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59
제 259 화
유림이 1교사에 들어간 지 벌써 열 시간이 지났다.
시계는 자정을 훌쩍 지나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한기를 가득 머금은 겨울바람이 쉼 없이 불어왔다.
일행은 이미 온실과 근처 교사로 자릴 옮긴 뒤였다.
오직 샨과 은하, 그리고 디하르만이 보초의 명목으로 1교사 앞을 기다렸다.
초조함에 주변을 서성거리던 샨은 1교사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곧이어 그 안에서 유림과 덴 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림!”
샨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검을 손질하던 디하르와 모닥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던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유림은 제게 달려오는 세 사람을 향해 웃다, 문뜩 하늘이 새카맣게 변한 것을 보곤 입을 벌렸다.
기술을 배우는 것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이리 지난 줄 몰랐던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걱정했잖아.”
새빨개진 코를 비비며 은하가 투덜거렸다.
“미안. 좀 어려워서…… 그보다 지금 몇 시야?”
“1시 50분.”
맙소사. 그렇게 오래 있었다고?
다단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고 해놓고선 정작 저가 이렇게 시간을 벌어주다니.
“당장 가야겠어요.”
유림의 말에 케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고, 세 아이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간다고?”
“조금이라도 쉬다 가!”
디하르와 은하가 유림을 말렸다.
동이 틀 무렵에 내부의 적이 쳐들어왔고, 이후론 쉬지도 못한 채 싸웠다. 싸움을 대비해 준비하고 기다린 시간까지 더하면 체감상 느끼는 피로감은 그보다 더했다. 심지어 유림은 덴 케이에게 변형을 배우느라 지금까지 계속 늄을 쓰지 않았던가.
근데 바로 간다니.
“히야스 교수님께 다녀올게.”
“림!”
은하가 채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유림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한 것을 알려주듯 빠르게 걷던 걸음이 어느새 뜀박질로 바뀌었다.
한참을 달려 무성한 나무 너머로 온실 특유의 유리 벽이 보인 순간, 누가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고갤 돌리니 샨이 가쁜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샨?”
“림…….”
저를 쫓아 여까지 달려왔는지 그가 크게 숨을 골랐다. 유림 또한 크게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 늄…… 도로 가져가.”
예상치 못한 말에 유림이 눈을 홉떴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어쩐지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아.”
어릴 때부터 계속 해오던 생각. 유림에게 제 늄을 돌려주자.
비록 히야스의 다그침으로 인해, 그리고 삶에 조금 미련이 생겨 그 생각을 접긴 했지만, 유림에게 늄이 많이 필요해진 지금은 그런 게 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저는 살아 있다 하기 어려웠고, 제 몸을 이루는 늄의 반은 유림의 것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그마저도 다 쓰고 없어 거의 텅텅 비지 않았던가. 어차피 곧 고갈돼 죽을 목숨이라면, 도움이라도 되게 돌려줘야만 했다.
“가져가.”
유림은 아무 말 없이 샨만 올려다봤다.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한참 만에 유림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
가장 처음 이 생각을 한 건 유림이 저를 거부했을 때. 그것이 다짐으로 바뀐 건, 유림의 정보가 다른 곳에 흘러갔다는 걸 알았을 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유림에게 늄을 돌려주자.
하지만 차마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샨은 말을 돌려 대답을 회피했다.
“시간 없다며. 어서 가져가. 괜찮아.”
“……어릴 때부터구나.”
“…….”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거였어.”
아무 말도 못 하는 샨을 보며 유림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짧게 답했다.
“알겠어. 네 늄 빌려 갈게.”
마치 옳은 결정을 했다는 듯 샨이 고갤 끄덕였다.
유림은 씁쓸함을 삼키며 샨의 팔을 잡았다.
긴장감과 달리 심장은 의외로 잔잔히 뛰었다.
샨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제 늄이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전혀 달랐다. 늄이 빠져나가긴커녕 도리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샨은 유림이 제게 늄을 주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림!”
뿌리치려는 팔을 놓치지 않게 꽉 잡은 유림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진작 채워줬어야 했는데, 좀 무서워서 미루고 말았어.”
히야스와 안젤리카의 관계를 알았을 때, 그리고 안젤리카들의 용도를 알았을 때 유림은 저가 샨에게도 늄을 채워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쩐지 껄끄럽고 무서워 계속 피했었다.
처음엔 히야스의 일을 핑계로, 그 뒤엔 진급시험을 핑계로, 깨어난 뒤에는 내부의 적을 핑계로. 모든 걸 다 정리하고 채워줘야지.
설마 샨이 이런 생각을 해왔을 줄은 추호도 모른 채.
“샨, 나는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도 똑같은 짓을 했을 거야. 모든 걸 알아도 너를 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겠지.”
“…….”
팔을 빼내려던 샨의 몸이 뚝 하고 굳었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유림의 인생에 있어 가장 최악인 순간이 샨을 되살린 그때이듯, 샨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지금 유림의 말이 너무나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후회하고 자책하고 죽을 만큼 힘들다는 걸 알아도 살릴 정도로 소중하단 뜻이니까.
내내 부정당했던 제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받는 것 같았다.
“이건 내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진짜 이기적인 생각인데, 지금은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뻐.”
“…….”
