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91
제 191 화
덴 케이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온실의 유리 천장을 바라봤다.
대부분의 학생이 진급시험을 보러 가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저를 괴롭히던 전임 교수들조차 시험을 담당하느라 이곳에 찾아와 제 속을 들쑤시지 않았다.
모처럼만에 쉬는 것 같은 느낌에 그가 옅게 미소 띠었다. 그때였다, 한적함을 깨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것이.
덴 케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인물을 바라봤다.
지저분한 머리와 백색의 가운, 그리고 며칠 동안 고생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평소보다 더 초췌한 얼굴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히야스-”
그렇다. 드디어 히야스가 방에서 나와 덴 케이를 만나러 나온 것이다.
케이는 그 사실이 기분 좋은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히야스는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쏘아붙이듯 날카롭게 바라봤다.
“웃지 마. 너 웃으라고 나온 거 아니니까. 단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왔을 뿐이야.”
“그래.”
“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 유림이 그 사람의 양딸이라는 것도 또 내부의 적인지 뭔지한테 실험을 당한 것도…….”
“알고 있었어. 선배가 그리 말해줬으니까.”
히야스는 입술을 질겅였다. 마치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태도였다.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헤집는 그.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하나만 묻자. 그 인간…… 진짜 후회했냐?”
유림이 다녀가고, 아슈팔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히야스는 유림이 하림의 양딸이라는 걸 안 이후 처음으로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가 놓치고 있던 끔찍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유림이네한테 그 잔인한 실험을 한 이들이 내부의 적이고, 한하림이 그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히야스는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고 봤다. 그건 타고난 것이었고, 가치관도 이에 속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하림이 후회했다는 케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그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모순이 들었다. 왜냐하면 히야스가 아는 그 사람은 누구보다 착하고 정이 많았으며 지독히도 이상적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런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다 해도, 막상 실험체였던 유림을 마주하면 그 착한 심성이 양심과 상식이란 걸 일깨워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유림에게 속죄하기 위해 그 애를 양딸로 받아들이고 정을 준 게 아닐까?
히야스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진급시험, 절대 우연으로라도 유림과 마주칠 수 없는 지금 시간을 이용해 케이를 만나러 온 거였다.
그가 숨을 고른 뒤, 다시 물었다.
“정말로…… 유림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어?”
케이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히야스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림이 사혈에서 보낸 시간도 실험의 연장이었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것도 아니면 차근차근 제 생각을 주입했을까 봐?”
“……안젤리카의 일까지 다 알면서도 그따위 말을 지껄였던 인간이야. 유림의 사정을 안다고 바뀔 리 없잖아.”
“그리 확신하면 나한텐 왜 확인하러 온 거지?”
“말장난하지 말고 빨리 답해. 그 인간, 정말로 후회했어? 유림에게 그 썩어빠진 일을 시키지 않았냐고.”
그렇다. 히야스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한유림이란 사람이 한하림이란 인간한테 그 엿 같은 사상을 배우지 않았단 것.
“그렇다면 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애당초 선배가 유림에게 강요한다 해서 순순히 따라갈 애도 아니었고.”
“……무슨 의미야?”
“유림이 하림 선배보다 너를 더 닮았단 소리야. 그리고 만일 하림 선배가 네게 했던 말을 그대로 강요했다면…… 걔는 지금 이 클레이즈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쩐지 자조적으로 보이는 미소에 히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늘 느껴왔던 거지만, 유독 케이의 생각만큼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의중이 뭔지, 또 무엇을 노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제 행동이 자의적인 게 아니라 그에 의해 유도되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꺼림칙한 느낌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히야스는 짜증 난다는 듯 케이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더는 얼굴 맞대고 싶지 않았다.
“히야스.”
낮은 목소리가 온실을 울렸다. 히야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빨리 말해.”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냉정한 목소리였다.
케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림이 네 걱정을 많이 한다.”
“…….”
“어른이 애를 걱정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
히야스가 고개를 돌려 덴 케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더니 이내 혀를 차며 온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었다. 듣고 싶은 것은 들었고, 덴 케이의 헛소리를 들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으니까.
분노를 여실히 담아내듯 거친 걸음으로 온실을 빠져나온 히야스는 입구에서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안젤리카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넌 왜 여기 있냐. 서고 안 지켜?”
“아버지가 걱정돼서 와봤습니다. 얘기는 잘하신 건가요?”
“잘하고 뭐고 없어.”
“아버지…….”
“그냥…… 그래. 이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결론을 내려고 나온 거야.”
정말로 모순 그 자체였다.
유림과 하림의 관계, 유림이네 애들과 내부의 적의 관계, 자신과 하림의 관계, 자신과 유림의 관계.
