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13
제 213 화
하루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앉아 나무를 깎고 있는데 은하가 대뜸 물어왔다.
“있잖아, 림. 너는 네가 한 일을 죽고 싶을 만큼 후회한다 했잖아. 그럼 그 친구들을 만난 것도 후회해?”
그게 루아들을 말하는 것임을 파악한 유림이 피식 웃으며 짧게 답했다.
“응.”
단호한 말에 꼬물거리던 은하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아이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이내 작게 물었다.
“그럼 만약에…… 그 친구들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엔 유림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시선을 은하에게 돌렸다.
표정이 제법 진지한 것을 보니,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닌 듯싶었다. 대체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니…….
의미도, 부질도, 가치도 없는 가정이었다. 우스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상상하던 내용이란 것이다.
만약 고아원을 처음으로 빠져나갔던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글쎄.”
대답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답이 정해지지 않은 걸까.
유림은 답을 얼버무린 뒤, 시선을 다시 손으로 내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저 나무를 깎는 소리만이 방을 울렸다.
***
샨이 몰래 고아원을 빠져나가 네 아이와 어울리기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사이 한 해가 지났고, 두 번의 계절이 바뀌어 이제는 매서운 겨울바람 대신 따스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열 살이 되었다.
샨은 눈에 띌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 행동이 대범해진 건 물론, 생각의 폭도 넓어졌다. 성격도 능동적으로 바뀌었고, 또 자신이 사는 고아원이 보통의 고아원들과 많이 다르단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덧붙여 바깥세상에 얼마나 멋지고 다양한 일이 넘쳐 나는지도.
때문에 샨은 바깥을 동경하던 후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이곳을 나가야겠단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고립되었던 사고방식이 깨어진 것이다.
그리고 샨이 이렇게 변하게 된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단연 네 명의 아이였다.
아이들은 무식자라고 할 수도 있는 샨에게 넘칠 만큼 다양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낚시하거나 낙엽을 모아 모닥불을 피운 뒤,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 먹기도 했으며, 눈산에서 썰매도 탔다. 일출을 보겠다며 산꼭대기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신문물도 많이 접했고, 여러 음식도 먹게 되었다. 물론 고아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건 한 개도 없었지만.
이렇게 샨이 밖에서 아이들과 함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추억을 쌓는 동안, 반대로 고아원 안은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갑자기 선생 일부가 바뀌었고, 아이 몇몇이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거기다 검사가 늘었고, 수업이 줄어들었다.
샨이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다만 뭔가가 상당히 께름칙하단 것뿐.
그리고 모든 일이 그러하듯, 변화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날이 엄청 따뜻해졌어.”
디하르의 말에 샨이 오렌지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꽃가루만 덜 날리면 딱 좋은데.”
“눈 가려워?”
“조금.”
다음엔 안약을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디하르가 오렌지 하나를 더 들 때, 계곡 근처에 있던 루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둘이 뭐해?”
“과일 먹어.”
“아직도? 진짜 엄청 잘 먹는다니까.”
샨에게 여러 음식을 먹여봤지만, 입이 짧아 많이는 못 먹었는데 신기하게도 과일은 잘 먹었다. 어쩌면 그래서 애들이 과일만 보면 이리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다른 거 가져다줄까?”
“오렌지는 안 돼? 이게 제일 맛있는데.”
“오…… 역시 입이 비싼 걸 아는 건가…….”
“비싸?”
“음…… 평균적으론 엄청?”
“얼만데?”
“알면 편하게 못 먹을걸? 그냥 모르는 게 나아.”
샨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금전감각이 떨어지는 자신에게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엄청 비싼가 보다.
수북이 쌓인 오렌지 껍질을 보며 너무 많이 먹은 건 아닌가 고민하자, 그 생각을 읽은 루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우리 집 돈 많아. 상자째 가져와도 문제없어.”
“진짜?”
“그럼. 너 하나쯤은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라니까. 그니까, 샨. 우리랑 같이 살래? 아버지한테 말하면 후원해 주실 텐데. 사실 살짝 말은 해놨어.”
