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27
제 227 화
모타 作
제14교시 [전야(前夜)]
하얬다. 아버지와 은하를 처음 만난 날처럼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유림은 침대에 앉아 멍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한참 자고 있을 때 누가 깨운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고, 몸이 무거웠다.
“……뭐지?”
내가 언제 잠들었지?
느릿하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둔하게 굴러가는 머리를 억지로 깨울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를 부르는 샨의 목소리가 들렸다.
“……림?”
샨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놀라 굳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유림에게 달려들었다.
“림!”
그 힘에 뒤로 넘어갈 뻔한 걸 가까스로 지탱한 유림이 샨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위험하잖아!”
“다행이다…….”
갑자기 다행이란 건 또 뭔 소리일까.
유림은 샨에게 뭐라 한 소리 더 하려다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에 등을 때리던 손을 내렸다.
“샨?”
“진짜 다행이야……. 이러다 계속 안 깨어나면 어쩌나 했는데…….”
“……?”
도통 알 수 없는 말에 유림이 샨을 밀어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이 말에 샨이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냐니…….
유림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진급시험을 치르겠다며 아침부터 은하랑 부산을 떨었던 것과 어쩐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하민이랑 디하르와 한 팀이 되어 4층 탑에 들어간 것도. 2층에서 루아네 팀을 만난 것까지.
진급시험의 일을 차근차근 떠올리던 유림은 3층에서의 일을 기억하곤 흠칫 떨었다.
이즈네.
그래. 그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대로 당해 버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유림은 저도 모르게 제 상태를 살폈다.
분명 피를 토할 만큼 독한 독이었음에도 몸이 조금 무거운 것 말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은하가 치료한 건가?
그렇다기엔 뭔가 평소랑 느낌이 다른데…….
“샨, 나 은하가 치료한 거야? 다른 애들은 어딨어? 다들 괜찮아? 이즈네 교수님은? 그 사람이 내부의 적이었어.”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샨이 유림을 진정시켰다.
“괜찮으니까 하나씩 물어봐. 일단 애들은 다 무사해, 이즈네 교수님이 내부의 적인 것도 알고. 교수님들의 부상이 조금 심하긴 하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셔. 다만…….”
“다만……?”
샨은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핥았다.
그 행동에 어쩐지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유림이 샨의 팔을 잡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뭔데? 왜 그래?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
“무슨 일 있는 거야? 혹시 얼음 서고를 내부의 적한테 뺏겼어?”
“…….”
“샨!”
차마 말을 못 하겠는지 샨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유림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때 섬뜩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하면서도 선명한 감각. 그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진 것은, 유림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인물의 기운이었다.
“……히야스 교수님?”
유림의 중얼거림과도 같은 말에 샨이 흠칫 떨며 고갤 들었다.
“림……?”
“……뭐야. 왜 히야스 교수님 늄이 느껴지는 거야?”
작은 손이 잘게 떨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상에 마른침이 연신 넘어갔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그리고 그런 유림의 머리 위로 히야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시간이 없어. 지금 유림의 상태론 이 탑에서 나가 치료를 받는 게 불가능해. 이대로면 몇 분 안에 숨이 끊어질 거야.”
이건 대체 언제 한 말일까.
꿈속에서 들었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가 마치 제 목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때와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아……. 거기다 유림인 나와 같은 8형이니까…… 분명 자기 걸로 변형시킬 수 있을 거야.”
유림은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다 현기증에 주춤거리는 몸을 샨이 부축했다.
“림!”
“샨…… 히야스 교수님 어디 계셔.”
“…….”
“어디 계시냐고!”
“…….”
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도, 돌아가셨어?”
벌벌 떠는 목소리로 묻는 유림을 보며 샨 또한 가까스로 답을 내뱉었다.
“……교수님은 아직…… 못 찾았어…….”
“못 찾았다니…….”
절망과도 같은 감정이 올라왔다. 유림은 샨을 뿌리치고 그대로 밖을 향해 내달렸다. 신발을 신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히야스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안젤리카…… 샨하고 유림과 함께 이 탑을 탈출해.”
꿈이 아니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들리던 히야스의 목소리는 현실이었다.
왜 자신에겐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왜 스스로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일만 일어나는 거지?
“내 걱정은 하지 마.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데.”
아직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했는데…… 풀어야 할 오해도, 해야 할 말도 잔뜩 있는데…….
거기다 약속했었다. 진급시험이 끝나면 만나러 가겠다고.
“난 여기 남는다.”
근데 왜 그조차도 못 하게 만드는 걸까.
차가운 눈밭을 달리며 유림은 이를 악물었다.
눈길에 언 맨발이 통증을 토해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리가 후들거리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쓰러질 것 같을 때, 거대한 탑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유림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탑을 바라봤다.
진급시험을 봤던 4층 탑이 마치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주변엔 사람의 진입을 막도록 말뚝과 함께 긴 끈이 둘러 있었고, 발자국이라곤 유림의 것이 전부였다.
