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35
제 235 화
“크흠, 어쨌든 그러하니 이사장님과 함께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가급적 안전한 곳에서요.”
“안전한 곳에서라니…… 우리더러 얌전히 숨어 있으란 소리야?”
리리아가 말도 안 된다며 뭐라 했지만, 테오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숨어 계시란 것이 아닙니다. 안전하게 저희를 기다려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그게 그거지, 무슨…….”
“그게 아닙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뒷일을 부탁하는 거예요. 만일 저희가 지게 될 경우 그들을 처리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드디어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들의 최종 목적은 내부의 적을 잡는 것.
하지만 이건 실패할 확률이 다분히 있었다. 그렇기에 일행은 남아계신 교수님들이 그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도록, 내부의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는 것을 차선책으로 정했다.
“물론 처음부터 질 걸 생각하고 싸우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이길 각오로 온 힘을 다해 싸울 거예요. 다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기에 뒤를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저흰 교수님들께 그걸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런 테오를 디하르가 거들었다.
“저희가 이 학교에서 교수님들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희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최상의 상태로 있어주세요.”
두 사람의 차분한 설득에 내내 가만있던 하민이 구시렁거리듯 말을 꺼냈다.
“그것도 그거지만, 솔직히 교수님들과 함께 싸우는 게 더 불편해요. 분명 전투 내내 저흴 보호하려 할 테고, 그걸 보면서 저희는 짐이 안 되기 위해 몸을 사리겠죠? 내부의 적은 그렇게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답지 않은 냉철한 말에 은하와 루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틀린 소린 아니었다. 최선책을 위해서도, 또 차선책을 위해서도 교수들은 절대 처음부터 이 싸움에 개입해선 안 됐다.
어떤 의미론 그것이야말로 테오의 계획에 있어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초석인 것이다.
데몽은 안경을 고쳐 쓰고 작게 심호흡했다.
“교수님들께서 걱정하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계획이 터무니없이 느껴지시겠죠.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저희를 믿고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에 유림이 쐐기를 박듯 말을 매듭지었다.
“저희가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게 기다려 주세요.”
이를 끝으로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교수들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조금 전처럼 화를 내거나 반박을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의 대화로 그 안에 담긴 아이들의 각오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너네 진심이구나.”
세룬의 말에 일행이 고갤 끄덕였다.
리리아는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미치겠네. 애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게 교수의 일인데, 오히려 한발 뒤로 물러서 있으라니……. 뭔가 순서가 바뀐 거 같지 않아?”
“케이 말대로 이런 대접을 받는 건 태어나 처음이군.”
하진이 입꼬리를 비틀자 테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엔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반대할 경우를 대비해 각종 설득과 변명이 쫘르륵 써져 갔다.
그때 케이가 긴 숨을 내쉬며 짧게 말했다.
“그래. 협조하도록 하지.”
그 말에 교수와 아이들의 희비가 갈렸다.
아이들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었고, 세 교수는 맘에 안 드는지 케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늘 그랬듯 클레이즈는 이사장의 말이 곧 법이었기에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너희 말대로 믿고 기다릴게.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갈 거야. 뒷일이고 뭐고 없어. 그니까 최선책이든 차선책이든 최대한 다치지 말고 싸워.”
리리아의 말이 무리에 가까운 부탁이란 걸 서로 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멀쩡하게 이길게요.”
테오는 그들이 더 반대하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이 온실 밖으로 나왔을 땐 시계가 벌써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는지.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일행은 내부의 적이 올 때를 대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덫을 설치하는 것이었기에 유림은 아슈팔에게 연락을 해 와줄 것을 부탁했다.
잠시 후, 그가 일행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뒤늦게 간략한 계획을 듣고 특유의 평화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평화롭지 못한 선택이군, 합리적이지도 못 하고.”
단정한 어조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질타가 들려왔다.
어쩜 저런 표정과 목소리로 한심함을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진짜 특이한 인간이라 생각할 때, 그가 뒷말을 이었다.
“이 무식한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지?”
유림은 단박에 테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얘요. 얘가 참모거든요.”
그리고 이에 아슈팔이 일행을 조금 측은한 눈으로 바라봤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참모를 두었군.”
“…….”
속이 부글부글 끓는 테오였지만, 다행히도 그가 아직 덫을 만들지 않은 상태라는 걸 기억했는지 울컥함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서, 그 덫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야?”
“네.”
테오가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일 때, 은하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선배, 등에 그건 뭐예요?”
그러고 보니 아슈팔이 등에 기다란 상자를 메고 있었다.
그도 그걸 까먹고 있다 지금 생각났는지 ‘아’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유림의 앞에 내려두었다.
뚜껑을 여니 그 안에 기다란 검 세 자루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검을 잘 모르는 은하가 봐도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낄 만큼 잘 손질된 검이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만든 검.”
평화롭지 못하다며 뭐라 한 사람이 가져오기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건 왜요.”
“내부의 적과 싸우려면 검이 필요할 거 아니야.”
“아…….”
4층 탑이 무너지던 날, 유림의 검은 탑의 잔해 밑에 깔리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찾을 순 없었다. 그래서 여행 때 가져온 나무로 새로 만들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준비해 줄 줄이야…….
“이걸로 다치지 말고 잘 싸우도록 해, 가급적 평화적으로.”
