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64
제 264 화
그날 이후 유림은 클레이즈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슈팔이 유림을 찾기 위해 혼자 얼음 서고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유림은 찾지 못했고, 대신 돌려주기로 약속한 펜던트 몇 개를 들고 오는 게 전부였다.
일행은 직접 가서 그곳을 수색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라의 문 열쇠가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덴 케이는 라의 문 열쇠를 다시 만들기로 했고, 이를 돕기 위해 아슈팔은 어쩔 수 없이 연구생, 즉 전임 교수를 계승하기 위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열쇠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었기에 일행이 얼음 서고에 가게 된 것은 2클래스의 진급 시험을 일주일 앞뒀을 때였다.
몇 달 만에 가까스로 도착한 그곳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유림은 찾을 수 없었다. 의심가는 무너진 굴이 하나 있었으나 너무 위험해 들어갈 수 없었다.
은하는 그 안에서 유림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아슈팔의 도움으로 매일매일 얼음 서고를 오갔다. 히야스나 디하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러 진급 시험이 끝나고, 어쩐지 가슴 아픈 단어인 방학이 모두를 찾아왔다.
***
진급시험이 끝나고, 온실에 모인 리리아와 해우 그리고 하진이 모처럼만의 휴식을 즐겼다.
그간 어찌나 바빴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였다.
“아…… 죽을 거 같아.”
리리아가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말했고, 하진 또한 눈그늘을 잔뜩 그린 채 푸념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좀 자고 싶군.”
“이렇게 쉬는 게 며칠 만인 줄 모르겠어…….”
진짜 얼마 만인 거야?
해우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날짜를 세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리리아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이렇게 토 나올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물며 다단에 진유는 물론 파직당한 이즈네까지 더해 전임 교수의 자리가 셋이나 비었기에 교수들은 다음 후임을 뽑고 이것저것 가르치느라 더 바쁠 수밖에 없었다.
“케이랑 히야스는?”
가장 늦게 도착한 해우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제일 먼저 와 있던 리리아가 답했다.
“히야스는 안 왔고, 케이는 그런 히야스 데리러 갔어.”
“그래…….”
그날 이후 바빠진 모두와 달리 유일하게 시간이 멈춰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샨이었고, 또 하나는 히야스였다.
유림이 혼자 간다고 했을 때, 허락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건지 그는 늄을 회복하지도 않은 채, 북쪽 산 경계에서 머물다시피 했다.
아슈팔이 라의 문 열쇠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를 빼곤 얼음 서고에도 가지 않았다.
“유림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걸까?”
리리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해우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렇겠지. 유림이 얼음 서고에 없다 했으니, 분명 금지된 땅 어딘가에서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 거야.”
얼음 서고처럼 독기가 없는 땅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률을 둘 수 없을 만큼 희박한 일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유림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으…… 모르겠다. 어쨌든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고생 그만 시키고 나타났으면 좋겠어. 아, 맞다. 너희 애들더러 방학 때 어떻게 하라고 했어? 역시 집에서 쉬다 오라 해야 하나?”
내부의 적과 대치하느라 저들 못지않게 고생하지 않았던가. 괜히 학교에 있다간 이것저것 신경 쓸 일만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숨통을 트기 위해서라도 쉬는 게 좋았다.
“무조건 돌려보낸다. 한 놈도 빠짐없이.”
하진이 결단코 그래 보이겠다며 답했다.
“그래야겠지?”
리리아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도 아이들을 돌려보냈으면 하지만, 가란다고 순순히 갈지 의문이었다.
***
“안 돌아가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는 루아를 향해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학교에 남아 있으려고. 림이 잠들었을 때도 내가 자릴 비웠을 때 깨어났잖아. 어쩐지 지금도 그러지 않을까 해서 못 가겠어.”
“하지만…….”
“아슈 선배도 학교에 남아 있는데.”
그 소린 방학 내내 얼음 서고를 들락거리겠다는 말이 아니던가.
루아가 턱을 괴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은하 옆에 앉은 레이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물론 모두 다 유림이 죽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옳진 않단 생각이 들었다. 설령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도 말이다.
“그래도 잠깐이라도 다녀오는 게 어때? 가족들도 걱정하고 계실 거 아니야.”
“맞아. 우편도 계속 막혀있는 바람에 편지도 못 보냈잖아.”
내부의 적은 물론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요 근 몇 달간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교수님들이 나갈 때마다 대신 전해주겠다 했지만, 바쁜 사람에게 일을 괜히 더 시키는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주일만 쉬다 와.”
“그래. 이러다 네가 먼저 쓰러지겠어.”
“그치만…….”
쌍둥이는 은하가 고민의 빛을 보이자 열을 내며 설득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은하를 방으로 데려가 곧바로 짐을 싸게 만들었다.
기숙사에 제출할 서류를 쓰고 라의 문 신청을 하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은하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심지어 사혈로 가는 건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디하르도 가?”
간략한 짐가방 하나를 든 디하르가 은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랑 뽀송이는?”
은하의 질문에 쌍둥이가 침울한 표정을 했다.
“우리는 집에 가야 해서…….”
솔직히 레이먼은 자신이 디하르 대신 은하와 사혈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가 갔다간 은하네 식구들이 부담스러워 할 게 안 봐도 뻔했다. 거기다 은하 못지않게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디하르의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샨도 같이 보냈으면 했다.