탑의 잔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며 유림은 이를 꽉 깨물었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며 탑으로 다가갔다. 그때 뒤따라온 샨이 그녈 불러 세웠다.
“림-!”
그리고 유림이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팔을 잡았다.
“샨…… 왜야.”
“림…….”
“왜 아무도 없어?”
히야스 교수님은 끝까지 이 탑을 지키셨고, 끝내 교수님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 무너진 탑 아래 있단 소리 아니야? 근데 왜 아무도 없어? 못 들어가게 막는 이 선은 뭐고?
“왜 아무도 교수님을 찾고 있지 않는 거야?”
“…….”
절망이 묻어나는 질문에 샨은 그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샨의 팔을 뿌리친 채 앞으로 걸어갔다.
“림!”
“비켜.”
“진정해!”
“진정하라고? 저 아래 교수님이 계셔! 근데 왜 아무도 안 찾고 있는 거냐고!!”
“찾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봤어!”
“찾을 수 있는 곳이라니…… 결국, 다 찾아본 것도 아니잖아!!”
“어쩔 수가 없었어. 탑이 2차 붕괴할 가능성이 있어서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거기다 수정이 깨진 영향인지 마법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결론은 자기들이 위험하니 교수님을 찾는 걸 그만둔 거잖아. 안 그래?”
“억지 좀 그만 부려!”
“억지라고?! 이게 어떻게 억지야! 안으로 더 들어가야지! 어떻게든 교수님을 구해야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주변 풍경이나 샨의 태도만 봐도 자신이 적잖은 시간 동안 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교수님을 못 찾았다니…… 말이 못 찾았다지,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다들 교수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찾는 것을 멈춘 것이다. 교수님은 죽었으니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 탑 밑에 내버려둔 것이다.
“……히야스 교수님이 살아 계실 확률은 극히 낮아…… 네게 늄을 이식해 준 뒤에 탑까지 유지했어. 아무리 히야스 교수님이 대단하다 해도…… 그건 무리야…….”
샨의 말에 유림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믿어. 그럴 리 없어. 얼마나 독하신 분인데…….”
유림은 제 앞을 가로막은 샨을 피한 뒤, 탑을 향해 달려갔다.
거짓말이다. 이건 말이 안 돼. 너무 잔인하잖아.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안 죽었어. 절대 안 죽었어.
유림은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돌무더기들을 다 헤쳤다. 손톱이 깨지고 손끝이 찢어져 피가 눈 위로 떨어졌다. 발은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계속 움직였다.
돌 조각에 살이 베이고, 넘어져 무릎도 깨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안에서 히야스 교수님을 빨리 꺼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샨은 그런 유림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막았다.
“제발 그만해.”
“놔!! 이 안에 교수님이 계셔. 죽었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야. 이 밑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이 밑에 있을 거라고!”
“유림아!”
“그러니까 놔! 제발 좀 놔!!”
유림은 온 힘을 다해 샨을 뿌리쳤다. 그리고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처절하리만큼 앞에 있는 돌무더기를 헤쳤다.
찾아야 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 계실 것이다.
설령 샨의 말대로 히야스 교수님이 그리되셨다 해도…… 찾아야 했다. 자신은 교수님을 이 밑에 혼자 둘 수 없었다.
“빨리 찾아야 해…… 이렇게 시린 곳에 어떻게 혼자 있게 해……. 난 못 해…… 못 한다고…….”
유림이 울음을 삼키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며 눈앞의 돌을 다시 집는 순간 누군가가 유림을 불러왔다.
“한유림.”
뻣뻣한 고갤 돌리니,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아슈팔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선배…….”
“그만해.”
“……선배도 교수님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거예요?”
“…….”
그는 대답 대신 유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손과 발을 보곤 미간을 구겼다.
“가자.”
유림은 그 말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아무도 자신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 걸까.
왜 하지 말라고만 하는 거지?
“안 가요…… 아니, 못 가요…….”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아슈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작은 돌 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는 그것을 따뜻한 털신으로 변형시킨 후, 유림의 앞에 내려놓았다.
“신어.”
“안 갈 거예요.”
“한유림.”
아슈팔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낮고 무서웠다. 유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평온했던 그의 얼굴이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후회하기 싫으면 잔말 말고 따라와. 할 얘기도 있으니까.”
그는 제 외투를 벗어 유림의 어깨에 걸쳐 준 뒤, 샨에게 턱짓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와 유림을 번갈아 보던 샨은 이내 유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자.”
유림은 지금 이 모든 게 너무나 억울하고 슬펐다. 눈가가 뜨겁고 목이 멨으며, 시야가 눈물에 젖어 흐릿하게 번졌다.
치밀어 오르는 설움을 참으며, 꽁꽁 언 발을 신발에 집어넣었다.
샨은 그런 유림의 외투를 한번 정리해 주더니, 그녀를 부축한 채 아슈팔을 천천히 따라갔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