게 놀고 있을 거야.”
“열 번 넘게 했는데?”
“정말 열심히 노나 보지, 아니면 어따 흘렸거나.”
“그럼 은하는 왜 안 받지?”
“…….”
이번엔 히야스조차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나 했는데도 유림은 물론, 은하까지 연락을 안 받는다니. 아주 잠깐 걱정이 들었으나 이내 때려치웠다. 아무리 북쪽 바다와 인접해 있다 해도 안전한 곳이란 걸 확인하고 고른 곳이었고, 또 유림과 은하가 자란 고향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오히려 더 놀고 싶어 일부러 안 받는 쪽이 정답에 가까웠다.
젠장. 통신은 또 왜 안 받아서 이 난리인 거야. 통신구를 이러라고 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 망할 것들아.
히야스는 잔뜩 뻗친 머리를 헤집었다.
“으으으. 짜증 나. 그래서? 지금 잡으러 가자고?”
“응. 애들 위치는 네가 알고 있잖아.”
애들에게 준 위치 추적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 역할대로 쓰이는 거긴 했지만, 어쩐지 썩 내키지 않는 현실에 히야스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 지금 나갈 거냐? 걔네 독해서 아무 일 없을 텐데……. 솔직히 말해. 너도 걱정되는 거 아니잖아. 그냥 궁금해서 나가는 거 아냐?”
“독한 거랑 아무 일 없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지금 나갈 거야. 앞장서.”
결국, 어떻게 하든 리리아의 계획대로 끌려 나갈 것을 짐작한 히야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진짜 클레이즈로 돌아가면 이놈의 교수직부터 때려치워야겠다. 물론, 그 거지 같은 케이가 수락해 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았어. 나가자.”
“응.”
히야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아를 바라보며 외투를 걸쳤다. 정말이지 욕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빛이다.”
-라는 소리를 들은 건 유림이 발목이 너무나 욱신거려 더는 걸을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였다.
유림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정말로 은은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었던가.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랐다. 배도 고팠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갈 수 있단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힘들었단 사실이 거짓말처럼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출구다!”
유림은 그대로 빛이 나오는 쪽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러다 척추까지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발목의 통증에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유림!”
디하르가 놀라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는 유림을 일으켜 앉게 한 뒤, 땅에 부딪힌 얼굴과 쓸린 팔, 그리고 후끈거리며 열까지 나고 있는 발목을 만졌다.
“괜찮아?”
몸이 아픈 것보다 창피함 때문에 괜찮지가 않았다.
디하르는 유림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발목을 살폈다.
눈으로도 확연히 알 정도로 팅팅 부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을 쓸 걸 그랬다. 평소였으면 금세 눈치챘을 것을 좀 전의 고백을 신경 쓰느라 전혀 생각 못 하고 있었다.
디하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유림에게 등을 보이며 돌려 앉았다.
“업혀.”
“어?”
“이대론 못 걷잖아.”
“…….”
예상치 못한 반응에 유림이 마치 습격을 받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아니, 업히라니. 그 창피한 짓을 하라고?
그녀가 절대 싫단 의미를 담아 고개를 강력하게 내저었다.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업혀. 빛이 들어온다는 건 출구가 있단 거잖아. 빨리 나가야지.”
“그, 그치만. 나 좀 많이 무겁단 말이야.”
“괜찮으니까 어서.”
“아니, 진짜 심각하다고…….”
목소리의 끝이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업히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나 테오만 한 짐을 이고 훈련받아. 너 정도는 혼자 가는 거랑 별 차이도 없어.”
차이야 없겠지. 하지만 제 무게를 못 느끼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치만…….”
“괜찮으니까 어서 업혀. 그래야 빨리 나갈 거 아니야. 애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디하르가 정말로 괜찮다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쓸데없는 고집을 잘 아는 유림은 한참을 주저하더니 이내 죽기보다 싫단 표정을 지으며 그의 등에 업혔다. 그의 말대로 걱정하고 있을 친구들도 신경이 쓰였다. 분명 일곱 명 다 저희 둘을 찾겠다고 이 주변을 뒤지고 있을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일어설게.”
“어?”
딴생각을 하는 사이 자세를 잡은 디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유림은 반사적으로 디하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순간 떨어지는 줄 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디하르가 저를 놓칠 리 없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이내 제 꼴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아…… 최악이다, 진짜.’
이게 뭐하는 건지. 속된 말로 쪽팔려 죽을 거 같았다.
