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42
제 242 화
내부의 적과의 전투가 계속되면 당연히 크게 다칠 거라는 건 유림뿐 아니라 모두가 예상했을 것이다. 운이 없으면 죽을 수 있다는 가정도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생각으로만 끝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아…….”
유림이 길고도 무거운 숨을 내쉬며 머리를 최대한 냉정하게 만들었다.
만일 제 옆에 은하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넷 다 살아 있으며 자신이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떠들지 않았다면, 샨이 죽었을 때나 얼음 서고 때처럼 이성을 놓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후우…….”
다시금 긴 숨소리가 들렸다.
마치 이 세상에 그밖에 없는 것처럼 다단만 노려보는 유림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은하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바닥에 깔린 괴물들의 사체와 입학시험 때의 유림처럼 피고름에 짓물러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두 교수, 그리고 자신들의 소중한 네 친구가 피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피바다에 가까운 풍경은 평생 사혈의 촌동네에서 한적하게 산 은하에겐 익숙하지 않은 참혹 그 자체였다. 더욱이 산송장에 가까운 네 친구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은하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치료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유림의 팔을 잡았다.
다단이 자신들보다 친구들과 가까이 있는 한,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림…….”
은하가 유림을 부르며 어떻게 할지를 물어보려 할 때, 다단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두 사람 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화살처럼 목소리가 날카롭고 뾰족하게 들렸다.
다단은 그런 유림이 재밌다는 듯 옅게 웃었다.
“이즈네한테 당했단 이야기를 듣고 많이 걱정했는데, 역시 무사히 살아 있었어.”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한 어투에 유림이 저도 모르게 작게 실소했다.
“제게 볼일이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아아- 8형의 능력은 진귀해서 말이야.”
“그런 사람이 히야스 교수님을 죽이라고 했어요?”
이 말에 다단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통신구를 끈 세 친구의 노력과 달리 유림은 다단의 말을 들었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고, 다른 잡음과 마찬가지로 흘려보낼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 말만큼은 무엇보다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 이야기를 들었나? 그랬는데도 용케 나나 진유를 찾아오지 않았군. 히야스가 걱정되지 않았던 건가?”
“네. 안 했어요.”
허세가 아니라 정말 안 했다. 히야스의 곁에 아슈팔이 있다는 걸 아는데 여기서 자신이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오히려 계획에 집중하는 것이 아슈팔을 돕고 히야스를 지키는 일이었다.
다단은 유림을 바라보더니 이내 그 속뜻을 읽기라도 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군. 학교에 아슈팔도 있는 건가…… 하지만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역할은 히야스를 지키고 있는 거겠군.”
“…….”
“근데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야. 히야스는 제자의 보호를 받을 만큼 한심한 실력도 아닌 데다, 그럴 성격은 더더욱 아닌데 말이지……. 어떻게 지금까지 얌전히 있을 수 있는 거지?”
“…….”
‘콰득’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이를 깨무는 유림을 보며 다단은 두 가지 추측을 확신했다.
하나는 히야스의 상태가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아슈팔 또한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개인적으로 다단이 클레이즈에 남아 있는 이들 중 가장 골치 아프다 생각한 것은 단연 히야스였다.
얼음 서고를 녹일 수 있는 안젤리카가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일 뿐 아니라, 늘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을 펼쳤다. 무엇이든 금세 만들어내는 그 능력도 불편함에 한몫 더 했다.
때문에 다른 이들과 달리 다단은 그 누구보다 먼저 히야스를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쫑알쫑알 정말 말 많으시네. 교수님, 전 지금 교수님하고 수다 떨러 온 게 아니거든요?”
유림이 검을 빼 들며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하자 다단이 다시금 옅게 웃어 보였다.
“그래. 수다는 모든 걸 끝낸 뒤에 마저 해도 되겠군.”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자네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유일하게 회복이 가능한 치료사부터 처리하면 끝나지.”
그 말과 동시에 마치 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다단이 바로 은하의 코앞에 나타났다. 마치 목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손을 뻗는 것을 보며 은하가 숨을 삼켰다.
그때 무언가가 은하를 뒤로 잡아당겼다.
“우악!”
괴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한 바퀴 구른 은하가 아픈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앞을 바라봤다.
좀 전 자신이 있던 자리에 뻗어 있는 손과 마치 이를 자르려는 듯, 한 자루의 검이 그의 팔 위에 살짝 박혀 있었다.
유림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팔에 뭔 짓을 했는지 마치 단단한 돌 위에 검을 후려친 것처럼 베이지 않는 것은 물론, 손목이 저려왔다.
다단은 3형. 신체를 강화하는 데 도가 튼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제 몸을 단단히 만든 이는 보지 못했다.
설마 루아의 전기 공격도 이렇게 막은 건가? 그래서 다른 교수들과 달리 혼자만 멀쩡한 거고?
유림은 몸을 돌려 그를 걷어찬 뒤,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다단은 제 팔에 남은 얇은 검흔과 그곳에 맺힌 피를 보며 입꼬리를 말았다.
“아아…… 좋은 움직임이야.”
품평하는 듯한 어투가 속이 뒤집힐 만큼 역겨웠다.
“림, 괜찮아?”
“넌?”
“멀쩡합니다!”
