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75
제 175 화
리리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선을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한 순간, 입에서 저도 모르게 반가움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림! 디하르!”
무릎을 꿇고 있던 일행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몸을 틀어 두 사람을 찾았다.
두 사람이 어둑한 수풀 사이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땅바닥을 구르기라도 했는지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거기다 유림은 디하르의 등에 업혀 있었다.
“하하하…… 미안, 늦었지…….”
“림!!”
가장 먼저 뛰어나간 건 은하였다.
“뭐야! 걱정했잖아!”
“미안.”
“어디 다쳤어? 디하르한테 왜 업혀 있는 거야?”
“아, 발목이 살짝 나가서. 그보다…… 저 뒤에 있는 멧돼지 사체는 뭐고 리리아 교수님은 왜 여기 계신 거야?”
“리리아 교수님이 잡은 거야, 교수님은 우리 잡으러 온 거고.”
은하의 절묘한 화법에 디하르와 유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꼭 저 멧돼지들의 현재가 자신들의 미래와 동일시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해안가가 말도 아니게 엉망이었다. 너무 깔끔하게 토막 난 멧돼지들의 사체는 둘째 치고, 데몽과 루아가 마법을 사용했음을 추측할 수 있도록 바닥엔 얼음 송곳이 잔뜩 꽂혀 있었고, 검게 그을린 모래들도 있었다.
무릎을 꿇은 일부 아이들과 검을 빼든 리리아.
얼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를 파악한 유림과 디하르가 마른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두 사람이 머릴 숙여 사과했다.
리리아는 은하에게 치료받는 유림과 그녈 업고 있는 디하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말이지 사람 여럿 고생 시킨다니까. 다리 말곤 더 다친 데 없고?”
“네. 괜찮아요.”
“디하르는?”
“전 멀쩡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 말에 유림도 속으로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저를 업은 채 그 가파른 암벽을 타고 오른 디하르에게 별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절벽 위의 공간이 유림이 잘 아는 숲과 이어져 있다는 게 천운이었다.
리리아는 검을 다시 브로치 모양으로 바꾼 뒤, 옷깃에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유림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벌이지 말기. 알겠지?”
“네. 정말 죄송해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보다 유림이 넌 나 말고 히야스한테나 가서 빌어.”
“어? 히야스 교수님도 오셨어요?”
“그래. 근데 무슨 일인지 좀 상태가 안 좋아져서 일단 너희 집에 두고 왔어.”
리리아의 말에 유림의 눈이 커졌다.
“우리 집에 가셨어요?”
리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히야스가 건네준 배지를 들어 보였다.
“테오 녀석이 너희 집에다 이걸 흘렸거든. 그래서 거기에 테오가 있는 줄 알고 찾으러 갔었어.”
그래서 집에 갔구나. 아니, 잠깐. 근데 집 안엔 어떻게 들어간 거지?
“……문 부순 건 아니죠?”
흠칫 떨며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리리아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하. 아니야. 당당하게 문 따고 들어갔어.”
“…….”
저기요, 교수님. 그건 당당하게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습니다만.
“……그럼 히야스 교수님은 아직도 저희 집에 계신 거예요?”
“그럴걸? 가다가 잠깐 들러서 끌고 돌아가자.”
“……네.”
“림, 다 됐어.”
유림의 발목은 물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몸 상태까지 최상으로 되돌려 놓은 덕에 유림은 이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쌩쌩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디하르의 등에서 내려와 발목을 돌려가며 풀었다.
“고마워. 아, 디하르도 고마워.”
“별말씀을.”
이제야 아홉 명이 완벽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모인 것을 확인한 리리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문제의 두 녀석도 찾은 것 같고, 숙소로 돌아가 볼까?”
그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답했다.
히야스를 끌고 가기 위해 유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은 이미 비어 있는 상태였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먼저 돌아간 것 같다는 리리아의 말에 유림은 짐을 챙기며 어질러진 의자를 정리했다. 그러다 발견하게 되었다. 선반 위에 엎어져 있는 가족사진을 말이다.
한눈에 봐도 꽉 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손자국과 마른 물기, 흡사 눈물 자국 같은 것에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들었다.
유림은 사진을 제자리에 올려놓은 후 집을 나섰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지? 왜 갑자기 이렇게 불안한 거지?