샨은 유림이 돌아오지 않은 뒤부터…… 아니, 유림을 찾을 수 없단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정보 동아리방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연락을 안 받는 것은 물론 수업도 안 들었다.
아마 제 늄을 유림에게 주지 못한 걸 자책하고 있는 거겠지. 그 늄이 있었다면 무사히 돌아왔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 돌아와도 유림이는 안 기뻐했을 텐데…….
“…….”
어쩐지 울적한 기분이 들어 레이먼은 도리질을 치며 슬픈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그럼 둘 다 잘 다녀와. 올 때 선물 사오고.”
“백작님하고 아버지한테 안부 전해줘.”
“걱정마셔.”
쌍둥이는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1교사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라의 문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방학을 이용해 사혈에 가는 건 여행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사람은 그때와 달리 대륙 열차에 올라 령까지 간 후, 마차를 빌려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혈에 도착해선 달로 가는 비행선을 타야 했다.
입학시험을 치르러 갈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쌍둥이의 말처럼 일주일만 있다 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혈까지 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으니 말이다.
드디어 달에 도착해, 사혈로 가는 마차에 오른 은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추를 잔뜩 달고 있는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피곤하다…….”
“뭐라도 먹을래?”
은하가 금방 도착하니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디하르가 따라왔을 땐, 그냥 혼자 맘 편히 가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가 같이 와 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먼 거리를 혼자 왔다면 조금은 무서웠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유림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역시 사혈은 멀구나.”
그리고 제가 사는 소난은 더 멀었다.
근데 왜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 멀게 느껴질까. 실상 고생도 그때가 더 하고, 시간도 더 걸렸는데 피로는 지금이 훨씬 심했다.
“빨리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푹 쉬고 싶어.”
“사혈의 여름은 어때? 많이 더워?”
“음…… 클레이즈랑 비슷한 거 같아.”
“그래?”
“응. 바람도 많이 불고, 그늘도 많아. 림은 습하다고 싫어했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같이 잘 쏘다녔다. 산에서 목각 인형에게 일 시키고 쉰 적도 많았다.
이런 일상이 바뀐 건 입학시험 초대장이 온 뒤부터였다.
그땐 이렇게 다양한 일이 펼쳐질 거라곤 꿈도 못 꿨는데.
은하는 창틀에 턱을 괴며 스쳐 지나가는 나무를 바라봤다.
클레이즈에 간 걸 어떻게 생각햐나고 묻는다면 은하는 망설임 없이 좋다고 대답할 것이다.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재미난 일도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됐다.
그날 클레이즈에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림과 태평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따라붙었다.
“림……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응…… 보고 싶다.”
마차가 무성한 나무를 가르며 천천히 길을 올랐다.
사혈과 달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몇 분 안 돼 사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 너머로 사혈 특유의 풍경이 보였다. 푸른 들판과 몇 채 안 되는 작은 집들. 허전한 마음을 숨기며 은하가 활짝 웃었다.
“도착했다.”
“짐 줘, 내가 들게.”
“아니야. 아까도 들어줬잖아. 그리고 옷 많이 안 챙겨서 안 무거워.”
은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제 짐가방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였다.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
고개가 저도 모르게 산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그토록 찾고 그리워하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신경을 안 쓰면 놓칠 만큼 흐릿하고 희미했지만, 착각은 아니었다.
“은하?”
“…….”
딱딱하게 굳은 채로 먼 곳을 응시하는 은하를 보던 디하르 또한 무언가를 깨닫고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은하가 뛰쳐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내팽개친 짐도, 같이 온 디하르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단 한 곳에 집중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미로처럼 얽힌 나무들을 지나 어릴 때부터 자주 쉬러 가던 곳으로 달렸다. 종종 유림이 나무를 베던 그곳으로.
뛰면 뛸수록 선명해지는 기운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유림이 돌아오길 바랐을 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그리고 풀로 둘러싸인 사잇길을 지나 자주 왔던 작은 공터에 도착했을 때, 은하는 눈물을 왈칵 터트리고 말았다.
물에 번진 시야 너머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작은 키, 조금은 헐렁해 보이는 옷, 비녀로 대충 올려 묶은 자색 머리칼과 주변에 쓰러져 있는 나뭇조각들.
“뭐야. 갑자기 뛰어와서 놀랐잖아.”
특유의 퉁명스러우면서도 개구진 목소리까지.
“림…….”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여느 때와 같은 모습에 은하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왜 여기 있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걱정했는데…….”
은하의 말에 유림이 답했다.
“바보야. 이럴 땐 어떻게 여기 있냐고 물어야지.”
퉁명스러운 웃음에 은하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애처럼 엉엉 소릴 내며 우는 것이 어쩐지 그간 참았던 감정을 쏟아내는 것만 같아 유림은 괜히 코가 시큰거렸다.
“은하.”
유림이 은하를 보며 이리 오라는 듯 팔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은하가 울며 달려가 그토록 기다리던 친구를 끌어안았다.
빳빳한 티셔츠의 어깨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약속…… 늦게 지켜서 미안해.”
유림은 은하의 등을 다독이며 작게 사과했다.
뒤늦게 도착한 디하르는 유림을 보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림…….”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는지, 어째서 그간 연락이 없었던 건지, 별일은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제 앞에 있단 생각만 들었다.
유림은 디하르에게도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뻗었다.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눌러 담으며 디하르가 천천히 유림에게 다가갔다.
둘 다 목이 메 다행이라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못 했다. 그저 손을 꼭 잡으며 다시 만났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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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