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43
제 243 화
실로 유림이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은하가 근처에 오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나뭇조각 하나를 꺼낸 뒤, 얇고 단단한 봉으로 변형시켜 은하 쪽으로 던졌다.
“애들은?”
“다들 괜찮아.”
“너는?”
그게 늄 상태를 묻는 것임을 단박에 알아챈, 은하가 봉을 으쌰 하고 들어 보였다.
“아직 빵빵하게 남아 있어!”
“오~ 웬일이래. 평소면 다 쓰고 자빠져 있을 애가.”
친구들이 이제 무사하다는 걸 알아서일까. 유림의 표정과 어투가 한결 편해졌다.
은하는 봉을 어설프게 휙휙 돌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 세룬 교수님 애제자거든? 무시하지 마셔!”
“무시 안 했어. 안 하니까 기다리고 있었지. 그보다 언제부터 애제자였냐?”
“음…… 처음부터?”
헤헤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배시시 한 미소에 유림 또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리 가깝지 않은, 하지만 유림이 도약하면 두어 걸음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
다단은 갑자기 싸움판에 끼어든 은하가 이해가 가지 않는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디하르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그녀의 존재가 방해로밖에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객기인가?”
“뭐가요?”
유림이 다단과 검을 마주하며 반문했다.
“박은하수가 여기 끼다니. 객기, 아니면 자살인가?”
“아닌데요?”
“것도 아니라면 소중한 치료사를 왜 같이 싸우게 하는 거지?”
진지한 그의 얼굴에 유림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몰랐어요? 은하가 있는 한, 저 무적이에요.”
“뭐?”
마치 오래 참았다는 듯 그녀가 입꼬리를 말았다.
“단점 보완…… 이랄까요?”
다소 오만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
유림과 은하만 1교사로 보낸 것이 신경 쓰였는지, 샨이 뛰어가는 중간중간 1교사 쪽을 바라봤다.
테오는 그런 그가 이해되지만, 그대로 뒀다간 계획에 집중 못 할 것 같아 결국 참았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진유 교수님 찾아야 해. 집중해.”
“……그래.”
“한유림하고 박은하수가 걱정돼서 그래?”
“…….”
답 대신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테오는 괜히 뺨만 긁적였다.
“뭐,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괜찮을 거야. 한유림이 보통 약삭빠르냐. 은하도 있고, 다른 애들도 있으니 큰 문제없을 거야.”
최대한 그의 불안을 달래주려고 없는 친절까지 꺼내 말했으나, 정작 샨이 걱정한 건 그게 아닌 모양인지 다소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질 거란 걱정은 안 해.”
“어?”
“림이라면 이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
뭐지, 이 황당한 대답은? 더욱이 저건 확신을 담고 하는 말이었다.
지금 유림과 은하가 1교사로 간 건 네 명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 넷이 싸워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가 그곳에 있단 것이다.
물론 상황이나 전술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력의 반이 쉽게 이기지 못한 상대를 유림이 이길 수 있다고?
“……한유림이 그 정도론 대단하지 않다고 보는데…….”
유림과 직접 대련을 한 건 아니었지만, 반년을 같이 지내며 이것저것 봐온 것이 많았다.
일단 그녀는 체력이 나빴고, 다른 애들처럼 늄의 양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뛰어난 늄 운용과 전투 센스로 이를 커버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림을 의심하던 당시에도 비슷한 결론을 내지 않았던가.
“너는 유림이 샨이었을 시절의 모습을 몰라서 그래.”
유림이 샨이었을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샨에게 들어서 그런지 테오는 그 말이 무척이나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죽기 직전에 유림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봤어.”
“…….”
“어릴 때였지만…… 아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 있어.”
“그치만, 한유림은 가지고 있는 늄이 얼마 안 되잖아. 늄의 양 차이는 무시 못 해.”
“그래. 나를 살리느라 늄을 반이나 떼어냈으니까.”
아주 잠깐 잊고 있던 사실에 테오가 숨을 삼켰다.
“늄의 양이 적어졌기에 유림이 할 수 있는 폭도 줄어들었지. 하지만 그만큼 늄의 운용이나 감각이 훨씬 뛰어나졌어. 거기다 그때에 비해 신체적으로도 더 자랐지. 그런 유림이 다시 히야스 교수님의 늄을 이식받아 그때만큼의 늄을 가지게 됐어, 할 수 없었던 걸 하게 된 거라고. 부족한 체력도 은하가 쉽게 보충해 줄 테지.”
유림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체력과 늄의 양. 하지만 그것이 이번에 모두 다 해결되었다. 이 짧은 시간에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이다.
아니, 이걸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테오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근데 그런 거면 뭘 걱정해? 도리어 잘된 거 아니야?”
“아니…… 그래서 더 문제야.”
“뭐가?”
“네가 만일 못 썼던 힘을 다시 찾으면 어떻게 할래? 심지어 그때에 비해 훨씬 쉽게 잘 쓸 수 있어.”
“…….”
아이러니하게도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답과 달리 입 밖으론 그 어떤 말도 나오지 못했다.
“나는 유림이…… 늄에 취할까, 그게 걱정이야.”
8형은 본질을 바꾸는 형. 전에 유림이 말했듯 늄의 그릇, 즉 생명조차 꺼내 쓸 수 있는 이들이었다.
샨이 걱정하는 것도 이거겠지. 유림이 스스로의 힘에 빠져 결국 제 생명까지 갉아먹을까 봐.
