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1
제 21 화
“림림, 이거 그때랑 비슷하다.”
“그때?”
“우리 첨 만난 날.”
“……야, 나 좀 불안해지려 하는데?”
유림이 웃음을 딱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정말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하지 마, 그때보다 강해졌다고!”
“……아니, 그래서 더 걱정이야.”
아, 이거 얘한테 맡겨도 되나?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그러나 유림에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 은하보다 빠르고 강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더욱이 자신의 체질을 보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은하는 유림의 불안을 눈치채지 못한 채, 믿음이 1%도 안 가는 미소를 지으며 친구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늄을 잡아 이끌었다.
순간 유림의 몸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루아와 레이먼, 그리고 뒤에 있던 두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포근해질 정도로 평온하고 따스한 기운이 주위를 감쌌다.
환한 빛을 뿜으며 온기를 품던 기운은 은하가 심호흡을 하는 순간, 흩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간만에 제대로 했군.”
처음 봤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간 유림이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옷이 심하게 해지지 않고,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지 않았다면 다쳤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멀쩡한 상태로 말이다.
흉터조차 없이, 아니, 다쳤다는 흔적조차 없는 유림의 상태에 루아도 레이먼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저 둘만 번갈아 봤다.
은하는 자부심에 허리를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흥! 나 이제 잘하거든?”
“아, 그래. 이번은 잘했으니 봐줄게.”
유림은 어깨와 목을 가볍게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확인하곤 미소 지었다.
“내 전용 주치의, 역시 쩌내.”
유림의 드문 칭찬에 은하가 히히 소리를 내며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박은하수. 방년 19세의 꽃다운 처녀. 고위 신관들의 실력을 웃도는 치유력을 가진 아주 뛰어난 능력의 조율자(치료사)였다. 그리고 유림의 전용 주치의이기도 했다.
테오는 데몽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유림의 치료가 완벽하게 끝나고, 남은 조금의 시간 동안 디하르를 찾겠다는 유림 일행에게서 륜을 빌미로 잠깐 따로 하기로 한 두 사람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테오는 답지 않게 인상을 팍 구긴 채 낮게 이를 갈았다.
“너 이 개새끼, 일부러 그랬지.”
“이거 놓고 이야기해.”
“시발, 미친 거 아냐? 히넨 휴, 솔직히 말해봐. 알고 있었잖아.”
평소와 달리 본명까지 불러가며 화를 내는 테오의 모습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는 데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제 목을 움켜쥔 손을 풀었다.
“이거 놓고 말하랬다.”
“개자식, 역시 알고 있었잖아!”
“아, 그래 알고 있었어.”
데몽이 심드렁하니 대답하며 테오에 의해 구겨진 옷을 정리했다. 그는 가볍게 옷을 털며 주름을 펴더니 이내 안경을 고쳐 쓰기 시작했다.
성격을 반영하듯 시리도록 날카로운 은테 안경이 달빛에 반짝였다. 어떻게 보면 거만해 보이는 데몽의 태도에 테오가 혀를 찼다.
역시 이 개자식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림이 어떤 상태로 떨어질 것인지, 또 은하가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도 말이다.
“하지만 어떡해. 미션을 통과하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는걸.”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죽일 만큼 패고 싶었다.
“구라치지 마, 개새끼야. 구름 고래는 아가미 쪽을 계속 공격하면 살기 위해 뿔을 부러트리고 도망쳐. 그게 아니더라도 륜과 같은 신체 강화계들이 힘을 실어 급소를 한 번에 내려치면 부러트리고 도망치기도 해. 그 사실을 나도 아는데 네가 모른다고, 천하의 히넨이?”
“오…… 의외로 똑똑하네.”
“젠장, 까딱하다간 한유림이 죽을 수도 있었어.”
“본인이 안 죽는다잖아.”
“그 상황에선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해. 교묘하게 말을 틀었잖아.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을 약점 삼아서 한유림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다고 하게끔 말을 꺼냈잖아. 내가 아는 네놈은 ‘안 된다’ 하는 작전은 절대 초반부터 입 밖으로 안 꺼내. 하다 하다 결국 안 될 때, 최후의 수단을 꺼내는 것이 네놈이야. 내가 너하고 하루 이틀 알아?”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내는 테오의 모습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데몽이었다. 그는 지금 너무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야, 테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냐?”
“그럼 안 나? 네놈 때문에 사람 하나가 죽을 뻔했는데?”
“아니, 그니까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냐고. 한유림을 안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됐어. 여자를 아무리 좋아한다지만 걘 좀 아니지 않냐?”
“말 돌리지 마! 그리고 나의 피앙세는 루아야.”
뭔가 핀트가 벗어난 것 같지만 따지지 않기로 한 데몽이었다. 그는 코끝을 가볍게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왜 그렇게 정 주냐?”
“앞으로 함께 지낼지도 모르는 동지야, 같이 공부할 수도 있는 녀석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이기적으로 움직여야겠냐?”
