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76
제 176 화
제11교시 [필승, 진급시험-도입편]
클레이즈 역사상 첫 여행을 마친 1클래스의 학생들이 클레이즈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1클래스들이 선배들에게 불려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기념품들을 선물-을 가장한 삥 뜯기-했으며 밀린 수업을 보충하기 위해 야간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진급시험에 대한 신청서가 돌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단연 유림이었다.
그녀는 이곳저곳 다니며 밤늦도록 여러 사람에게 휘둘렸다. 아는 사람이 많아 유명해진 만큼 불려 다니는 곳도 많았던 것이다. 물론 평소였다면 짜증을 내며 도망쳤을 테지만 신기하게도 이번엔 군말 없이 도와주었다. 개중 일부는 유림이 일부러 만들어낸 일이기도 했다.
디하르와의 새벽 훈련부터 시작해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일정. 그 과격한 일정에 친구들이 걱정했지만, 유림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바빠야 한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렇다. 더 바빠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그 어떤 생각도 안 할 수가 있었다.
***
“……이걸로 일주일째야.”
리리아의 말에 하진과 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히야스가 방에서 나오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슈팔은 뭐래?”
하진의 말에 리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슈팔도 못 들어오게 하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애제자 아슈팔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니. 케이는 미간을 구기며 턱을 쓸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 어쨌든 그날 진짜 대단했어. 유림인 울지, 히야스는 정색하지…… 난 녀석이 그렇게 표정 굳히는 거 그때 이후로 처음이야.”
“그때?”
“왜, 히야스가 하림 선배한테 엄청 화내던 날 있잖아. 그때 말이야.”
리리아의 말에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하진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었지만, 그때의 히야스는 자신들이 아는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색하며 엄청나게 화를 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마치 하림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외면했다.
리리아는 왠지 히야스가 하림 선배에게 했던 것처럼 유림을 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참견하는 건데. 만일 그날 자신이 달리 행동했다면 이런 결과가 안 나왔을 수도 있었다.
후회와 답답함에 그녀가 손톱을 질겅였다. 하진이 그 손을 잡았고 케이가 그러지 말라며 이름을 불렀다.
“리리아.”
“아, 미안. 버릇이 나왔어.”
“후…… 하여튼, 여행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몰라. 그저…… 유림의 집에서 좀 이상했어.”
그 말에 케이의 표정이 심하게 굳어졌다.“너희도…… 유림의 집에 갔었어?”
“아? 응. 소난에 갈 일이 있었는데…….”
“리리아, 내가 분명 지정된 장소 이상은 나가지 말라 했던 것 같은데. 특히 소난은 방문하지 말라고 당부했어.”
그랬었다. 하지만 리리아도 히야스도 그 당부를 깔끔하게 묵살했다.
“그, 그치만 유림이랑 은하네 집이 거기 있는데 어떻게 못 가게 해…… 솔직히 너라도 그 상황에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어? 아, 그래도 전부 간 건 아니야. 걔네 조 애들만 허락한 거야.”
“그럼 너희는 왜 간 거지? 거기다 난 이 이야기를 지금 처음 듣고 있어.”
케이의 말에 리리아가 아차,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들이 실종되고 괴물들에게 습격받았던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해 유림네가 소난에 갔던 일 자체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게…….”
“리리아-”
케이의 단호한 말에 리리아가 난처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니까 그게 말이야…….”
***
“교수님, 문 좀 열어주세요.”
아슈팔은 히야스의 연구실 앞에서 계속 문이 부서질세라 두드렸다. 평화주의를 사랑하는 그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교수님.”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할까? 그래,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슈팔은 그러기로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아슈팔.”
저를 부르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그가 화들짝 놀라 고갤 돌렸다. 그러자 예의 무표정을 한 채 서 있는 덴 케이가 보였다.
“이사장님?”
“히야스는 안에 있는 건가?”
아슈팔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아랫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장님…… 혹시 히야스 교수님이…….”
“그래. 녀석이 알았어.”
그 말에 아슈팔이 뚝 하고 굳었다. 곧이어 원망 섞인 눈으로 덴 케이를 노려봤다. 평소의 그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날이 선 모습이었다.
케이는 그런 아슈팔을 지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히야스, 나다. 문 열어.”
명령이 섞인 목소리에 아슈팔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이사장님.”
“셋을 세지. 그 안에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어.”
“잠깐만요, 이사장님.”
“셋- 둘-”
아슈팔은 덴 케이를 말리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케이가 숫자를 세는 것이 더 빨랐다.
“하나-”
소리와 함께 ‘쾅!’ 하고 폭발이 일었다.
어찌나 강한 힘이 충돌했는지 견고하게 짜인 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산산조각 나 버렸다.
