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62
제 262 화
다단은 유림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그 몸 상태론 독기를 변형해 가며 클레이즈로 도망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유림이 자신의 늄을 쓰지 않고 친구들의 늄을 이용하는 건 제 늄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그러니 분명 이 안에 숨어 있었다.
“이 중 하나로 들어간 건가…….”
얼음 서고엔 용도를 모를 동굴이 여러 개 있었고, 그 길이와 깊이는 제각각이었다.
내부의 적들도 서고에 집중하느라 굴의 용도에 대해선 크게 조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이 막혀 있는 것도 있으니 분명 이가 클레이즈와 이어져 있진 않을 것이다.
그는 눈을 감고 주변에 집중했다.
고요한 공기와 잔잔한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나마 유림의 늄이 느껴졌다.
“저쪽이군.”
다단은 얼음 가지에서 빼낸 검을 고쳐 매고, 유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림이 숨은 굴은 그 폭이 타 굴에 비해 조금 작았다.
하지만 딱히 어둡거나 하진 않았다. 위치 때문일까. 은은한 달빛이 벽에 반사돼 굴 안이 작은 촛불을 켜둔 것처럼 은은하게 비쳤다.
유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안 들어가 굴 중턱에 서 있는 유림과 마주쳤으니까.
다단은 시선을 검을 찔렀던 배로 내렸다. 옷에 붉은 피가 번져 있었지만,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됐단 것은 알 수 있었다.
“은하의 늄을 빌린 건가.”
“제 주치의가 늄이 좀 짱짱해서요.”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몇 군데 더 찌를 걸 그랬군.”
낮은 웃음이 섞인 말 치곤 내용은 참으로 살벌했다.
“그래도 이마의 상처를 치료 못 한 걸 보니, 은하의 늄이 넉넉하진 않았던 모양이야.”
그럼 이젠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치료할 수 없겠군.
작게 덧붙이는 말에 유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단의 저 말은 농이 아닐 것이다. 분명 저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놓겠지.
유림은 긴장을 닦아내려는 듯 이마의 흘러내린 피를 훔쳤다.
그리고 미리 두었던 두 개의 나뭇조각에 늄을 부여했다.
엄청난 양의 늄이 응집되더니 이내 나무가 엄청난 속도로 자라 천장에 박혔다.
굴이 작게 흔들릴 즈음에야 다단은 유림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아챘다. 자신이 나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은 것이다.
커다란 금과 함께 굴의 천장이 쩍쩍 갈라지더니 돌조각이 무너져 내렸다.
콰아아-
텁텁한 모래먼지와 함께 찬기가 다단의 뺨을 두드렸다.
다단은 시선을 뒤로 했다. 동굴의 입구가 무너진 잔해들로 인해 완벽하게 막혀 버렸다.
계속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천장에 박힌 나무가 입구까지의 모든 길목을 막아내는 듯싶었다. 신기한 것은 입구가 막혔음에도 동굴 내부는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앞이 보이는 거였다.
근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스스로 유일한 탈출로를 막아버리다니…….
다단이 우세한 지금, 이건 그에게 좋은 일밖에 되지 않는다.
“동굴의 입구를 막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군.”
유림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
다단은 유림의 얼굴을 살폈다. 입구가 막혔음에도 신기하게 동굴의 내부는 전처럼 앞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딱히 당황하지 않는 걸 보니 어둠을 노린 건 아닌 것 같고…… 대체 왜 무너뜨린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다단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라의 문을 노리는 건가.”
유림과 다단의 목적은 서로를 붙잡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상대방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라의 문이 필요했다.
유림은 그 상황을 앞당긴 것이다.
설령 자신이 져서 붙잡히더라도 동굴의 입구가 막혀 있으면 서고로 나갈 수 없고, 즉 곧바로 라의 문을 이용해 클레이즈로 가는 수밖에 없으니까.
유림은 그걸 예상하고 이 상황을 만든 것이다.
“라의 문 열쇠를 꺼내게 유도하는 건가?”
“알면 구경 좀 시켜주세요. 그 대단한 열쇠 어떻게 생긴건지 좀 궁금하거든요.”
다단이 피식 웃으며 웃옷 안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키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언가였다.
“열쇠라면 이렇게 생겼네.”
태연한 그의 행동에 유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설마 이렇게 쉽게 꺼내 보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냥 들고 다녔다니…….
“눈에다 넣은 게 아니었네요…….”
상대방 눈을 건드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저 중요한 걸 대충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걸 아니 뭔가 찜찜했다.
“그렇게 자주 쓸 물건이 아니니 세룬 교수님처럼 몸에 넣고 다닐 이유가 없지.”
“저만 데리고 나가면 이곳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들리네요…….”
“이곳에 있는 방대한 역사보다 자네의 존재가 좀 더 맘에 드니까.”
곧이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한다면 주지. 가져가게나.”
다단이 가볍게 열쇠를 위로 던졌다.
저걸 잡으러 가는 한심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쇠를 따라가는 시선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사이 단숨에 거릴 좁힌 다단이 유림을 공격했다.
가까스로 그의 검을 피한 유림이, 열쇠가 떨어진 위치를 확인한 뒤 루아의 펜던트를 입에 물고 디하르와 테오의 펜던트를 양손에 감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곧이어 두 사람의 검이 격돌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동굴을 타고 이명처럼 울렸다.
유림은 상황에 따라 친구들의 늄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날쌔거나 방어적인 움직임이 필요할 땐 륜의 늄을, 무기나 옷을 단련할 땐 디하르의 늄을, 그리고 중간중간 테오의 늄을 이용해 폭발을 일으켜 거릴 벌렸다.