익숙한 길을 다 같이 걸어오면서도 유림은 계속 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저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길게 느껴져 초조함에 손만 만지작거렸다.
빨리…… 히야스 교수님을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일행은 숙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리리아에게 엄청난 잔소리 폭탄을 듣게 되었다.
하민은 속았다는 생각에 입을 샐쭉거렸지만, ‘교수’로 돌아온 그녀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향해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했다간 내가 덴 케이에게 까이는 거 이상으로 네 녀석들을 까주마!’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고, 이후 채찍과 당근처럼 못 먹은 저녁 식사를 챙겨주었다.
방에 도착한 유림은 답답함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샤워를 한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가벼운 외투를 걸친 후 신을 신었다.
“어라? 림, 어디 가?”
씻으러 들어가려던 은하가 유림을 보며 물었다. 루아 또한 이불 속에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또 어디 간다고?! 오늘은 제발 방에 있어. 나 진짜 리리아 교수님한테 또 혼날까 봐 무섭단 말이야.”
정말로 무서웠는지 루아가 드물게 정색하며 말했다. 유림은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다.
“히야스 교수님한테 가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먼저 가셨다 했지. 역시 화나신 걸까?”
“모르겠어, 일단 찾아가 보려고. 금방 올게.”
“다녀와~”
“빨리 갔다 와~”
유림은 두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방을 나섰다.
히야스가 머물고 있는 방은 숙소의 가장 위층에 존재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방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노크를 하려는데 순간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히야스 교수님의 연구실도 뻔질나게 드나들던 자신이었다. 아니, 그의 방을 마치 제집처럼 굴었었다. 근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걸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가? 아, 그래. 그래서 그런 건가 보다. 후…… 그래, 괜찮아. 분명 저번처럼 츳츳거리며 뭐라 한마디 하고 끝날 거야. 응. 아무 일 없을 거야.
유림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깔끔한 노크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라? 하는 마음에 유림이 문을 열었다. 잠겨 있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너무나 쉽게 문이 열렸다.
“교수님?”
방 안은 캄캄했다. 그리고 싸늘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러나 빈방은 아니었다. 히야스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교수님? 뭐하세요, 불도 안 켜시고.”
유림이 어색하게 웃으며 방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들어오지 마.”
냉정하리만큼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린 유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예?”
“나가.”
“교수님……?”
“나가라고.”
유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처음이었다, 히야스가 이렇게 차갑게 말하는 것은. 그가 화를 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히야스가 무서웠다.
처음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아…… 제가 사고 쳐서 그래요? 죄송해요. 앞으로 진짜 조심할게요.”
“…….”
“교수님…… 화 많이 나셨어요? 저 진짜 앞으로 안 그럴게요.”
“한유림.”
“에? 네…….”
“내가 나가라 한 거 안 들려?”
적의가 담긴 목소리에 섬뜩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온몸이 그대로 굳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유림은 그대로 히야스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몸이 떨렸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히야스는 그런 유림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교수님.”
그가 거칠게 유림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냈다.
“교수님!”
마치 밀치다시피 한 행동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유림은 반사적으로 넘어지지 않게 히야스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 팔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그였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팔이 화끈거리며 아려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유림은 뒤로 넘어져 복도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히야스의 방문이 굳게 닫혔다. 흡사 유림을 외면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교, 교수님…….”
유림은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밀어냈다는 충격, 묵직하게 아파지는 등과 엉덩이, 욱신거리는 팔. 너무 아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정도였다.
“……교수님?”
밀쳐 내는 순간까지 자신을 내려다보던 냉정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왜? 왜 교수님이 저러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교수님.”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구멍에 무언가 응어리진 것처럼 울컥했고 눈가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유림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며 계속 그를 불렀다.
그러나 히야스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유림의 목소리에 놀란 리리아가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이냐며 그를 불러도, 또 결국 참다못한 유림이 펑펑 울어젖히며 불러대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클레이즈의 생애 첫 여행. 모든 아이들은 즐거운 추억을 쌓은 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림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히야스는 유림을 계속 외면했다. 다음 날에도, 또 모든 일정을 마치고 클레이즈로 돌아가는 길에도 말이다.
유림은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에게 찾아가 원인 모를 잘못을 빌었지만 끝끝내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마치 유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듯 말이다.
그렇게 클레이즈의 첫 여행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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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