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32
제 232 화
금지된 땅.
과거 세계를 통일했던 국가 비슈아드가 멸망할 때 생긴 비슈아드의 잔재이자 타락한 늄의 덩어리. 대륙의 북쪽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을 만큼 커다란 이 땅은 해독할 수 없는 지독한 독기를 뿜어대며 생명의 출입을 거부했다.
논리론 설명할 수 없는 땅의 존재에 여러 학자가 의문을 품고 연구에 매달렸다. 더욱이 비슈아드의 멸망은 그 자체가 의문투성이인 데다 제대로 된 기록 하나 남지 않았기에 이 땅 안에 이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을 거라 추측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시대의 발전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이 땅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러나 이를 밝혀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어마어마한 수의 목숨을 앗아간 독기를 보며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곳에 출입한 몇 명의 인간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중 한 명이 금지된 땅의 유일한 섬이자, 세계의 가장 북동쪽에 있는 섬 레이드시텐에서 무수한 자료를 발견했음을 말이다.
그것은 곧 역사였고, 밝혀져선 안 될 금기의 이야기였다.
이에 그녀는 이곳을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정 국가의 전유물이 되지 않고, 때가 될 때까진 그 누구도 이를 알아내지 못하게.
결국, 그녀는 이 서고를 지켜나갈 뛰어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제 일생을 바쳐 학교를 지었고, 다양한 능력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것이 바로 클레이즈의 시작이었다.
“……그 뒤, 클레이즈는 금지된 땅의 독기를 해독할 수 있는 이사장을 중심으로 여덟 명의 전임 교수가 이를 돕고 지탱해 얼음 서고를 지켜왔대. 사실 클레이즈 자체가 이 일을 계속 이어갈 아홉 명을 찾는 학교였던 거지.”
경악이 섞인 침묵 속에서 유림의 목소리만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클레이즈의 역대 이사장들이 다 8형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어. 금지된 땅에서 살아가려면 독기의 본질을 계속 바꾸는 수밖에 없었거든. 하지만 이게 완벽한 건 아니라 이따금씩 독기에 중독되는 학생들이 나왔었나 봐.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만든 것이 키르라고 했어.”
“키르?”
“응. 왜 키르를 활용하면 평소보다 늄이 매끄럽게 잘 써지잖아. 사실 그거 이사장님이 키르를 통해 사용자의 늄을 깨끗한 상태로 다시 변형? 아니, 돌려놓는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러는 거래. 그래서 우리가 조금의 독기에도 오염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 거라 했어, 클레이즈 밖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사장님의 힘이 닿지 않아서이고. 솔직히 나도 자세한 원리는 잘 모르겠는데, 키르가 이사장님이 만든 거나 기존에 만든 걸 손본 거라면 원격으로도 가능하니까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닐까 싶어.”
은하는 문뜩 유림이 만든 물건들을 떠올렸다. 나무 인형도 그렇고 나무 피리도 그렇고,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들고 있어도 사용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역시 키르도 이와 비슷한 걸까.
은하는 주머니에서 키르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데몽도 그랬다. 그는 키르를 쳐다보며 턱을 괴었다.
증폭제 역할을 하는 매개체인 줄 알았더니만 원래 기능이 따로 있었다니…… 어떤 의미론 현명한 거짓말이었다. 좋은 상태의 늄으로 되돌리는 거나 매개체나, 보통의 상태에 비해 좀 더 마법이 잘 써지는 건 똑같았으니 말이다.
그 덕에 자신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더욱이 상시 들고 다니란 말도 했고, 통신구에 형을 나타내는 기능까지 갖춰놓았으니 학생은 물론 교수들도 어지간해선 두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자신들처럼 말이다.
“근데 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
데몽의 질문에 일행의 시선이 다 그쪽으로 쏠렸다.
“얼음 서고에선 키르가 안 됐잖아. 그렇다는 건 이사장님 영역 밖이란 소리 아니야? 독기가 변형이 안 되는데 우린 어떻게 멀쩡하게 있었던 거지? 박은하수랑 샨은 그렇다 치고, 너랑 나, 그리고 안젤리카 씨는 그곳에 꽤 오래 있었는데 중독 현상 같은 거 없었잖아.”
그때 다친 것도 순간 이동 때문이었지, 독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여쭤봤었는데, 얼음 서고는 원래부터 독기가 피해 가는 장소였대.”
“뭐?”
“얼음 서고를 둘러싸고 있던 절벽 기억하지? 그걸 기준으로 그 안엔 독기가 퍼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어째서?”
“원인은 이사장님도 모르신대. 다만 인위적인 것 같다고 하셨어.”
유림의 답에 하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위적이라니? 그렇다는 건 금지된 땅 내에 그런 곳이 몇 군데 더 있을 수도 있단 거잖아.”
“글쎄…… 그러려나…….”
데몽과 하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상기된 걸 보며 유림이 말끝을 흐렸다. 조금 두근두근한 표정을 짓는 것이 꼭 맛있는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 같았다. 이 둘보다 티는 덜 나서 그렇지, 디하르와 루아의 눈도 조금 반짝이고 있었다.
하기야, 오랜 시간 숨겨져 있던 비밀에 접근한 것도 모자라 또 다른 가설까지 생겼는데 오죽 설렐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유림은 이대로 있다간 모두가 딴 길로 샐 거 같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하여튼 결론을 말하자면 원래 클레이즈는 그런 용도로 지어진 건데 내부의 적으로 인해 정식 계승이 끊겨 버렸고, 이 때문에 세룬 교수님 말곤 그곳에 대해서 아는 교수님이 없었던 거래. 그래서 이사장님이 다른 교수님들이 해야 하는 걸 혼자 다 떠맡느라 내부의 적을 잡는 일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이야.”