이따금씩 꺼내는 말에 샨은 아니라며 도리질을 쳤다.
루아네들과 함께 사는 삶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샨에게 있어 집은 고아원이었다. 그리고 루아네가 아무리 부자에 대단한 귀족이라 해도 신세를 지고 싶진 않았다.
“아니, 괜찮아.”
“흐음…… 알겠어.”
약간 서운한 듯했지만, 루아는 더 강요하지 않았다. 그때 샨이 먹을 오렌지를 까던 디하르가 물었다.
“근데 계곡에선 뭐했어?”
“아~ 레이가 물놀이 이야기를 해서. 물이 많이 차나 만져 봤어.”
디하르와 샨의 얼굴에 황당이 그려졌다. 루아도 제가 한 행동이 바보 같다고 느꼈는지 멋쩍게 웃었다.
“아니, 날이 많이 따뜻해졌으니까. 참을 만하면 놀자 하려 했지.”
“뭐야…… 그 돼지 똥 싸는 소린. 이제 겨우 3월이야.”
“그니까 얼음장이더라고. 그래서 난 빨리 포기하고 이리 왔어.”
‘난’이라니. 그럼 설마…….
샨과 디하르의 시선이 아직도 계곡에 있는 레이먼에게 향했다. 쭈그려 앉아 뭘 하나 했더니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바보도 아니고…….
한심함 반, 측은함 반을 섞어 바라보자 루아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물 좀 따뜻해지면 다 같이 수영하고 놀자.”
“나 수영해 본 적 없는데.”
“걱정하지 마. 내가 가르쳐 줄게.”
정말로 자신이 있는지 루아가 허리에 손까지 짚어가며 크게 말했다. 그리고 이 발언이 계곡 앞에서 고민하던 레이먼을 이쪽으로 오게 만들었다.
“뭐?! 네가 수영을 가르친다고?! 샨, 절대로 안 돼!”
“왜! 나 수영 완전 잘해!”
“잘한다고 잘 가르치는 건 아니지! 내가 너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게 몇 번인데!”
“안 죽었잖아. 거기다 원래 이런 건 강하게 배워야 하는 거야.”
“두 번 강했다간 골로 가겠네!”
“안 가거든?!”
“가거든!!”
“안 간다니까!!”
소리를 빽빽 지르는 쌍둥이의 모습에 디하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과일을 주섬주섬 챙긴 뒤, 샨을 데리고 나무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 요한 옆으로 자릴 옮겼다.
“둘 다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
디하르의 한숨 섞인 말에 요한이 시니컬하게 답했다.
“평생 안 들걸.”
실로 이 말을 증명하듯 쌍둥이의 싸움은 어느새 머리끄덩이까지 잡는 육탄전으로 번져 있었다.
디하르가 주인어른을 부르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고, 요한이 미세하게 웃었다.
샨은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쌍둥이에게로 옮겼다.
디하르와 요한은 쌍둥이의 싸움을 철딱서니 없다 했지만, 샨은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좀 신기했다. 저렇게 죽자 싸워놓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호호 잘 지내니 말이다.
저게 가능한가? 보통 저 정도로 싸우면 절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자신과 밀라만 봐도 말도 안 섞지 않던가.
“가족이라서 그런가.”
샨의 중얼거림에 디하르와 요한이 쳐다봤다.
“뭐가?”
“아니, 저렇게 싸우면서도 잘 지내는 게 신기해서.”
“넌 유독 쟤네를 신기해 하더라.”
샨은 요한의 말에 그런가 하고 짧게 고민하더니 답했다.
“음…… 아무래도 가족이 같이 있는 걸 처음 봐서 그런 거 같아.”
거기다 저 둘은 쌍둥이여서 더 신기했다.
한날한시에 함께 태어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같은 피가 흐르고, 같은 성을 쓰고 있다는 건?
순수한 호기심에 연신 중얼거리자 요한이 툭 하고 물어왔다.
“부러운 건 아니고?”