무너진 문 너머로 어두컴컴한 방의 내부가 보였다. 환기가 되지 않은 방은 퀴퀴한 냄새, 동시에 알코올 같은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히야스.”
목소리를 낮게 깔며 불러오는 덴 케이의 모습에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던 히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아슈팔은 그런 히야스의 모습에 입술을 짓씹었다.
마음 같아선 왜 그렇게 있냐며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히야스의 얼굴이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를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스승이 안쓰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케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화가 섞인 목소리를 낮게 깔며 물었다.
“이게 무슨 꼴이지?”
명백한 비난의 어조에 히야스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결국, 부수고 들어왔구나. 그래. 이 학교에선 네가 최고였지, 다 네 마음대로였고.”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렸다.
“그래서 그 인간의 딸을 클레이즈로 부른 거냐?”
“역시 봤군.”
“역시 봤군? 이 개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심할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에 아슈팔이 숨을 삼키며 이사장을 슬쩍 흘겨봤다.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을 부수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 표정 차가 없었다. 그저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어떤 말을 해줄까.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부정?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진실?”
“닥쳐. 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유림이 그 인간의 딸인 걸 알면서도 나한테 넘겨? 내가 그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너야!”
“그래, 가장 잘 알지. 선배가 너한테 뭘 부탁했는지, 그리고 그게 너한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랬음에도 날 속여?!”
“속인 건 아니야. 단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가증스러우리만큼 태연한 케이의 말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히야스는 실성한 사람마냥 웃어젖혔다.
“너… 진짜 개자식이다…….”
자신이 그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버젓이…….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가 갈렸다.
아슈팔은 이대로 있다간 두 사람이 크게 싸울 것 같아 히야스를 말렸다.
“교수님… 이사장님은 교수님을 생각해서…….”
그러나 자신이 큰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히야스가 눈을 홉뜨더니 이내 더할 수 없을 만큼 표정을 구겼다.
“아슈팔…… 너도 알고 있었어?”
“교수님…….”
“하- 제길, 이 빌어먹을 새끼들. 그러면서도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한 거야? 하…… 하하…… 진짜 엿 같네. 그러니까 결국 나만 몰랐다는 거잖아. 설마 샨도 아냐? 다 알면서 나한테 한유림을 도와달란 부탁을 한 거야?”
“……그건 아닙니다. 샨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네가 말해줘서?”
히야스의 날이 선 질문에 아슈팔이 입을 다물었다. 긍정의 의미가 담긴 침묵이었다.
화가 나다 못해 이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히야스가 다시금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계속되는 웃음이 흐느낌을 동반한 절규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마냥 아팠다.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 끔찍했고, 자신에게 찾아온 현실이 기가 막혔다. 그리고 요 일주일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보다 많은 애정을 유림에게 주었다는 것을.
비록 그것이 자신 못지않게 불우한 과거를 산 이에 대한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자신은 그 누구보다 유림을 귀애했다. 그래서 더더욱 보살피고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래…… 정말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 자신도, 유림이나 아슈팔의 스승으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마치 신이 헛된 욕심에 대한 벌을 주는 것만 같았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기다니…….
“히야스 진정해.”
덴 케이의 말에 히야스가 흐느낌을 뚝 하고 멈췄다. 그러곤 핏발 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진정? 웃기지 마. 너 같으면 진정이 돼? 정을 줬어. 시발, 주위에 아무도 두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내가 제자랍시고 정을 줬어! 근데 그 애가 그딴 인간의 양딸이라고!”
“유림이 선배의 양딸인 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어! 그 인간의 엿 같은 사상이 유림이한테도 이어졌을 텐데!”
히야스의 발악에 덴 케이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역시나 이것이 문제였다. 한하림이 가지고 있던 고귀하리만큼 순수한 사상.
하지만 그 신념은 유림으로 인해 바뀌었다. 그저 그 사실을 히야스가 모를 뿐이었다. 아니, 말을 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나 유림과 달리 히야스가 느낀 고통과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니 말이다.
덴 케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다른 건 몰라도 히야스만큼은 유림이 하림의 양녀라는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었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중에 차분히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이런 식이 아니라 제대로 천천히 말이다.
“하…… 난 그것도 모르고 다 가르쳐 줬네. 매주 녀석을 훈련시키고 같이 떠들고 웃고…… 제길, 병신 같은 놈. 왜 몰랐지? 한유림……. 그 인간이 말했던 거잖아. 아들이면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주고, 딸이면 유림이란 이름을 주겠다고 몇 번이고 말했던 거잖아. 젠장 젠장 젠장!!!”
그가 분노를 표출하며 앞에 있는 테이블을 걷어찼다. 테이블이 무너지며 그 위에 놓여 있던 술병과 잡다한 서류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고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잔뜩 붉어진 눈으로 덴 케이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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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