“으아…… 이거 무진장 낯간지럽네!”
유림이 양손으로 뒷목을 박박 긁으며 소리쳤다.
“하여튼! 앞으론 그런 말보단 그냥 어떻게 살지 생각해 주라. 그편이 좀 더 기쁠 거 같아.”
샨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목이 메었다.
유림은 그런 샨을 보며 작게 웃었다.
“지금은 늄을 아껴야 하니까 많이는 못 채워주고, 돌아와서 잔뜩 충전해 줄게.”
“……응.”
가까스로 내뱉은 한 음절엔 눈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유림은 샨더러 고개를 숙이라 한 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금방 돌아오겠단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샨은 이번엔 유림을 쫓아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늘 삼켰던 눈물을 처음으로 닦아냈다.
***
클레이즈의 북쪽 산은 기세가 높고 험난한 데다 근처에 있는 건물은 연구생들의 교사였기에 일반 학생과 교수들은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심지어 이 이상은 넘어가지 말라는 울타리가 산의 초입에 세워져 있었기에 대부분 산 안으론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 곳의 초입에 선 유림은 저를 따라 여까지 같이 온 일행을 보며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배웅 안 해도 된다니까…….”
바로 간다는 유림의 이야기에 온실에 있던 일행은 물론, 히야스와 아슈팔까지 따라 나왔다.
1교사와 붙잡은 내부의 적들은 전임 교수님들에게 맡겨둔 뒤였다.
“진짜 조금만 쉬다 가면 안 돼?”
“그래. 더도 말고 한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고 가.”
은하와 루아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지금 정신도 말똥말똥하고 컨디션도 최고 좋아.”
도리어 애매하게 쉬었다간 몸이 더 피곤해질 상이었다. 차라리 지금 이 상태로 가는 게 좋았다, 독기 변형도 감을 잃기 전에 하고 싶었고.
몇 번을 말해도 제 고집을 굽히지 않을 걸 안 은하가 드물게 잔소리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효…… 하여간 고집만 세다니까.”
“세상에…… 은하가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날이 오다니…….”
키득거리며 놀리자 은하가 볼을 살짝 부풀렸다. 그리고 미리 모아두었던 모두의 펜던트를 건넸다.
크리스털 아홉 개가 부딪치며 맑은 소릴 냈다.
“늄 빵빵하게 채웠어.”
만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늄을 부여했는지.
“색이 다 똑같아서 어느 게 누구 건진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 만지면 알 수 있어.”
유림도 제 펜던트를 목에서 빼낸 뒤, 은하에게 주었다.
“통신이 안 될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가지고 있어. 도착하자마자 할 테니까.”
“응.”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곧이어 아슈팔이 손질한 검을 유림에게 줬고, 히야스가 특유의 시니컬한 어투로 말했다.
“거기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싸돌아다녀.”
“네.”
덴 케이도 덧붙였다.
“다단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라의 문 열쇠를 뺏는 게 더 중요해. 그걸 얻으면 더 싸우지 말고 곧바로 클레이즈로 돌아오도록 해.”
“네.”
테오와 디하르도 걱정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다가 안 될 거 같으면 객기 부리지 말고 바로 도망쳐라. 알겠어?”
“다치지 말고, 도망칠 곳 늘 보면서 싸우고.”
두 사람이 포문을 연 듯 다른 일행도 저마다 잔소리를 한마디씩 얹었다. 무리하지 마라, 늄 잘 봐가면서 싸워라, 조심해라 등등.
계속된 잔소리에 유림이 이제 좀 그만하라고 하려 할 때, 데몽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한유림. 펜던트 빌려주는 거다. 다시 반납하러 와.”
“…….”
따지려던 말이 쏙 들어가고 대신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야, 이거 내가 만든 거거든?”
“줬다 뺏는 거냐? 역시 치졸하네.”
역시라니. 대체 날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는 거야.
“그래. 치사해서라도 반납하러 온다.”
유림은 아홉 개의 펜던트를 목에 건 뒤, 검을 칼집에 꽂았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은은한 달빛에 얼음이 보석처럼 빛났다.
얼음 서고로 후퇴한 후, 약간의 휴식을 가진 다단은 기다란 검을 등에 인 채,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겨울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서고 안을 맴돌았다.
이곳을 보며 흥분한 진유나 이즈네와 달리 다단은 여전히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이곳의 책을 본다고 과거의 영광과 늄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게 바로라곤 할 수 없었다. 시대가 좀 더 흐른 뒤, 운이 나쁘다면 제가 죽은 뒤에나 찾을 수 있겠지.
그는 언제고 확실하고 빠른 게 좋았다.
지금도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것.
가령 본질 변형 같은.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얼음 안에 갇힌 책을 쓸었다.
그때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단은 잽싸게 몸을 물려 피했다. 그러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와 땅에 메다꽂혔다.
피하지 않았다면 정확히 머리를 관통당할 위치였다.
그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꽁꽁 얼린 책장 위에서 긴 활을 들고 있는 유림이 보였다.
긴 코트가 바람에 펄럭였다.
아아- 그녀가 이곳에 오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왔군.”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입 모양을 읽기라도 한 걸까. 유림이 입꼬리를 말며 짧게 답했다.
“제가 좀 늦었네요,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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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