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87
제 187 화
무슨 장치라도 있는 걸까. 미로에 진입하는 순간 어디선가 종소리 비슷한 것이 울렸다.
유림은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간의 제한 시간을 알리는 바늘이 벌써 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3시 반까지 나오면 되는 건가…….”
조금 넉넉하게 통과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는지 모르겠다.
대충 시간 분배를 생각하며 친구들과 함께 모퉁이를 하나 돈 유림은 확연히 달라진 미로의 분위기에 눈을 깜빡였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주변을 빠르게 살피기 시작했다.
“어쩐지…… 밖에서 본 거랑 좀 많이 다른 거 같지?”
하민의 말에 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침하네…….”
실로 밖에서 본 것과 달리 미로 안은 상당히 스산했다. 벽도 거칠었고, 바닥도 울퉁불퉁해 넘어지면 생채기가 날 것 같았다.
“안개도 있다. 담력 시험도 아니고 이게 뭐냐.”
테오가 발밑에 있는 하얀 안개를 차며 킬킬 웃었다.
유림과 디하르는 좀 더 주의 깊게 살폈다. 향이나 늄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특별한 효과가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진짜 이런 거 잘도 만든다니까.”
“해우 교수님 능력 아닐까. 입학시험 때도 그랬잖아.”
디하르의 말에 유림이 입학시험 3차시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검은 안개니 뭐니 신기한 것들이 곧잘 등장하곤 했었다.
“작은 생명도 성물일까?”
“글쎄.”
해우 교수님이 담당을 맡은 거 보면 그럴 확률이 높겠지만, 확신하기엔 조금 일렀다.
“일단 어느 쪽이든 가볼까?”
일행은 그대로 길을 따라 쭉 걷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아직 초반이고, 또 미로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별생각 없이 좀 더 끌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한쪽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말이다.
미로는 일행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어떨 땐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느낌도 들었다.
륜은 길이 막히거나 다시 돌아와야 했을 때를 대비해, 골목이 나타날 때마다 들어간 쪽 방향의 벽에 작은 칼집을 내놨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계속된 걸음에 다리도 아프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의문이 갈 때였다. 출구의 ‘출’ 자도 보지 못하자 테오가 짜증 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짧은 머리를 박박 헤집으며 열을 내는 모습에 루아도 걱정이 됐는지 드물게 자신 없는 얼굴로 물어왔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막힌 골목이 없었으니까,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말을 하던 하민이 입을 다물었다. 문뜩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30분을 넘게 걸었다. 근데 막힌 골목을 하나도 만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이곳이 그냥 길이라면 이렇게 문제 되진 않는다. 하지만 여긴 미로였다. 출구가 정해져 있고, 그곳까지 가는 정답이 있단 소리였다.
물론, 규모가 어마무시하니 그 길이 여러 개일 순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막힘없이 가는 게 확률적으로 가능한가?
그러고 보니 지하 수련장의 미로도 이랬던 거 같은데……. 잠깐, 여기 설마 정말로 히야스 교수님이 만든 거 아냐?
그리 생각하며 이를 친구들에게 말하려 할 때였다. 륜이 모두를 불러왔다.
“아무래도 같은 곳을 도는 게 맞는 거 같아.”
일행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제 옆의 벽을 가볍게 가리켰다. 그곳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흠집이 짧게 그어져 있었다.
“아까, 내가 칼로 그어놓은 거야.”
“…….”
그제야 일행은 정말로 자신들이 같은 곳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구조가 그런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쨌건 길을 잃은 건 확실했다.
“거기다 작은 생명도 안 나오고 있어.”
덧붙이는 디하르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미로의 길에 정신이 팔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만큼 돌았으면 팻말의 ‘작은 생명’이 한 번쯤은 등장했을 법한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작은 생명‘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두 마리 이상이라는 건데 그걸 여태 못 보는 건 좀 이상했다.
어쩌면 이 미로의 최대 핵심은 열쇠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없다면 설령 여섯 명 전부가 미로를 빠져나갔다 해도 3층으로 갈 수 없으니 말이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냐!”
테오가 정말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등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술까?”
“부수다니? 벽을?”
“어.”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야, 다들 뒤로 가봐.”
“진짜 하려고?”
륜이 좀 기다려 보라며 테오를 말리려 했지만, 그보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게 먼저였다.
엄청난 양의 늄이 검날에 모이더니 이내 벽과 부딪치며 크게 폭발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풍압에 안개가 뒤로 흩어졌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이 좁은 길에서 피할 곳 하나 없는 친구들을 둔 채, 저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쓰다니.
벽면을 시원하게 날린 테오는 다른 아이들이 돌조각의 파편을 맞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크하하하. 진작 이렇게 할걸. 야, 길 생겼다.”
테오의 말대로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륜은 테오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뭐라 한 소리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갑자기 벽이 진득한 반죽처럼 꿀렁이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본래의 모습으로 수복되고 말았다.
테오가 질겁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뭐, 뭐냐. 이게?”