“다행이네. 그럼 가서 애들 치료해 줘.”
“응.”
“무슨 일 있어도 막을 테니까, 우선은 치료에만 집중해. 알겠지?”
“넵!”
거수경례를 해 보이더니 은하가 잽싸게 친구들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를 쫓아가려는 듯 다단이 움직였지만, 이내 앞을 가로막는 유림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교수님은 저랑 노시죠.”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나를 교수라고 부르는군.”
“교수란 인간이 뭘 하고 있는지 정신 차리라고 일부러 하는 겁니다.”
디하르가 했던 것과 비슷한 말에 이번엔 그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 역시 자네들은 재밌어.”
자네들은 재밌어라니. 웃기시네.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면서 노인네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유림이 구시렁거리며 땅에 검 하나를 꽂았다.
“검 하나는 버리는 건가?”
“한 자루만으로도 충분해요.”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래도 모처럼 만의 기회니,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다단은 주변에 떨어져 있던 다른 교수의 검 한 자루를 잡아 들었다.
유림이 막는 사이 쓰러져 있는 데몽과 레이먼 앞에 도착한 은하는 우선 두 사람의 다친 부분을 살폈다.
가까이서 본 친구들의 상태는 더욱 끔찍했다. 팔은 반대로 꺾여 있었고, 타박상이 가득했다. 레이먼의 경우는 마치 누가 땅에 처박은 것처럼 뒤통수에서 피가 흘러나와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심각한 사람부터 치료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누가 더 심각하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기에 은하는 좀 더 저와 가까이 있던 레이먼부터 치료하기로 했다. 그때 레이먼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깜둥…….”
“뽀송! 괜찮아?”
그가 간헐적인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니까 우리 말고…… 루아부터 치료해 줘…….”
“루아부터?”
레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관통당했어…….”
배를 관통당했다니.
놀라 굳어버린 은하의 귀로 레이먼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빨리…… 루아부터…….”
“아, 알았어.”
은하는 두 사람에게 간단한 지혈 마법을 걸어준 뒤, 유림이 다단과 힘겨루기를 하는 틈을 이용해 루아에게 다가갔다.
죽은 것처럼 맥없이 쓰러져 있는 루아의 배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얼룩진 피와 옷 때문에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것이 무기에 의한 상처가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루아…….”
은하는 울음을 꾹 참으며 루아의 상처를 치료했다.
자신도 그렇지만 데몽도 쌍둥이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신체적인 능력이 많이 뒤떨어졌다. 그런 그들이 다단에게 어떻게 당했을지,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눈에 선했다.
“으윽…….”
울면 안 되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은하는 눈물을 삼키며 늄을 집중했다.
다른 친구들도 있는 데다 나중을 대비해 늄을 낭비할 수 없어, 완벽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평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늄을 운용했다.
루아의 몸에 있는 잔상처들이 서서히 아물어가는 게 보였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면서 미약했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녀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루아는 흐릿한 시야 너머에 있는 은하를 보며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은하……?”
“루아…… 괜찮아?”
“아…… 아파…….”
힘이 없어서 그렇지, 만일 조금의 기력이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비명을 지를 만큼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윽……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
“다른 애들은? 데몽도 레이도 크게 다쳤었는데…….”
“너 다 치료하고 치료하러 갈 거야.”
“하하…… 울지 마. 유림이 화내…….”
“흐으윽. 울지 말라고 하니까 더 눈물 나잖아.”
은하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였다.
“나, 이제 괜찮아…… 그니까 다른 애들 빨리 치료해 줘.”
“으응.”
은하는 고개를 붕붕 끄덕인 뒤, 친구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 사이사이 다단이 몇 번 더 은하와 일행을 노렸지만, 유림이 능숙하게 이를 막아냈다.
다들 상처가 꽤나 심했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데몽과 레이먼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걸 확인한 은하는 다시금 유림의 엄호에 맞춰 디하르가 있는 쪽으로 자릴 이동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일행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디하르의 몸엔 다른 친구들보다도 상처들이 즐비했다. 멍 자국도 많았고, 손톱도 몇 개 빠져 있었다.
은하는 다시금 늄을 집중해 그의 몸을 치료했다.
청명한 기운과 함께 몸이 서서히 나아가는 걸 보며 디하르가 숨을 골랐다.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었다.
“바로 움직이면 안 돼.”
“괜찮아.”
“안 돼!”
은하가 보기 드물 정도로 단호하게 답하며 디하르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움직이면 안 돼. 그러다 다치면 아예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애들하고 1교사 안에서 조금 쉬고, 그 뒤 계획대로 1교사를 계속 지켜. 알겠지? 안 그러면 너 과부하시켜서 못 움직이게 할 거야.”
“……다단 교수님은 유림이 혼자서 상대 못 해.”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도 도울 거니까.”
돕는다니…… 설마 같이 싸울 생각인 건가?
루아나 레이먼보다도 체술이 떨어지는 은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다단과 싸우다니.
이런 말이 큰 실례인 걸 알지만, 디하르는 그녀의 생각이 방해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다단은 체술파 아니던가. 은하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거기다 림도 나 기다리고 있는걸.”
유림이 기다리고 있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멍하니 굳은 디하르를 뒤로한 채, 은하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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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