거기다 계속 몸무게가 신경 쓰여 제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힘을 더 빼야 하나? 아니다. 축 처진 사람이 더 무거우니 차라리 힘을 주는 게 좋을까?
유림은 어떻게 해야 좀 더 가볍게 느껴질지 몰라 디하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속으로 끙끙거렸다.
한편 이런 유림의 걱정과 달리 디하르의 온 신경은 제 목을 끌어안은 팔과 어깨에 기댄 유림의 머리로 쏠려 있었다.
체온이 바싹 닿아서 그런지 쑥스러운 한 편, 그래도 조금 전에 저에게 고백을 했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끌어안는 걸 보면 정말로 별 감정이 없는 건가 하는 씁쓸함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꽤나 출구가 큰지 가면 갈수록 주변이 환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빛이 들어오는 곳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
“…….”
두 사람은 멍하니 출구를 바라봤다.
출구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시원하게 보였다. 네댓 명은 동시에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큼직한 출구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왜 하늘에 있냐?”
출구가 천장 꼭대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이건 또 무슨 돼지 똥 싸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족히 3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가파른 암벽과 원형 모양으로 뚫려 있는 천장. 그 위로 어둑한 밤하늘과 샛노란 달과 별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길은 거기서 끝이었다. 두 사람이 온 길을 제하고 다른 길은 없었고, 옆쪽에 꽤 깊어 보이는 물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높다.”
“그러게…….”
높이도 높이였지만 암벽이 너무 가파르단 게 문제였다. 심지어 수직에 가까운 각도였다. 과연 다리를 다친 자신이 이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까?
유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애먼 하늘만 바라봤다. 그때 디하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물이 빠지고 있어.”
“뭐?”
“고여 있는 물이 아니야.”
디하르는 유림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물로 다가가 살짝 떠 맛을 봤다. 짭짜름한 맛이 입에 번졌다.
“짜. 이거 바닷물 같은데?”
“바다라고?”
바닷물이 들어온다니. 그렇다는 건 북쪽 바다와 이어져 있단 건가?
여태 걸어왔던 길 하며, 지금 이곳의 험준한 암벽 하며, 자연적인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바다 쪽으로 내는 물길도 일부러 만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여기 대체 뭐하는 곳이야?
한참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던 유림은 일단 탈출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바닷물과 천장을 번갈아 봤다.
졸지에 출구가 둘로 늘어났다. 물론, 둘 다 유림이 쉽게 도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꽤 큰 물길이 있는 것 같아. 어쩌면 있는 길에 물이 들어찬 걸 수 있겠다.”
추측상 후자가 더 맞는 것 같았다. 길이 여기서 딱 끊긴 것도 조금 이상하고 말이다.“그럼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길이 있단 거겠네.”
“아마도.”
“그럼 물이 빠지길 기다릴까?”
유림의 질문에 디하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물이 언제 다 빠질지도 모르고, 또 얼마큼 빠지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잠수를 한다 해도 길이 얼마나 길지 알 수 없고.”
디하르는 그리 말하며 신발 끈을 고쳐 매더니 주변 암벽을 살폈다. 그러곤 무언가를 확인한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올라갈 길을 찾는 것 같았다.
“조금 힘들겠지만, 올라가는 건 가능하겠어.”
그는 그대로 유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외투를 벗더니 아까 그랬던 것처럼 등을 보인 채, 앉았다.
“업혀. 올라가자.”
업고 올라가겠다고?
유림은 너무 놀라 눈만 깜빡였다. 아무리 디하르라 해도 저를 업고 제대로 발 디딜 곳도 없는 이 가파른 암벽을 올라가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아니, 전혀 안 괜찮아 보여.”
“업히는 게 싫으면 둘러업을까?”
“아닙니다. 얌전히 업힐게요.”
유림이 졌다는 듯 그 등에 몸을 실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업히긴 했지만, 썩 내키지 않아 안절부절못하며 묻자 디하르가 걱정하지 말라며 거듭 안심시켜 주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어. 알았지?”
“응…….”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디하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 자세를 고치더니, 안전하게 업힌 것을 확인하곤 마치 끈처럼 외투를 둘러 유림과 제 몸을 감쌌다. 그리고 팔 부분을 꽉 묶어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잠시 후, 디하르가 벽에 튀어나온 돌을 잡았다.
“올라간다.”
“응.”
유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떨어지지 않게 디하르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가능한 빨리 이곳을 탈출할 수 있길 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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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