“세상에…….”
“복구됐어…….”
아이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유림은 이 미로가 히야스가 만든 미로와 비슷하단 걸 확신했다. 그렇다면 공략법이 얼추 나왔다.
“갈라지자.”
유림의 말에 다섯 쌍의 눈동자가 그녈 향했다.
“따로 다니자고?”
“응. 벽을 부술 수 있다는 게 증명됐잖아. 수복되긴 하지만, 빨리 움직이면 넘어가는 건 가능할 거야. 거기다 륜이 표시한 건 안 사라졌잖아. 그렇다면 이렇게 충격이 큰 방법만 아니면 흔적을 계속 남기는 것도 가능해. 그러니까 열쇠부터 찾는 게 먼저야.”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열쇠와 테오만 있으면 무식한 방법으로라도 탈출 가능할 테니. 운이 좋으면 몇몇은 자연스럽게 출구를 찾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작은 생명이 이렇게 보기 힘든 거라면 흩어져서 찾는 편이 빨랐다. 어쩌면 뭉쳐 다녀서 안 나오는 걸 수도 있다.
“위험하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을 고려하면 같이 다니는 것보다 나을 거야.”
루아를 설득한 유림이 주머니에서 키르를 꺼내 들었다.
“일단 통신이 되는지부터 확인하자.”
하민과 루아도 키르를 꺼냈다. 클레이즈 안이어서 그런 걸까. 다행히도 별문제 없이 연결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에게 연락하기로 한 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한 명씩 갈라져 따로 길을 찾아 나섰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일행과 떨어진 유림은 주변을 계속 살피며 꽤나 신중한 발걸음을 옮겼다.
히야스가 만든 훈련용 미로와 비슷한 걸 알아서 그런지 자꾸 어디선가 뭔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목각 인형이나, 함정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여기엔 그런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움찔움찔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꼭 그 뒤엔 민망함과 함께 나자빠진 저를 보며 웃던 히야스가 떠올랐다.
‘……집중 안 돼.’
중요한 시험이니 온전히 몰두하고 싶은데 그렇게가 안 됐다. 꼭 마음에 돌멩이가 들어찬 것 같았다.
최악인 건 몸 상태까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단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게 끝이었는데 지금은 목도 칼칼했고, 머리도 울렸다. 그나마 열이 오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젠장.’
유림은 목도리를 다시 꽁꽁 고쳐 묶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지만 이건 좀 심한데…….
몸이 안 좋으면 머리라도 맑아야 하는데, 히야스 교수님 생각으로 집중도 못 하겠고.
결국, 유림이 벽에 몸을 살짝 기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따뜻한 이불에 들어가 자고 싶단 생각이 가득했다.
바닥의 안개가 한층 더 짙어진 건 그때였다. 으스스한 한기와 함께 희뿌연 안개에 시야가 점점 잡아먹혔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부조화한 풍경 변화에 유림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말이지 사람 쉬는 꼴을 못 본다니까.
그녀는 등을 벽에 붙인 채, 주머니의 나뭇조각을 꺼내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있다. 설마 그 작은 생명인지 뭔지인 걸까.
“……그랬으면 좋겠네. 덤으로 열쇠도 좀 얻고.”
늄을 가볍게 부여해 나뭇조각을 길고 얇은 장검으로 변형한 유림이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살짝 낮췄다.
단순한 기척이던 것이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안개 너머로 인영이 나타났다.
유림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작은 생명이라치기엔 그 그림자가 너무 컸다. 심지어 점점 선명해지는 실루엣은 사람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어라? 작은 생명이 아니야? 혹시 남자애들인가?
“거기 누구야? 디하르, 너야?”
자세를 편히 고치며, 검을 든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날카로운 검이 손에서 빠져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새하얀 휘장을 들추듯 안개를 가르고 나타난 남자. 다름 아닌 유림의 하나뿐인 스승, 히야스였다.
“……히야스 교수님?”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비벼봤지만, 눈앞에 보이는 이는 분명 그가 맞았다.
어울리지 않는 흰 가운, 지저분하게 뻗친 머리, 그리고 제대로 못 쉬었는지 피곤이 가득한 얼굴.
어째서 교수님이 이곳에 계신 거지?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 진급시험 감독관으로 참여 안 하신다고 했는데…… 왜 여기 계시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너무 놀라 그런지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유림은 앞머리를 움켜쥐며 동그란 눈만 연신 깜빡였다.
곧이어 그가 입을 열었다.
“한유림.”
유림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히야스의 목소리였다, 여행 이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히야스 교수님의 목소리지?
유림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자신의 앞에 있단 사실 때문에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교수님…….”
그렇게 유림은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좀 더 그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그러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옅게 미소 띠던 그가 갑자기 유림을 향해 돌진하더니 바로 그녀의 턱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유림은 미로의 안이 아닌, 규칙이 쓰인 팻말 아래 누워 있었다.
“……엥?”
아주 멍청하고도 한심한 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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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