아니, 그니까 앞말과 뒷말이 안 어울린다니까요?
유림은 작게 웃으며 검을 받아 들었다.
“그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어, 근데 왜 세 자루예요?”
“두 개는 네 거고 하난 샨 건데…… 그러고 보니 샨이 안 보이는군.”
“아침에 요한 만나러 갔어요.”
“요한은 왜?”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요한이 요즘 좀 바쁜 거 같다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온다던데요?”
“……선배들이랑 관련 있는 건가…….”
“선배들이요?”
“아니야. 어쨌든 이건 네가 샨에게 전해줘.”
“네.”
유림은 아슈팔이 건네준 두 자루의 검을 들어 보였다. 마치 저한테 맞춘 것처럼 손잡이서부터 칼날의 길이, 검 폭, 무게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유림이 감탄에 어려 검만 만지작거리자, 옆에 있던 륜이 헛기침을 하며 아슈팔을 불렀다.
“저기…… 이제 슬슬 바닥에 덫을 만들어야 할 거 같은데요.”
“아, 그래.”
아슈팔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유림을 제외한 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돌 조각 하나씩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죠?”
의아함을 표하는 아이들의 답을 대신하듯, 아슈팔이 작은 돌 하나를 클레이즈 지도로 바꾼 뒤, 방위별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히넨, 여긴 테오, 여긴 은하, 여긴 디하르, 여긴 륜, 여긴 루아, 여긴 레이먼, 여긴 하민이 네가 가.”
친절히 위치에 따라 해당하는 사람까지 가르쳐 주는 모습에 머리 위로 물음표만 그려졌다.
“거긴 왜요?”
“덫 만들어달라며. 거기다 돌을 두거든 유림이한테 연락해.”
뭔가 상당히 떨떠름했지만, 부탁하는 입장이기에 일행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가까운 사람과 합류하고.”
“네.”
일행은 아슈팔이 정해준 지정 자리에 돌을 두기 위해 자리를 떴다.
혼자 남게 된 유림은 눈만 깜빡이다 그를 바라봤다.
“저는 뭐해요?”
“너는 나랑 수업해야지.”
수업이라니. 이건 또 무슨 돼지 똥 싸는 소리란 말인가.
지금이 그런 여유 부릴 때냐며 뭐라 하려던 순간 아슈팔이 먼저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너한테 가르쳐 주려는 건, 원래 네가 그 미로에 익숙해지면 배우게 될 다음 수업이야.”
뭐라 따지려던 말이 목구멍에 턱 하고 걸렸다.
사혈로 여행을 다녀온 후, 8형의 비밀 수업은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히야스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니 어찌 봤을 땐 당연했다.
더욱이 유림 스스로도 수업을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에 딱히 그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는 이제 곧 졸업하고, 교수님은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니 지금 가르쳐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
아…… 그렇구나. 내부의 적 일이 끝나도, 또 교수님이 깨어나신다 해도 전처럼 셋이 수업할 일은 없는 거구나…….
울적하다고 해야 하나, 좀 씁쓸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기분이 또 축 가라앉았다.
아슈팔은 그런 유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으며 위로했다.
“기운 내. 평생 안 볼 것도 아니면서.”
드물게 상냥한 어투에 유림이 감동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죠?”
“응. 거기다 너 내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하잖아. 그 귀한 걸 그냥 버릴 순 없지.”
“…….”
5초도 안 되어 차올랐던 감동이 차게 식어버렸다.
축제의 마지막 날, 그의 소원을 대신 빌려 쓴 대가를 여기서 들먹이다니……. 까먹고 넘어갔으면 했는데,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우리에게 훈훈한 전개는 없는 건가요? 그게 이 분위기에 나올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림은 한숨을 푹 내쉬다 이내 피식 웃었다.
“알겠어요. 그래서 뭐 가르쳐 주실 건데요?”
“눈 뜨고 나서 마법 써봤어?”
“…….”
“역시 안 해봤군.”
유림은 애먼 손만 쥐었다 폈다 했다.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어쩐지 교수님 늄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거의 다 제 늄으로 변형돼 그럴 리 없는데도 말이다.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인데…… 너, 지금 네 늄이 전보다 커진 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히야스의 늄을 이식받은 유림은 원래의 늄보다 더 많은 양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자면 어릴 때로 돌아간 것과 비슷했다. 샨을 살리기 위해 반 가까이 떼어냈던 늄이 다시 늘어난 거니까.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늄을 쉽게 쓸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났을 테고.”
그때 유림의 통신구가 울리며 루아가 돌 조각을 지정된 장소에 두었음을 알렸다.
그 뒤로도 몇몇 더 통신이 왔고, 마지막으로 가장 멀리 가야 했던 디하르의 연락으로 모든 돌이 정해진 자리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슈팔은 바닥에 돌 조각을 하나 내려놓은 뒤, 유림더러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잠깐, 실례.”
그는 유림의 뒤에 서서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걸 잘 못 해. 그러니 직접 시범을 보여줄게.”
“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유림을 보며 아슈팔이 늄을 부여했다.
“걱정하지 마. 너라면 금세 따라 할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 말과 함께 거대한 늄의 기운이 퍼지며 돌에서 가는 빛의 선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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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