그가 궁극적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도 분명 이것이리라.
“과연 애들이 그걸 막아줄 수 있을까…….”
샨의 말에 테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어쩐지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
디하르와 데몽 그리고 쌍둥이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과 달리 한 자루의 검만 이용하는 유림의 검술은 디하르가 가르쳐 줬을 때보다 몇 발짝 더 발전되어 있었다.
부족한 힘은 반동과 회전을 활용했고, 작은 체구를 최대한 이용해 틈을 파고들었다.
신발이나 옷 부분부분의 성질을 변형시켜 속도를 높이거나 방어를 더하는 것은 물론, 중간중간 정론에서 벗어난 난투를 보이는 바람에 다단이 크게 당황한 적도 몇 있었다.
유림과 은하의 합도 놀라웠다.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던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은하는 완벽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엄호했다.
상처를 입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곧장 그걸 회복시켰고, 이 때문에 유림은 부상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다단에게 파고들 수 있었다. 검날을 맨손으로 잡으려는 미친 짓도 서슴없이 했다.
이에 다단이 은하를 노리려 했으나 그 공격도 완벽하게 상쇄되었다. 유림이 그러지 못하도록 한발 앞서 그의 움직임을 다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속도나 순발력에서 밀린 은하가 위험할 땐, 유림이 잡아당기는 등 몸을 움직여 그녀를 구해냈고, 바로 반격을 가하는 그 틈을 이용해 은하 또한 잽싸게 제자릴 잡았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헛되지 않은 듯 치고 빠지는 것이 완벽하게 맞물렸다.
전반적으로 유림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걸 단박에 알아차리고 움직이는 은하도 대단했다.
“쟤네…… 정말 그 촌구석에서 자란 애들 맞아?”
루아가 욱신거리는 상처 부위를 만지며 경악에 찬 얼굴로 말했다.
“거기 이상한 괴물들 많았잖아. 그 멧돼지도 있었고…… 그런 애들 때문에 단련된 거겠지.”
최대한 태연한 척하지만, 데몽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거기다 그의 추측은 반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커서는 우연히 몇 번 마주한 괴물들과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고 말았다.
물론 하림이 처참하게 다치고 온 둘이 또 다치지 않도록 훈련시킨 것도 한몫했다.
“이즈네가 말한 게 이건가 보군…….”
다단의 중얼거림에 유림이 피식 웃었다.
“그 여자가 뭐라 했나 보죠?”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자네가 진급시험 때와 많이 다르다더군.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별거 없어요. 애들은 원래 쑥쑥 큰다잖아요.”
“애라 치기엔 좀 큰 상태 아닌가?”
스무 살도 어린 거거든요.
유림이 살짝 짜증 섞어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다단의 검은 그녀의 검보다 1척 정도 길었기에 유림은 사정거리를 계산하며 몸을 움직였다.
“어쨌든 자네들의 계획 때문에 많이 놀랐어. 좀 전의 대책 없는 전기 마법도 그렇고, 지금도 그래. 한편으론 속이 좀 쓰리군. 자네들이 우리를 이렇게 막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유림은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그의 검 또한 검날을 미끄러트려 빗겨냈다.
“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버려서도 안 되겠군.”
“네?”
순간 다단이 검에 무게를 실어 유림을 공격해 왔다.
여태 그의 검술은 힘이 아닌 기술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직하면서도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변수를 두었고, 이따금씩은 맨손도 사용했다.
그런 그가 검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하하…….”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큰일 난다는 걸 알아서일까. 긴장감에 온몸이 저렸다. 문제는 이에 비례할 만큼 재미가 붙고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움직여 본 적이 또 있던가.
더욱이 늄의 운용이 그 무엇보다 잘 돼 기분이 좋았다. 전처럼 늄이 부족해 변형 몇 번으로 물건이 망가지는 일도 드물었고, 아슈팔이 만들어준 검은 저와 상성이 잘 맞아 무게나 경도를 바꿔도 금이 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뒤에 있는 은하도 여느 때보다 집중하고 있단 게 느껴졌다.
유림은 검의 무게를 좀 더 묵직하게 만든 뒤, 다단의 검을 쳐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낮춰 그의 다리를 걸었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한 다단이 한 바퀴 뒤로 굴러 벗어났고, 그가 떠난 자리 위로 검이 허공을 가르며 찌르고 들어갔다.
유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다단도 마찬가지였다.
채앵- 챙- 끼긱- 챙.
검과 검이 마주하며 불꽃이 일었다. 빠른 속도로 다단을 몰아붙이던 그녀는 다단이 검을 비틀어 잡는 것을 보고 잽싸게 몸을 물렸다.
그의 검이 길게 궤적을 그리며 가로로 베었다.
“하아…… 하아…….”
유림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돌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다단은 그런 유림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몰아붙였다.
그녀가 자세를 낮춘 건 그 순간이었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높이 검을 치켜드는 공격에 다단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잽싸게 검을 세워 유림의 검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캉.
날카로운 금속이 마치 파열음처럼 귀를 찔렀다.
“츳.”
짧게 혀를 차며 그대로 밀치려던 그때, 못 보던 검 한 자루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다단이 잊고 있던 또 한 자루의 검.
그녀가 전투를 시작하기 직전에 땅에 꽂아둔 거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서슬 퍼런 검날이 그의 목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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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