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97
제 197 화
‘샨.’
설마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날이 다시 올 줄이야.
유림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모르게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받은 자료도 좀 있고요.”
어머니. 설마 어릴 때 있던 연구소 연구원의 딸이었던가?
그렇다면 샨이 말한 ‘넘어갔다는 내 자료’가 이즈네에게 간 걸 수도 있었다.
“세상 한번 좁네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틀자 이즈네가 팔짱을 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샨’이라는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유림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었다.
좀 더 서늘했고, 조용했으며, 어쩐지 어두웠다.
어쩌면 이것이 어머니가 말했던 ‘샨’의 모습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인가요?”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진짜 모습이란 게 따로 있나요. 그저 대하는 사람에 따라 태도가 다를 뿐이죠.”
“그럼 적을 대할 때 이렇게 하나 보죠?”
적.
유달리 귀에 쏙 들어오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유림은 지금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사람을 이미 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면서 저리 말하는 건 또 뭐냐고 말이다.
어쨌든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즈네 교수가 자신들이 그렇게 찾던 내부의 적 중 한 명이라는 것.
근데 왜 직접 정체를 드러낸 걸까, 그것도 하필 진급시험 때.
유림은 그리 생각하다, 문뜩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필 진급시험 때 나타난 게 아니라, 진급시험이기에 나타난 것이었다.
학생이며 교수며 다 해당하는 시험에 집중하고 있고, 또 무슨 일이 생겨도 담당 교수가 아니고선 이를 파악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젠장…… 골치 아파졌네.
다른 아이들이 걱정되는 한편, 이 상황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이즈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신경 쓰였다.
그때 넘어갔다는 정보에 어디까지 적혀 있을까……. 설마 그거까지 아는 건 아니겠지?
유림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쨌든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누군가가 이상을 눈치챌 때까지.
“……교수님, 제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하지 않았나요?”
“제 정체를 알면서도 너무 의연하네요. 좋아요. 이렇게 된 거 대놓고 말하죠. 한유림 양. 난 당신이 죽도록 싫어요. 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그렇지만 그 외에도 당신이란 존재가 역겨울 만큼 거북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저희와 함께할 생각 없나요?”
뭐?
상상도 못 했던 말에 유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연히 과거의 사건이나 연구, 그도 아니면 아버지에 대해 물을 거라 생각한 예상을 뛰어넘는 질문이 들려왔다. 너무 놀란 유림은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혹은 그녀가 농을 건네나 싶어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고, 또 농담도 아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우리와 뜻을 함께하지 않겠냐고 묻는 겁니다.”
“……영입한다는 거예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 전 저 죽이겠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아니요. 당신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죽일 겁니다. 거북한 존재를 괜히 살려둘 필요는 없죠.”
인제 보니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회유하려는 걸까. 물론 머리가 커 어릴 때처럼 쉽게 부릴 순 없겠지만, 실험을 이어가고 싶은 거라면 강제로 끌고 가면 됐다. 인질로 쓸 만한 애들도 늘어났다. 루아, 레이먼 남매야 가문 때문에 못 건드린다 해도, 제일 친한 은하는 집안 형편도 안 좋고, 잡아가기도 쉽지 않은가.
“…….”
유림은 그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이즈네를 찬찬히 살폈다. 뭐, 그런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금 ‘한유림’이 아닌, ‘샨’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다.
“이즈네 교수님, ‘샨’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샨’이 아닌 ‘한유림’이죠.”
그래. 아주 오래전, 그 이름을 버리면서 과거의 자신을 땅속에 묻기로 했다. 이미 자신에게 있어 그 존재는 죽은 이였다.
때문에 그녀의 거래는 조건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거절한다는 건가요?”
“거절이고 나발이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한유림의 의견을 묻는다면 그건 거절이고요.”
거절을 당했음에도 마치 승낙을 받은 것처럼 이즈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거절을 해서. 솔직히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가 당신이 필요하다 하는지 말이죠.”
‘그.’
대체 누구일까.
유림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쨌든 간부 교수 사이에 숨어 있는 내부의 적이 이즈네 혼자가 아닌 건 확실해졌다. 저렇게 도도하고 제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자신보다 낮은 실력의 말을 들을 리 없으니까. 거기다 이쯤 되었는데 그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혹시 4층 탑의 담당 교수님 중, 내부의 적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이즈네 교수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멋대로 혼자 남의 시험장까지 와서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탑을 맡은 해우 교수님이나 하진 교수님 중 한 분이 그녀와 같은 편일 확률이 높았다, 재수 없으면 둘 다고.
‘그럼 정말 최악인데…… 다른 애들도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린 거 아니야? 하민이랑 디하르, 괜찮은 거겠지?’
“이런 상황에서 딴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네요.”
귓가에 들려오는 이즈네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날렵한 검 한 자루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기사들이 경합에서나 쓸 법한 얇고도 날카로운 검날이 정확하게 자신을 향했다.