샨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런 관계가 있다는 건 부러운 거 같아. 일단 같은 성을 쓴다는 시점에서 한편 같잖아.”
한편. 좀 투박하긴 했지만, 샨이기에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모든 가족이 다 쟤들처럼 저런 건 아니야. 거기다 너한테 가족이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잖아.”
“어딘가에 살아 있을 부모님을 말하는 거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디하르가 했다.
“나중에 너한테도 소중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단 소리야.”
디하르는 그리 말하더니 뺨을 살짝 붉혔다.
곧이어 그가 긴장한 사람처럼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네가 나랑 같은 성을 썼으면 좋겠어.”
디하르의 얼굴에 수줍음이 번졌다.
어떤 의미로 이건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 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샨에겐 연인이나 결혼이란 개념이 없었기에,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고 말았다.
“에이~ 우리가 어떻게 같은 성을 써. 애당초 난 성이 없는걸?”
“…….”
“…….”
정적과 함께 디하르의 얼굴에 슬픔이 내려앉았고, 요한이 그런 그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손수건 빌려줘?”
“……아니, 안 울어.”
“둘 다 왜 그래? 내가 뭐 실수했어?”
“아니…….”
“……모르는 게 나을 거다.”
뭐지? 뭔데 이래? 아까 루아도 그렇고 왜 이렇게 내가 몰라야 하는 게 많은 건데?
아무래도 이번엔 꼭 알아야 할 듯싶어 입을 열려는 순간, 산발이 된 쌍둥이가 씩씩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샨!”
“샨!!”
우렁찬 목소리에 샨이 귀를 막았다.
“누구한테 배울래?!”
어느새 싸움의 주제가 과연 루아가 수영을 잘 가르치느냐에서 누구한테 배울지로 바뀌어 있었다.
“안 배운다는 선택지는 없어?”
“없어!”
“없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떨어지는 대답에 샨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둘 다 목청도 좋다.
“그냥 아무한테도 안 배울래.”
“안 돼! 꼭 배워야 해! 다 같이 수영할 거란 말이야!”
함께한다는 말에 약한 샨이 윽 하고 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저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얘들하고 같이 노는 건 좋으니까…… 그럼 진짜 배워야 하나?
하지만 둘 다 믿음이 안 갔다. 루아는 레이먼이 떠드는 걸 보니 위험해서 배우고 싶지 않았고, 레이먼도 평소의 그 단순한 성격을 보면 딱히 잘 가르칠 거 같진 않았다. 솔직히 생명과 직결된 걸 누가 쌍둥이한테 배우려 하겠는가.
때문에 샨은 아예 제3의 선택지를 택했다.
“디하르는 수영 못해? 할 줄 알면 나 디하르한테 배울래.”
샨이 몸을 디하르 쪽으로 착 붙이며 그리 말하자 디하르가 움찔하며 굳었고, 요한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사람 고문시키네.”
그리고 이 말에 ‘안 돼’를 외치려던 쌍둥이의 의식이 그쪽으로 향했다.
“고문?”
“갑자기 웬 고문?”
디하르는 말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물론 우리의 요한은 눈치가 빨랐기에 그걸 잽싸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말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디하르가 샨한테 같은 성 쓰자고 했어.”
“오오-!”
“오오오-!”
“근데 샨이 거절했지.”
“어머…….”
“세상에…….”
3초도 안 돼, 쌍둥이의 반응이 바뀌었다.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인물들에게 안타깝단 시선을 받게 된 디하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쌍둥이는 그런 그를 위로하듯, 아주 선심 쓰는 말투로 말했다.
“디하르가 가르쳐 줘.”
“우리가 양보할게.”
“그래, 고맙다…….”
샨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더 늘어났다.
“뭐야. 뭔데 이래? 아까부터 대체 뭐냐니까?”
“몰라도 돼.”
“아니, 그니까 내가 몰라야 할 게 왜 그렇게 많은 거냐고.”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샨과 디하르의 어깨를 토닥이는 쌍둥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요한이 옅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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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