가장 먼저 고갈된 건 테오의 늄이었다.
유림은 펜던트를 저만치 집어 던진 뒤, 달려들었다.
다단은 그제야 유림의 목에 남은 팬던트의 수가 처음 봤을 때보다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다 쓴 건 버리는 건가?”
“무겁게 가지고 있을 필욘 없으니까요!”
유림의 검이 다단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세를 몰아 그를 찌르려는 순간, 다단의 검날이 어깻죽지를 노렸다.
륜의 늄 덕에 어깨뼈가 나가는 건 면했지만, 베이는 걸 피할 순 없었다.
“윽……!”
새빨간 피가 뺨에 튀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왼쪽 어깨를 다쳤단 거였다.
유림은 피를 훔치지도 않은 채, 곧바로 다단을 공격했다. 둔한 왼쪽 팔의 움직임은 오른쪽 팔로 커버했다.
유림은 이번엔 륜의 펜던트를 저만치 집어 버리고 루아의 펜던트를 입에 물었다.
친구들의 늄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유림의 움직임은 느려졌고, 상처는 점점 많아졌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 낭비를 할 거지?”
“시간 낭비라고요?”
“그래. 자네도 알 텐데. 나를 이길 순 없다고.”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죠.”
“심한 꼴 당하기 전에 나를 도와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돼지 똥 싸는 소리 하네. 뭐가 도와주는 거야.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그의 검을 쳐낼 때, 다단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축제 때 그런 약속을 했었지. 자네가 나를 도와주기로.”
집행회에 잡혔다 구출되었을 때를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 비슷한 약속을 하긴 했었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유림이 도발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이 바뀔 수 있도록 말이죠.”
다시금 두 자루의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주쳤다. 유림은 루아의 늄에 집중해 검날에 강력한 전류를 휘감았다.
검을 타고 흐른 전기에 팔이 저릴 법도 한데 다단은 쌩쌩했다. 도리어 유림만 손이 얼얼했다.
무슨 몸뚱이가 저렇게 튼튼한 거야.
늄도 장난 아니네. 아무리 운용을 잘한다 해도 그렇지 이쯤 되면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어제에 이어 연달아 쓰는 건데?
루아의 늄 마저 떨어지자 유림이 이를 갈며 펜던트를 끌러 내던졌다.
계속된 싸움에 체력은 손이며 다리며 후들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내 다 던져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목을 보며 다단이 말했다.
“이제 끝난 모양이군.”
유림은 클레이즈에서 싸웠던 것처럼 검이 움직이는 것에 맞춰 무게와 강도를 자유자재로 변형시켰지만, 슬프게도 유림의 몸 상태가 이를 지탱하지 못했다.
다단은 검을 비스듬히 세워 유림의 옆구리를 심하게 파고들었다. 살점이 크게 벌어질 만큼 심한 공격에 균형이 크게 무너졌다.
유림은 왼쪽 검을 내던진 채, 피를 잔뜩 토해내는 상처 부위를 짚었다.
한계가 왔다는 것이 눈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야 끝나는 건가?
티는 크게 안 났지만, 유림과 상대하느라 다단 또한 상당수의 늄을 쓴 상태였다. 거기다 큰 상처가 아니어서 그렇지 정확히 허점을 파고드는 예리한 검 때문에 자잘한 상처는 입은 뒤였다.
다단은 빨리 일을 끝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마치 그가 먼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림이 날카롭게 검을 찔러왔다.
그것은 피하기엔 너무나도 빠르고 예리한 움직임이었다.
곧이어 검날이 단단한 무언가를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눈가로 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살짝 뺀 유림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뒤늦게 인지하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할…….”
다단의 가슴을 찔렀을 거라 예상한 검이 대신 그의 오른팔에 박혀 있었다.
설마 이렇게 막을 줄은 몰랐는데…….
분한 마음에 이를 갈던 유림이 다시금 그를 노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팔에 박힌 검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 뭐야?”
돌에 박힌 것처럼 빠지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검에 유림이 크게 당황했다.
“이번 건 위험했어.”
머리 위로 다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유림을 가격했다.
묵직한 통증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날아간 유림이 고개를 숙이며 막힌 숨을 토해냈다. 이마의 상처가 다시 찢어져 피가 얼굴을 적셨다.
다단은 유림의 검을 뽑아낸 뒤, 뒤로 던졌다. 검이 긴 호선을 그리며 저만치 뒤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트린 검도 걷어차 저만치 굴러간 지 오래였다.
결국, 두 자루의 검을 다 잃은 유림이 비녀를 뽑아들어 검으로 변형시켰다. 늄이 부족하단 것을 여실히 보여주듯 평소보다 엉성한 검이 제 손에 쥐어졌다.
아슈팔의 검으로도 가까스로 버틴 유림이 그런 검으로 다단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다음 합에서 검이 부서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거친 숨이 연달아 토해졌고, 과하게 흘러내린 피에 웃옷이 붉게 물들었다.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설 힘조차 없었다.
다단은 검을 옆에 내리 꽂은 뒤, 천천히 유림에게 다가왔다.
“심한 짓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팔다리는 부러트려 놓는 게 좋을 거 같군.”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유림이 흐릿한 시야를 가까스로 유지하며 몸을 말았다. 다단은 그런 유림이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리고 맥없이 처진 팔을 잡았다.
그때였다. 유림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그래. 유림은 내내 이때를 기다렸다. 그가 제 늄이 다 떨어진 걸 알았을 때, 그리 생각하고 별도의 방어도 없이 저를 붙잡을 때.
안도는 늘 행동에 큰 허점을 만들어낸다.
유림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숨겨두었던 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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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