뭐 하나 시원한 게 없었다.
계속 하림의 말과 유림이 울면서 저를 찾았던 것이 교차로 떠올랐고, 덴 케이와 아슈팔의 헛소리까지 더해져 머릿속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 와중에 유림이 안젤리카 7호를 통해 한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한층 더 심란해졌다.
결국, 히야스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그 녀석에게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서 이리 온 것이다. 만일 유림이 하림과 같은 사상을 가진 게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히야스가 걸음을 빨리하자 뒤따라오던 안젤리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 천천히 가요.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렇게 도망치듯 걷는 거예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히야스가 걸음을 늦췄다. 그러더니 뭐 씹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다니까.”
투덜거림과도 같은 목소리에 안젤리카가 옅게 웃었다.
“유림 양과 마주칠 일도 없을 겁니다. 진급시험을 보느라 바쁠 테니까요.”
히야스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분명 잘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도 그러지 않았던가, 잘하고 오겠다고.
그래. 말했던 대로…….
“…….”
순간 히야스가 걸음을 뚝 하고 멈췄다. 뭔가, 아주 기분 나쁜 감각이 뒷목 언저리를 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뭐지? 왜 갑자기 이런 위화감이 드는 거지?’
히야스는 저를 따라 멈춘 안젤리카가 부르는 것도 못 들은 채, 계속 이 느낌의 원인을 찾았다.
내가 혹시 뭘 놓치고 있나? 유림이 무슨 말을 또 했었나?
그는 이마를 짚으며 유림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제 아버지가 한하림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버지인 건 아니고, 또 전 아버지의 이상에 반한다고요. 그리고 교수님이 어떤 절망을 느꼈는지 그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으니까…… 교수님이 걱정하시는 그런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전해주세요.”
마치 유림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그때의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히야스는 거듭 그 말을 떠올렸다. 마치 무언가 큰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지? 뭐지?
대체…….
“……어?”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유림이…… ‘공감’이란 단어를 쓰던 애였나?”
그래. 이게 찝찝했다. 유림의 목소리로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 단어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예?”
안젤리카는 히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안젤리카. 너 유림이 ‘공감’이란 말 쓰는 거 들어봤냐. 아니, 이걸 떠나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걔가 그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대. 어떻게 생각해?”
“제가 유림 양이랑 뭐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해봤다고…… 거기다 그게 뭐가 문젠데요?”
“보통 이해라고 하잖아, 저런 단어 안 쓰고.”
“그냥 어감 차이 아닌가요?”
“아냐. 뭔가 좀 이상해. 그 뉘앙스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 좀 달랐단 말이야. 거기다 묘하게 표현이 격해. 공감이라니 절망이라니…….”
그리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히야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추측조차 못 하던 끔찍한 가설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거야…….
애써 부인하는 히야스의 머릿속에 좀 전 덴 케이가 했던 말이 메아리치듯 퍼졌다.
“유림이 하림 선배보다 너를 더 닮았단 소리야. 그리고 만일 하림 선배가 네게 했던 말을 그대로 강요했다면…… 걔는 지금 이 클레이즈에 있지도 않았겠지.”
“…….”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히야스는 몸을 돌려 가던 방향을 바꾸었다. 왜 그러냐는 안젤리카에게 설명을 해줄 정신 따윈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유림을 만나야 했다, 가능한 한 빨리.
***
디하르와 루아, 테오, 그리고 륜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로를 바라봤다. 3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이미 유림이 건넨 열쇠로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이제 유림과 하민만 도착하면 되는 것이다.
“……괜찮겠지?”
루아의 걱정에 디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을 거야.”
“지금 몇 분 남았어?”
“3분 정도…….”
“그럼 하민이 미로 안으로 들어왔겠다.”
그 말을 듣던 테오가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발을 까닥였다.
“제길, 이 두 녀석 어떻게 된 거야. 똥줄 타 죽겠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괴성이 미로를 울린 건 그때였다.
네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게 설핏 보였다.
“뭐, 뭐야?”
너무 놀란 테오가 갈라진 목소리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게 뭔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곰?”
“곰이라니? 앗, 설마 마조나 새디야?”
루아의 말에 륜이 당최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벽 부수는 건 애매해서 도전 안 할 거라지 않았어?”
거기다 그럴 거였으면 여기다 두고 간 나뭇조각은 또 뭐란 말인가.
“난 쟤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테오의 중얼거림에 바닥과 곰의 머리를 번갈아 보던 디하르가 무언가를 알아챈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유림이 생각한 계획을 깨달은 순간, 그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을 만큼 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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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