“야, 테오. 네가 이곳에 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너나 나나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야. 우리의 목적은 입학이라고.”
“……!”
태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에 테오가 딱딱하게 굳었다.
데몽의 말대로 자신들은 이곳에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중요한 목적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죽기 살기로 준비했다. 이번이 유일한 기회이며 필사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림을 저렇게 고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 사실을 데몽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행동을 하고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나름 그만한 이유가 있단 소리였다.
“뭐야…… 한유림한테 뭔가가 있다는 거야? 설마 그 녀석들과 한편이라든지, 뭐 그런 거야?”
“…….”
테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데몽은 아무런 대답 없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옷으로 렌즈를 닦았다. 한참의 움직임으로 희뿌예진 안경이 서서히 깨끗해져 갔다.
“내가 아까 재밌는 말을 들어서 말이야.”
“……뭐?”
“2차 시험 끝나고 디하르네들하고 유림이 따로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냐?”
기억난다. 그때 유림은 루아를 만났고 이야기 좀 하자는 말에 잠시 자신들과 떨어졌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매섭게 쏘아보는 루아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림 때문에 자신들이 자릴 피해준 거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잠깐 움직였던 거 기억해?”
데몽의 질문에 테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기억해.”
“내가 말이야. 그때 걔들 주위를 지나가다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어.”
“……뭘?”
데몽은 안경을 썼다. 깨끗하게 닦인 렌즈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 세상.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진한 웃음을 그려보았다.
“‘한유림’이 대체 뭐냐고 하더군.”
순간 테오가 행동을 멈췄다. 그는 데몽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다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뭐?”
“한유림에게 한유림이 뭐냐고 물었다고. 네 피앙세가 말이야.”
무슨 소리야? 테오는 데몽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유림한테 한유림이 뭐냐고 묻냐니. 세상에 이보다 황당한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데몽은 테오의 모습에 옅게 웃었다. 그러곤 다른 질문을 대답 대신 내놓았다.
“더 웃긴 사실을 가르쳐 줄까?”
“…….”
테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데몽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쩐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심장이 쿵쿵거리고 목이 죄여왔다.
쿵쿵쿵.
그리고 단두대의 칼이 떨어지듯 단호한 말이 데몽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유림은 작년에도 클레이즈의 초대장을 받았어.”
데몽이 처음부터 유림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처음엔 특이한 애네, 라고 의식을 한 정도였다. 그것이 좀 심해진 건 유림의 옷차림이 세계 제1의 마법 대학인 클레이즈의 입학시험을 보러 왔다기엔 지나치게 가볍다는 걸 깨달은 뒤였다. 무슨 일이 있
을지도 모르는 곳에 시험을 보러 오면서 저렇게 가볍게 입고 오다니. 그 사실이 데몽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런 신경이 의문으로 간 것은 자신의 초대장을 본 유림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건 단순히 데몽이란 이름이 자신의 본명이 아니라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마치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고, 그걸 숨기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눈치가 빠른 데몽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때 유림의 반응은 ‘너 본명이 데몽 아니냐’가 아니라 ‘왜 너는 본명으로 나오냐’에 가까웠다. 그렇다는 건, 유림의 본명은 따로 있고, 초대장엔 가명이 적혔다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의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유림을 의심하게 된 것은 디하르들을 만나면서였다.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인물 주위로 소꿉친구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들이.
데몽과 테오, 그리고 륜은 클레이즈에 들어오기 위해 어릴 적부터 준비하고 훈련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닌 듯한 그들이 이곳에서 만날 확률이, 아니, 역으로 말했을 때 이런 실력자들이 소꿉친구일 확률이 몇이나 될까?
장담할 순 없지만, 우연으로 치기엔 너무 적은 확률이었다. 때문에 데몽은 계속 그녀를 살폈다. 티 나지 않도록 의심했고, 유림과 루아네들이 한 대화를 듣는 순간, 자신의 의심이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한유림’이 누구냐고 묻는 루아. 유림은 그런 루아에게 사혈에 살게 되면서 그쪽 식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말한 뒤 앞으론 자신의 본명이 아닌 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초대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던 그녀는 품에서 꼬깃꼬깃해진 초대장을 꺼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작년에 이미 이 초대장을 한 번 받았다고 말이다.
클레이즈의 초대장은 단순한 초대장이 아니었다. 본질을 파악하는 힘이 부여되어 있어 열아홉 살 때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이나 받았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데몽은 유림이 할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뒤에 루아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난히 감이 좋았던 디하르가 데몽이 주위에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짐짓 모른 체하며 그 자릴 떠났다. 그러나 앞서 상황들과 듣게 된 대화로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조작.’
그렇다. 유림은 조작된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그 발신인이 ‘학교’인지, 아니면 ‘학교의 누군가’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유림이 조작된 초대장을 두 번이나 받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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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