“전대 전임 교수님들의 사고도 내부의 적이 한 게 확실해?”
디하르의 질문에 유림이 쓰게 웃었다.
“응. 아버지의 계승이 무산되면서 다른 교수님들이 대신 계승받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다른 속셈이 있단 걸 전대 교수님 중 몇 분이 눈치채셨던 거 같아, 그래서 결국 내부의 적이 그런 일을 저지른 거고. ……뭐, 그때까진 애제자였고 능력들도 좋았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의심 안 한 거지. 더욱이 하진 교수님이나 리리아 교수님처럼 내부의 적이 아닌 사람들도 계승받았으니까.”
그리고 이 때문에 이사장님이 바로 내부의 적을 색출하지 못하고 교수님들을 의심하게 된 거지만.
애들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는 유림의 귀로 은하의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내부의 적 때문에 이사장님이 힘든 일을 혼자 다 하고 있단 거잖아.”
“그렇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해?”
방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무거운 정적 속에서 내내 가만있던 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음 서고가 금지된 땅에 있다는 건, 역으로 말했을 때 내부의 적이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란 거겠지.”
확실히 유림의 이야기를 듣기 전엔 그런 생각을 못 했지만, 샨의 말대로 이 모든 게 사실인 이상 내부의 적은 유일한 출구인 클레이즈를 둔 채 고립되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클레이즈에 오지 않았다는 건, 그곳을 조사하는 것과 별개로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있단 거야. 가령, 안젤리카 씨를 잡아가거나 이곳에 있는 다른 교수님들을 상대할 방법 같은 걸.”
루아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샨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겠지……. 어쩌면 이미 여러 가지를 준비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이에 레이먼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전력 차가 나는 것도 최악인데 시간도 없는 거네.”
“림, 이사장님은 뭐라셔?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대?”
은하의 질문에 유림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
“……그게 뭐야. 별 계획 없다는 거잖아.”
정확하게 파고드는 테오의 말에 유림이 ‘윽’ 하고 표정을 구겼다.
“어쩔 수 없잖아. 교수님들도 다치시고, 나도 그렇고, 학교 일 때문에 이만저만 정신이 없었을 거라고.”
“알지. 아니까 뭐라 못 하는 거지.”
“이미 할 말 다해놓고선 그게 뭐라 못 하는 사람이냐?”
“왜 갑자기 시비야.”
“시비가 아니라 답답해서 그래. 어쨌든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다들 의견 좀 내보자.”
좀 전 침묵에 반동이라도 되듯,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일행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꺼내며 어떻게 할지를 떠들었다. 그때 하민이 손뼉을 크게 치며 모두를 집중시켰다.
“다들 그만-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이야기가 정리가 안 되잖아. 이번 일은 다른 때랑 달라, 의견을 모아 협의할 시간 따위 없다고.”
꽤나 냉정한 일침이었다.
하민은 모두가 진정한 것을 깨닫고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회의가 아니라 이 사태를 분석하고 묘안을 떠올려 진두지휘할 통솔자야.”
실로 맞는 말이었다. 다양한 개성에 생각도 제각각인 이들을 다룰 수 있는 건 그만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가 군사학을 배운 것도 아니고, 애당초 우리 중에 그런 걸 할 사람이…….”
하민의 말에 투덜거리던 유림은 문뜩 이 안에 굉장히 적합한 사람이 있단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이즈의 생활에 잊고 있었다, 이 안에 장교의 아들이자 군인이 있단 사실을.
테오. 그가 바로 이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던가.
가만히 하민의 말을 듣고 있던 테오는 갑자기 친구들의 시선이 저에게 쏟아지자 작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
하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가 절대 못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무리. 절대 안 돼. 클레이즈 준비한다고 좀 쉬기도 했고 또 나 말단 비슷한 거라 통솔해 본 적 없어, 명령받는 쪽에 익숙하다고. 차라리 교수님들께 부탁하자.”
“아까 림이 그랬잖아, 이사장님은 그럴 정신 없을 거라고. 우리 형도 그렇고, 세룬 교수님도 아직 완치한 게 아니라 제대로 나서서 싸우는 건 무리야. 물론 리리아 교수님이 계시긴 하지만, 이왕이면 그분은 뒤에서 우릴 받쳐 주셨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테오를 고려하고 있었던 걸까. 하민의 막힘없는 대답에 테오는 입이 마르는지 입술을 핥더니 데몽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럼 데몽이 하는 건 어때? 얘가 나보다 머리가 더 잘 돌아가니까…….”
“아니야. 네가 적합해.”
단칼에 자르는 데몽의 모습에 테오가 입을 다물었다.
“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너보다 이 일을 잘 타파할 사람 없어.”
어지간해선 남을 인정하지 않는 데몽이 드물게 칭찬을 하고 있었다.
“……너네, 진짜 나 믿을 수 있겠냐?”
“내가 아는 너라면 충분해.”
“한유림도 믿는데 너를 못 믿겠냐.”
불안이 섞인 목소리에 디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테오에게 힘을 실었고, 데몽이 턱을 괴며 핀잔하듯 말했다.
유림도 데몽의 말에 조금 울컥했지만, 이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우리보단 나아.”
자신과 은하는 이런 쪽으론 젬병이고, 레이먼과 루아, 륜, 하민 또한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나마 디하르랑 데몽이 지략에 뛰어나긴 한데, 그들이 적격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는 듯싶었다.
일행 모두의 시선에 자신이 이 중요한 일을 떠맡게 되었음을 받아들인 테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꽤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일행은 그가 집중할 수 있도록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곧이어 결의에 찬 목소리가 모두를 향했다.
“좋아. 그럼 우선 전력 분석부터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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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