“제가 한 말 잊었나요? 당신을 살려두지 않겠다고 한 것 같은데 말이죠.”
유림은 비녀를 뽑아 들어 기다란 장검으로 변형시켰다.
몸 상태는 아직도 안 좋았고, 이미 한 번 변형했던 비녀는 내구도가 떨어졌다.
주머니에 나뭇조각이 몇 개 남아 있더라. 과연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 누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진짜 팔자 한번 더럽게 사납네.”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어두운 방. 유림은 온몸의 감각을 집중했다. 그리고 감각이 최고조로 예민해졌을 때, 이즈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
“깨부순다.”
재우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그의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네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깨고 산산조각 내버리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결계를 내려치는 재우의 모습에 샨이 입매를 굳혔다.
이 결계가 그의 말대로 정말 해우 교수가 만든 거라면, 그가 내부의 적, 혹은 그들과 관련이 있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재우 또한 의심해 볼 사람이란 걸 의미했다.
물론 지금 그가 보여주는 행동으로 봐선 아닐 확률이 더 높았지만, 100% 확정된 게 아닌 한 안심하면 안 됐다. 어쩌면 이 또한 자신들을 이리로 유인하고 떠보기 위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때 재우가 그를 불렀다.
“샨, 요한.”
시선은 계속 결계를 향한 채, 말이 이어졌다. 평소의 그에게선 볼 수 없는 진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희가 나를 의심한다 해도 상관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 지금은 이 결계를 깨는 게 우선이야.”
그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빠드득 갈았다.
“형이…… 뭐 때문에 이런 형편없는 짓거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그냥 못 넘어가. 그래……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꼭 알아내고야 말겠어.”
그는 결계에 올려놓았던 손을 뗐다. 그런 뒤 늄을 집중시켜 자신의 몸을 비롯해 주변에 있는 네 사람의 상태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을 동시에 이 상태로 만들다니. 심지어 접촉도 없었다.
“다들 거들어. 이거 나 혼자 절대 못 깨.”
거들라니.
재우의 말속에 숨겨진 뜻을 깨달은 코니룸이 마른침을 삼켰다.
“충돌을 일으키자는 거야?”
“그 수밖에 더 있어?”
성질이 다른 여러 늄이 동시에 만났을 때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 충돌.
그 위력과 규모를 계산할 수 없어 보통은 전쟁이 아니고선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한 힘이었으니 말이다.
“내 클레이즈 다니면서 이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코니룸이 입술을 짓씹으며 늄을 집중했다. 미야도 식은땀을 흘리며 손에 불길을 휘감았다.
“……다들 적당히 해. 재우가 지금 몸 상태를 최상으로 올려놓았으니까.”
샨과 요한도 지금만큼은 의심을 접고 이에 협력하기로 했다.
그들의 주변으로 거세게 늄이 휘몰아쳤다.
바람이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며 맴돌았고, 늄의 기류가 충돌하며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다섯 사람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탑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재우의 신호에 맞춰 결계의 한 부분을 노렸다. 아니, 노리려 했다.
“그만 못 해?!”
그들을 막는 리리아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언제 도착했는지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섯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곧이어 화가 담긴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찔렀다.
“대체 뭐하는 짓들이야?!”
미야와 요한이 불길과 유령을 거둬들였고, 코니룸과 샨이 늄을 허공에 흩트렸다.
리리아는 유일하게 늄을 집중하고 있는 재우에게 다가가 매섭게 그를 쏘아봤다.
“그만하라는 소리 못 들었어? 너 지금 이게 뭐하는 거야. 네가 이러면 해우가 곤란해지는 거 몰라?!”
“하? 누나 지금 장난해?”
평소였다면, 학교에서 절대 리리아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재우가 흥분했는지 애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리쳤다.
“바보야? 등신이야? 지금 이걸 보고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몰라?”
“…….”
재우의 다그침에 리리아가 입매를 굳혔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탑을 둘러싼 결계가 다름 아닌 해우의 작품이라는 것을. 그러나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별일 아닐 거라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른 이유?! 지금 나랑 장난해?! 이게 다른 이유가 있다 해서 설명될 상황이냐고!!”
“석재우!!”
“형이 지금 등신 같은 짓을 하고 있어! 저 안엔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서른 명이 있다고!! 이게 무슨 소린지 아직도 이해 못 해?! 형이 애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단 소리야!!”
악에 받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우는 참아 있던 화를 터트리기라도 하듯 계속 소리쳤다.
“애당초 이건 단순한 결계가 아니야! 난 형이 이렇게 지독한 결계를 친 걸 처음 봤다고!! 그 누구보다 누나가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알아, 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야!”
말이 안 통했다.
재우는 대화를 포기하고 몸을 결계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리리아가 다시 잡아왔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가르고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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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